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0일 한국 천주교회의 지성으로 불린 정의채 몬시뇰 신부(1925~2023)의 장례 미사가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이날 장례미사에서 “정의채 몬시뇰은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의 큰 어른이고 지성이었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착한 목자의 삶을 다 했다”고 추모했다.
기자는 생전 정 몬시뇰과 만나 1950년대 부산 초량성당과 서대신동 성당의 보좌 신부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 몬시뇰은 1953년 사제 서품과 더불어 부산 초량동 성당에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5년 서대신동 본당 보좌로 2년 가까이 사목했다. 이 두 본당의 주임 신부는 미국 메리놀회 권 요셉 신부였다.
권 요셉 신부의 본명은 요셉 코너스(Fr. Joseph Connors).
그가 처음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28년이었다. 마산교구에 2년간 머무른 뒤 곧바로 평양으로 가 1933년부터 41년까지 평양 관후리 성당의 신부로 봉직했다. 1981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부산 서대신동 보좌 시절의 정의채 사제와 권요셉 신부(왼쪽).
정 몬시뇰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6.25 공산 남침으로 전국의 성직자 3분의 1가량이 희생되었다. 신자 수가 급증하는 때로 사제 수는 엄청나게 부족하여 사제 서품과 동시에 주임 신부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저는 보좌 신부 생활을 자청, 근 4년간의 보좌 생활을 했다. 그 이유인즉, 주임 신부가 되어 본당 재정 걱정, 사제관 생활비 걱정, 유급 전교회장들과 직원들 걱정 등으로 정력을 소비하기보다는 선교에만 열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권 신부님이 새로 개척한 서대신동 본당 보좌로 가게 됐다.
이 초량동 성당에는 직장 없이 하루하루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수십만에 이르는 미군 생필품을 나르는 수송선들이 거의 부산항에 입항했는데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 신자가 많았다.
그들은 허름하고 열악한 판잣집에서 여러 식구와 같이 살아 장티푸스, 식중독 등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을 돌보는 일 또한 제 몫이었다.
서대신동 성당에서 첫 번째 일은 소속 신자들의 가정 방문이었다. 가정 방문으로 실태를 파악한 후 선교에 열중하고자 햇다. 저는 권 신부님께 매주 강론 때마다 끝에 간단히 선교는 교우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점을 표현하고자 제안했다. 그 전략은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를 내어 첫 해에는 약 700명가량의 영세자를 내더니 그 다음해에는 2000명의 예비자가 몰려와 교리 수업을 하는데 교사 절대 부족 현상을 맞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 교구 본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서대신동 본당에 레지오 마리애가 생겨났고 저는 본당 10여 개 쁘레시디움과 부산교구 꼬미시움의 지도신부를 맡고 있어 단원들을 교리 교사로 훈련하고 투입하였다. 1인당 그 소질과 환경에 따라 5~6명 내지 10명가량씩 맡겨 교리 교육과 기도, 주일 미사 참여를 하게 했다.
그런 방법은 본당의 다른 단체 활동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본당의 선교열을 극도로 고양시켰다. 그해 영세자는 약 1700명에 달했다.
한편, 대학교수, 의사, 법조인, 고위 군 인사, 중고교 교사 등 지성인 교리반을 운영하여 수많은 지성인 영세자를 배출했다."
1954년 부산 초량성당 보좌 신부 시절의 정의채 신부.
1957년, 정의채 몬시뇰은 더 높은 지성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장도(壯途)를 축하하기 위해 단층의 부산역사(驛舍)에 2000여 명의 신자가 운집해, 역장이 직접 나와 역내를 정비했다고 한다.
"떠나는 날 부산역에는 약 2500명의 신자 환송객이 부산역을 뒤덮어 역장이 직접 나와 역사와 기차 정류장 일체를 직접 정리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전 1년 반경에 500명으로 시작한 본당 신자는 영세자 급증으로 3300여 명을 헤아렸는데 그 숫자는 본당 신자가 다 나온 셈이었다.
서울행 기차가 떠나기 직전, 마지막 강복을 받으려 2500여 명 신도가 철도 노선 좌우로 꿇는 장관에 역직원 전원과 승객 전체가 몹시 놀라는 광경도 벌어졌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제직의 위대성 표현이었다."
정 몬시뇰이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61년,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라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교황청은 그를 가톨릭 교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 중 하나인 라테란대학 교수로 발령을 수차례 냈으나 정 몬시뇰은 고사했다. “폐허가 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