- 마이단 광장을 마주한 한 호텔의 방공호. 지하 4층에 위치해 있다. 500명은 족히 수용할 정도로 넓다. 마치 미로처럼 방이 이곳저곳에 있으며 침구와 물을 상시 구비해 뒀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다. 사진=박지현 기자
마치 칼 같았다. 지난 5월 9일 시작된 사흘간의 휴전은 단 하루도 넘기지 않았다. 11일 자정, 약속된 시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의 공습이 재개됐다.
새벽 시간, 도시의 정적을 깨는 것은 새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사이렌 소리다. 공습경보 앱 ‘에어 얼러트(Air alert)’는 이와 함께 “지금 당장 가까운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게 되게 섬뜩하다.
현지인들은 이 앱보다 텔레그램 채널에 의존한다. 앱이 드론 경로상의 모든 지역에 광범위한 경보를 보낸다면, 텔레그램은 반경 몇 미터 이내의 정확한 타격 예상 지점을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때문에 불필요한 대피를 줄일 수 있다.
경보가 울리면 가장 안전한 곳은 지하철역 방공호다. 키이우 지하철은 구소련 시절부터 핵전쟁 등 유사시에 대비한 방공호 겸용 시설로 설계됐다. 깊이가 어마어마하다. 지하철 1호선의 아르세날나역은 지하 105.5m에 자리하고 있다. 최근까지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역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현재 1위는 중국 충칭의 홍옌춘역(116m)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방공호는 졸로티 보로타(Zoloti Vorota), ‘황금의 문’역이다. 지하 96.5m 깊이에 자리한 이 역은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 갈아타야 승강장에 닿을 수 있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와 정교한 모자이크 장식 덕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 중 하나로 꼽힌다.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직후, 이 역을 포함한 깊은 지하철역들에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몰렸다.
지상으로 올라오면 호텔들도 저마다 대피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닷새 간 묵었던 호텔은 도시의 심장부인 독립광장(마이단) 인근에 있다. 1961년 ‘긴즈부르크의 마천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만큼 견고한 지하 방공 시설을 자랑한다.
경보 발령 후 미사일이나 드론이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5분. 외지 방문객들은 잔뜩 긴장한 채 대피시설을 찾지만, 정작 현지인들의 표정은 덤덤하다. 공습경보가 울려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실제로 호텔 방공호 역시 매일같이 텅 비어 있었다.
전쟁 중 키이우를 방문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어느 호텔이 안전하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안전 팁’도 공유된다. “인터컨티넨탈에 머물라. 미국인이 많아서 러시아도 쉽게 공격하지 못한다.” “하얏트를 추천한다. 거길 폭격하는 건 선 넘는 일이다. VIP와 외교관들이 묵는 곳이라 러시아 입장에서도 부담이 크다.” 외교적 파장을 고려한 현실적인 계산이다.
자체 방공호를 갖춘 호텔이나 지하철역 바로 옆 숙소를 찾으라는 조언도 잇따른다. 도심 중심부, 특히 포딜·마이단·졸로티 보로타·우니베르시테트 일대가 비교적 안전하다는 게 중론이다. 반면 동부 외곽이나 드론이 가장 먼저 지나가는 보리스필 방향은 피하라고 한다.
경보가 울려도 대피하지 않는 현실은 때로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번 공습으로 키이우 시내에서만 최소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도시 중심부라고 안전한 건 아니다. 지난해 1월 1일에는 유명 생물학자 부부가 숨졌다. 타라스 셰우첸코 국립 키이우대학교의 신경생물학자 이호르 지마와 생물학 박사 올레시아 소쿠르다. 이들의 집은 페체르스키 지구였다. 우크라이나 국회에 해당하는 베르호브나 라다와 대통령궁, 정부 청사, 중앙은행이 밀집해 키이우에서도 가장 안전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완벽한 방공호와 정확하고 신속한 알람. 한데 매시간 울리는 경보에 맞춰 대피하다간 일상이 먼저 무너진다. 살아가기 위해 대피를 포기해야 하는 현실. 만성화된 전쟁이 만들어낸 잔인한 아이러니다.
키이우=박지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