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 작가의 장편소설 《동도군》… 동학농민, 피와 흙과 바람으로 다시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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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곧 하늘(人乃天).”

 

김상현 작가의 장편소설 동도군(2025)은 이 한 문장을 다시 인간의 언어로 되살린다.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이라 부를 것인가, ‘농민전쟁이라 부를 것인가 이 논쟁은 오랫동안 역사학계와 교과서 속에서 이어져 왔다. 그러나 문학은 묻는다. “그들이 왜 싸웠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 작품은 충청 내포 지역의 들판과 백성의 언어 속에 묻힌 혁명의 숨결을 복원한다. 작가는 수년간의 현장 답사와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실제 사건의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가상의 인물들을 세워 사람의 하늘을 향해 몸부림쳤던 민초들의 서사를 다시 쓴다.

 

내포의 들판, 봉기의 불씨

 

이야기는 충남 합덕의 한 방죽에서 시작된다. 탐욕스러운 지주 이정규가 소작인 안인무를 꾸짖는다.

 

내 물을 먹는 자들이 공덕비는 못 세울 망정 나를 비방한다니, 그런 자에게 소작을 줘서는 안 될 일이네.”

 

그 한마디에 조선 말기의 구조가 응축되어 있다. 땅을 가진 자가 생명을 지배하던 세상, 사람은 이름보다 신분이 앞섰던 시대.

안인무는 겉으론 웃었으나 속으로는 피를 삼켰다. 그의 마음속에 서린 불씨는 곧 농심의 발화(發火)”로 터진다.

 

김상현은 이 장면을 통해 동학농민전쟁의 기원을 굶주림의 생존이 아니라 존엄의 각성으로 포착한다. 억눌린 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일어서는 순간, 세상은 달라진다.

 

혁명보다 뜨거운 인간의 선언

 

동학의 사상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이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간의 근원적 각성이다.

 

소설 속 농민들은 교조의 추종자가 아니다. 그들은 흙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싸운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말은 이 작품이 관통하는 윤리이자, 작가가 전하려는 문학적 신앙이다.

 

인연과 회한 덕배와 박성삼

 

소설의 중반부로 들어서면, 전쟁 속에서도 인간의 인연이 빚어내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덕배는 멍하니 박성삼을 바라본다.

 

그럼, 그때 지게에다 관 지우고, 망자 노잣돈 내놓으라고 옥박지르던 양반이 대장님이셨단 말유?”

미안하네.”

이제 와서 뭐 미안할 것까지야 없지요. 그때는 대장님 주먹이 하도 매서워서, 진짜로 대갈통이 박살 난 줄 알았시유.”

 

이 장면은 동학군 내부의 인간적인 온기를 보여준다. 주먹과 총칼이 난무하던 시대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과가 가능했다는 사실, 그것이 동학의 정신이자 작가가 그리는 인간학의 핵심이다.

 

박성삼이 말한다.

그땐 자네들이 노비였지만, 우린 똑같이 한울님을 몸속에 지닌 농민군이네. 이렇게 한편이 되어 탐관오리와 싸우는 것도 다 하늘의 뜻이니 힘을 다하시게.”

 

이 짧은 대사에 이 소설의 주제가 응축되어 있다. 신분을 초월한 인간의 연대. 작가는 혁명을 제도보다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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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의 밤, 죽은 자를 위한 예식

 

예산읍성에 모인 농민군은 전투에서 희생된 전우들을 위해 진혼제를 올린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그들의 주문은 단지 망자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위한 맹세였다.

박인호 대접주는 진혼사에서 외친다.

 

이제 우리 농민군이 칼 노래를 불렀소. 때다, 이내 다시 오지 않는 때다. 우리가 싸우는 목적은 명확하오.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왜놈을 몰아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이 장면은 동도군의 영혼과도 같다. 김상현은 진혼제를 통해 죽음마저 신성한 의식으로 바꿔낸다. 죽은 자의 넋을 달래며 살아 있는 자들의 사기를 다지는 이 장면은, 혁명과 제의가 하나였던 동학의 세계관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진 게 아녀유들판에 남은 목소리

 

예산에서 승전의 함성이 울리고, 농민군은 홍주성으로 향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외치는 자와 주마가편(走馬加鞭)”을 주장하는 자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지만, 결국 그들은 결단한다. “한울님께 맡기고, 내일 아침 홍주로 나가자.”

 

이후 이야기는 홍주성 전투로 이어진다.

소년 이천돌이 붉은 명주천을 허리에 두르고 산성을 오른다. 농민군이 그를 향해 살아 돌아와라!” 외치며 돌진하는 장면은, 동학의 집단적 열망이 얼마나 순수했는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마침내 홍주성의 문이 열리고, 농민군의 깃발이 걸린다.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광제창생(濟蒼生)’ 온 세상을 구하라.

 

그 문구가 하늘 아래 휘날릴 때, 작가는 묻는다. “그날의 바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끝나지 않은 싸움 야무네의 독백

 

이 작품의 마지막은 절망이 아니라 약속이다.

홍주성 전투의 피바람이 지나간 후, 한 해가 흘렀다.

야무네는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인다.

 

아가, 싸움은 끝나지 않았단다.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네 할아버지처럼, 네 아버지처럼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

 

그리고 아례의 말이 잔잔히 이어진다.

 

우리가 진 게 아녀유. 저 들판 좀 보셔유. 누렇게 익은 벼에 낫질허는 게 누구겄슈? 우리 농삿꾼 말고 또 누가 허겄슈.”

 

바람이 불고, 억새가 고개를 숙인다. 작가는 그 장면을 이렇게 닫는다.

 

그들은 한동안 바위 위에 앉아 멀리까지 가을 들녘을 바라봤다.”

 

이 마지막 문장은 조용하지만 장엄하다. 지지 않았다는 믿음, 그것이 이 소설의 종결이자 새 출발이다.

 

동도군이 던지는 오늘의 질문

 

동도군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늘이라는 말의 윤리적 무게를 지금의 시대에 되묻는 작품이다.

1894년의 외침은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혁명은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기억으로 이어진다.”

 

김상현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지만 뜨겁다. 백성의 언어와 시인의 감성이 교차하고, 흙과 피, 바람과 눈물이 한 문장 안에서 호흡한다. 그의 서술은 기록보다 깊고, 시보다 생생하다.

 

김상현 작가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시대의 내면을 탐구해온 문인이다.

1990년대 방송칼럼과 에세이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베트남전 논픽션 《미완의 휴식》, 시집  《강물사색(2024), 단편소설집  《살루메가 있는 방(2024) 등을 통해 꾸준히 인간 존재의 존엄과 신앙적 성찰을 그려왔다.

기독교타임즈 문학상, 편운문학상, 진아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와 대전소설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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