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총리 별세] 김종필 국무총리 시절 단독인터뷰

<월간조선>에 DJP 공동정권 秘話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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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편집자 주] 23일 김종필 전 총리가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월간조선>은 지난 1999년 김종필 현직 국무총리를 조갑제 당시 편집장이 만나 3시간에 걸쳐 단독인터뷰한 기사를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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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인터뷰 3시간 金鍾泌 총리의 공동정권 秘話 토로

"李會昌 총재와 내각제 改憲 주제로 비밀회담했었다. 金大中 대통령에겐 국회 發議를 요청했었다"

●"내각제로 대통령과 맞서면 헤어져야 하고, 그러면 정권도 나라도 어려워지므로 내가 결심한 것이다"
●"모 의원의 事前 발설로 金龍煥 부총재가 격분, 항의… 당초 계획이 헝클어지고 모양이 좋지 않게 되었다"
●"2인자든 10인자든 상관없다… 국가에 도움만 된다면"
●金 총리는 "이회창 총재가 한번 더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으나 오해를 살까 봐 만나지 않았다. 李 총재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집념이 강한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질문·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정리·許容範 月刊朝鮮 기자
 
 
李美子 이야기
  서울 종로구 삼청동 106번지 국무총리 公館(공관). 金鍾泌(김종필·74) 국무총리는 이곳에서 두 번째 살고 있다. 첫 번째는 1971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총리로 지낼 때였다. 그때의 공관은 지금과는 달랐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낡은 목조건물이었다.
 
  작년 12월 초 그는 다시 이 공관에 들어왔다. 현재의 공관은 1984년에 다시 지어진 2층 기와지붕이다.
 
  지난 8월 13일, 초가을 기운을 느끼게 하는 날이었다. 이날 국회는 한나라당이 제출한 金 총리 해임건의안 표결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내각제 연내개헌 違約(위약)'을 이유로 제출된 해임건의안은 밤 늦게 두 여당의 퇴장전략에 따라 의결정족수 미달로 처리되었다.
 
  金 총리와 우리 기자 일행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金 총리에게서 초조해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는 본래 내색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시락 점심식사를 함께하면서 '가요 50년 공연을 앞둔 가수 李美子(이미자)씨 얘기가 나오자 金 총리는 이런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李美子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게 10代(대) 초부터였어요. 5·16 직후에 우리가 演藝隊(연예대)라는 것을 조직했지요. 군사혁명이 나자 모두들 너무 긴장하는 것 같아, '긴장만 하지 말고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적절히 쉬면서 근대화를 향해 총력을 경주하자' 그런 뜻에서 연예인들을 총동원해 4개 중대를 만든 겁니다. 결단식을 마치고 여흥을 하는데 조그마하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덧니가 난 아가씨가 나와 노래를 부르는데 웬 노래를 그리 잘하는지, 기가 막히게 불러요. 그게 李美子예요. 그러고 나서 동백아가씨가 히트를 쳤지요. 한번은 여의도 공군 비행장에 위문을 갔어요. 李美子가 노래를 하는데 나더러 아코디언 반주를 하라고 해요. 잘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끝까지 했습니다." 
  
  그는 "이난영, 이화자, 이미자, 주현미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이어 내려오는 손꼽히는 가수들"이라고 칭했다. 그러고는 그 가수들 각각에 대해 評(평)을 했다. 대표적 노래는 무엇이었고, 그건 어떻다는 식이었다. 그는 패티김과 길옥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선 이야기와 헤어질 때의 뒷이야기도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月刊朝鮮(월간조선) 1999년 7월호에 金鍾泌 총리의 소년·청년 시절 이야기가 실렸다. 그의 일곱 형제와 金 총리의 성장 과정에 관한 글이었다. 소년 시절의 金 총리는 한마디로 천하의 개구쟁이였고, 학창 시절의 그는 多才多能(다재다능)한 우등생이었다. 그 얘기를 꺼냈더니 金 총리는 이런 에피소드들을 더 털어놓았다.
 
  "우리가 한창 개구쟁이 짓 할 때는 흥부놀부에 나오는 얘기 그대로였어요. 애들 보고 '똥 싸라' 하고는 미운놈은 밀어 주저앉혀 버리고… 평상시에 우리가 노는 데 괜히 간섭하는 어른이 집을 새로 짓거나 개축하면 영락없이 똥을 잔뜩 발라놓곤 했지요.
 
  그땐 버스라는 것이 대단했는데, 태워달라고 해서 안 태워 주는 버스는 그날 저녁에 타이어가 다 바람이 빠졌지. 밤잠 안 자고 있다가 새벽에 돌아다니며 바람을 빼버렸어요. 찢는 것은 아니고 바람만 뺐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버스가 가는 길에다 바위를 굴려놓고 차를 못 가게 하고서는 논두렁에 엎드려 보면서 재미있어 하곤 했어요.
 
  일본 애들 하고도 싸움을 많이 했지요. 걔들이 토란을 심어놔요. 그게 얼마만큼 자라면 낫을 갖고 가 전부 잘라놓곤 했지. 그럼 우리가 했다는 걸 아니까 교장이 눈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잡으러 돌아다니고, 우린 붙들리면 두들겨 맞고… 정말 못 말렸어…" 
  
  점심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이미 준비를 해왔을 것이니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하고 정색을 했다.
 
  당연히 첫 질문은 '내각제 연내 개헌 연기가 그간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져 왔는가'였다. 그 顚末(전말)에 대한 金 총리 자신의 설명을 우리는 처음 듣는다. 
  
  
  "고민스런 나날을 보냈지요" 
  
  
  "원래 8월까지는 內閣制(내각제) 문제 논의를 삼가자고 합의를 했었지요. 모두들 간헐적으로 내각책임제에 대해 가타부타 얘기를 하고, 내각제에 찬성하는 사람은 별로 얘기를 안 했지만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측에서는 말꼬리를 물어 문제 삼고 하다 보니 뭔가 왜곡되는 선전들을 하고 발표들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통령과 나, 국민회의 대행(趙世衡 전 대행), 자민련 총재(朴泰俊 총재) 이렇게 넷이 앉았을 때(지난 4월 9일 청와대 4자 회동을 말함-注) 8월까지는 논의를 삼가자고 합의를 보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8월에는 어떻게든 내각책임제 年內改憲(연내개헌) 문제에 대한 可否(가부)가 결정되어야만 했죠. 그래서 시간이 가면서 나도 대통령과 얘기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사달이 일어났다. 7월 12일 오전 광화문 정부제1종합청사 국무총리실로 자민련의 李모 의원이 찾아간 것이 발단이었다. 李모 의원은 이 자리에서 金 총리로부터 '내각제 연내 개헌 연기'를 시사하는 뉘앙스의 말을 들었으며, 자민련 당사로 돌아오자마자 이를 내각제의 戰士(전사) 격인 金龍煥(김용환·당시 수석부총무) 의원에게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소식에 놀란 金龍煥 의원은 바로 그날 저녁 姜昌熙(강창희·당시 원내총무) 의원과 함께 金 총리의 공관으로 찾아가 그 경위를 따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金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문제를 대통령과 상의하기 전에 당의 한두 사람에게 얘기를 했어요. 아무리 봐도 年內改憲을 이룩해 나가기는 어려운 상황하에 있다고 봐지는데, 최선은 연내에 개헌하는 것이지만 연내에 안 되면 차선책도 있지 않겠느냐, 이런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의원들도 덮어놓고 떠들 것이 아니라 이런 점도 한 번 좀 생각들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바삐 가서는 金龍煥 의원에게 '포기한 것 같다' 이런 소리를 했어요. 그러자 金龍煥 의원이 바로 이 자리(총리공관의 응접실-注)에 왔기에 내가 자초지종을 다 얘기해 주었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는 누가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동아일보에 '연내 내각제 추진 포기' 이렇게 보도가 되었죠. 그래서 黨內(당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경위야 어떻든 그렇게 해서 내각제 연내 추진이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론이 전부 '포기'로 몰고 가요. 사실대로 묻고, 생각하는 것을 사실대로 전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포기로 몰아가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고민스러운 나날들을 보냈지요." 
  
  
  金龍煥 의원에게 한 말
 
 
  金龍煥, 姜昌熙 두 의원이 황급히 金 총리의 공관을 찾아간 7월 12일 저녁 세 사람 사이에는 심각한 얘기가 오갔다. 金 총리가 직접 전하는 그날의 상황을 들어보자.
 
  "金龍煥 의원이 바로 이 자리에 와서 묻기에 이렇게 얘기했죠. 
  
  '8월에 들어 내가 본격적으로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얘기가 먼저 들어가서 속이 상하는 모양인데 얘기가 나왔으니 한번 얘기해 보자. 내각제 연내 개헌은 아무래도 어렵다. 어려운데 이 문제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면 결국엔 (국민회의와) 헤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헤어지는 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이야 강조하느라 내각책임제가 자민련의 존재 이유라고들 하지만, 그것이 금년에 성사가 어렵다고 해서 자민련이 부서지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 계속해서 우리는 내각제 구현을 위해 노력을 해 나가면 된다. 단 금년 내는 어려우니까 유보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뜻인데 그걸 좀 이해해 줘야겠다' 이렇게 얘기했지요." 
  
  金 총리는 "그러자 金 의원은 '그건 못 하겠다. 이렇게 되어서야 자민련은 고사하고 우리도 용인할 수 없다'며 상당히 강하게 항의를 했다"고 말했다.
 
  "그전부터 나는 이렇게 말해 왔어요. '금년 내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다 한나라당이 얼마만큼 협조하느냐, 그런 생각이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얼마만큼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 한나라당과 모든 얘기를 은밀히 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여건 성숙을 기하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얘기를 그동안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李會昌(이회창) 총재를 만나고 그곳 의원들을 개별적으로도 접촉하면서 얘기를 진행해 왔어요. 그러나 한나라당 측에서는 말만 그저 多數(다수) 있다고 그러지, 그걸 믿고 이 문제를 추진할 만한 세력규합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자꾸들 급하게 밀어붙이자고만 하니 내가 그랬어요. 
  
  '고르바초프가 세계사적 면으로 볼 때는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걸로 망했고 고르바초프 자신도 침몰했다. 그 이유가 뭐냐. 페레스트로이카(改革-注)와 글라스노스트(開放-注)가 동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라스노스트는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안 걸린다. 自轉(자전)해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페레스트로이카가 뒤따르지 못하니까 상호괴리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두 다리를 걸쳐 놓고 개혁을 하려 했던 고르바초프는 그 사이로 침몰하고 만 것이다.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年內 내각제 구현도 그런 식으로 되어선 안 되지 않겠느냐. 페레스트로이카로 말하자면 한나라당을 설득하는 것인데, 한나라당에서 협력할 수 있는 많은 의원을 다져야 하는데, 내가 보기엔 하나도 되어 있지 않다. 그럼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나는 차선의 策(책)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최선의 책을 택한다고 마구 밀어붙이면 국민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대통령과 나 사이에도 이만저만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공동정권은 깨진다. 우리도 약속을 안 지킨다고 갈라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못 지키는 것 아니냐.'" 
  
  
  『"동정권을 절대 깰 수 없다" 
  
  
  역시 계속되는 金龍煥 의원과의 대화 내용이다.
 
  "내가 金龍煥 의원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을 안 지켰다면 그것은 포기라거나 극단적인 탓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여건이 지킬 수 없는 상황이니까 조금 기다려 다시 기회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포기냐 말이다.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포기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거기 너무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치라는 것이 어디 一刀兩斷(일도양단) 식으로 깨끗하게 되느냐. 항상 이렇게 겹쳐나가면서, 여러 복합적인 요인을 안고 있는 것을 하나 둘씩,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最善(최선)이 안 되면 次善(차선)이라도 찾아 해결법을 찾아 나가는 것이 정치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이번에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이라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내각제 연내 개헌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통령과 합의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공동정권을 깨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은 내가 연내 개헌을 고집해 공동정권을 깬다면 또 나를 공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내각제를 빌미로 공동정권을 깼을 때는 全(전) 언론이 나라를 결딴내 놓았다고 해서 우리를 두들겨 팰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왜냐. 우리가 갈라서면 국민회의 혼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黨利黨略(당리당략)에 따라 나라의 정치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고, 무책임하다고 할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차선을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당신에게 먼저 얘기를 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전해져 버렸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똑똑히 얘기하지만 절대 (국민회의와) 갈라설 수는 없다. 공동으로 세운 이 정권을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빠뜨린다는 것을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도 공동정권의 한 축이라는 말이다. 이 정권을 黨利黨策(당리당책)에 의해 부수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어 놓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 길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그랬어요." 
  
  
  대통령과 워커힐 회동 내막
 
 
  ―그런 소동이 있고 난 뒤 총리께서는 金大中(김대중) 대통령과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만나셨죠. 무슨 얘기들이 오갔습니까. 
  
  "그것이 7월 18일 일요일인데, 대통령께서 거기서 만나 얘기좀 하자고 해서 갔어요. 내가 그랬어요. 연내 개헌 노력도 안 해보고 유보한다는 이도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대통령께서 약속한 대로 국회 發議(발의)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내각제를 실천할 의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선 보여주게 되고, 그런데 여러 여건이 미숙해서 이룰 수가 없었다고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민련에서 이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납득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랬죠.
 
  그랬더니 대통령은 '내가 그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뭘 좀 생각하는 사람 같으면 한나라당의 협력이 없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런데도 그걸 낸다는 것은 뭔가 요식이나 차리려 한다는 비난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 때문에도 여러 가지가 어려워진다. 또 그때 發議해서 안 되면 다음에 또 發議하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한 번 해서 안 된 문제를 또 꺼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불합리한 점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發議를 했을 때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을 때가 옳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가서 의지를 펴나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해요.
 
  그런 대통령의 말씀에 나도 동의를 했어요. '그러면 금년은 보류합시다. 그리고 내년 총선거가 끝난 다음에 여건이 더 성숙하기를 바라면서 그때 다시 추진하기로 합시다. 양당 8인 위원회를 만들어 거기서 차후 共助(공조)해 나가는 기본자세를 굳히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해 나가는 앞으로의 여러 자세를 재확인하고 내일에 대비해 갑시다' 이렇게 얘기가 된 거예요.
 
  그래서 兩黨(양당) 8인 위원회를 만들고, 연내 개헌 유보에 대해 당에서 추인들을 해주고 총선이 끝난 다음에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내각제를 연기하기로 한 이유가 그렇게 된 겁니다." 
  
  
  李會昌 총재와 비밀회담 내용
 
 
  ―말씀 중에 李會昌 총재와 내각제 문제를 논의했다고 했는데, 金 총리가 직접 만난 적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지난 봄인가였어요" 
  
  ―내각제 문제도 얘기했습니까.
 
  "했습니다. '나는 내각제에 찬동하는 어떠한 사람과도 손잡고 하겠다고 이미 얘기를 했는데, 사실 내각제가 되고 안 되고는 이 공동여당과 더불어 한나라당의 의지에 달려 있다, 어떻습니까, 한번 힘을 합쳐 할 생각이 없습니까' 그랬어요.
 
  그랬더니 명백한 대답은 않고, '하여튼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를 좀 더 봅시다' 그런 애매한 대답으로 끝났어요. 그런 다음 한번 더 만나자고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는데 내가 안 만났습니다." 
  
  ―총리께서 안 만났다는 말씀인가요.
 
  "사무총장(한나라당 辛卿植 전 사무총장-注)을 통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이 왔는데 안 만났어요. 본의와 다르게 여러 가지 다른 소리가 퍼질까 봐 조심스러워 안 만났습니다. 대신 金龍煥 수석부총재가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얘기를 듣고 했지요. 그러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金龍煥 부총재도 똑 부러지게 (내각제에 관한) 언질을 받거나 속얘기를 듣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나는 '이건 안 되는 거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죠." 
  
  ―辛卿植(신경식) 사무총장이 지난 4월에 느닷없이 내각제 검토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까. 
  
  "내가 李 총재를 만난 다음에 그런 얘기가 사무총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속으로는 생각이 있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지 크게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런 다음 한번 더 만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만나지 않았어요." 
  
  ―그때 다시 한 번 만났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만나고 수석부총재가 두세 번 더 만났는데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만나면 잘못하면 여러 가지 오해를 살 가능성이 있어 조심했지요." 
  
  ―李 총재와 만났을 때는 내각제 외에도 여러 가지 國政(국정)에 관한 얘기들도 했습니까.
 
  "내각제 외에 다른 얘기들은 안 했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어제 오늘 내일을 생각할 때, 이 나라가 21세기 의회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내각제가 가장 소망스러운 제도이기 때문에 이걸 실현시키는 데 한번 협력을 합시다, 그게 내 얘기의 골자였습니다." 
  
  ―1997년 大選 前 가을에도 내각제 문제로 李會昌 총재와 대화가 있었죠?
 
  "李 총재가 자민련 당사에 왔을 때 나와 집무실 뒷방에서 직접 얘기했습니다. 그때 자기는 내각책임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고 했죠. 그렇지만 그걸 위해 협력하겠다는 적극적 언사도 없었어요.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죠." 
  
  ―내각제를 실현시키려면 설득해야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李會昌 총재인데, 李 총재가 앞으로 내각제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러나 정치인이란 항상 어떤 가능성도 갖고 있으면서 그때그때 택하는 것인데, 그 가능성 여부는 내년 총선 결과에 상당히 달려 있다고 봅니다." 
  
  
  6월쯤 이미 內閣制 연기 결심
 
 
  ―金大中 대통령과 내각제 문제를 갖고 진지하게 얘기한 것은 7월 18일 워커힐 회동이 처음이었습니까. 
  
  "아니죠. 그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金 대통령이 내각책임제에 대해 기피한다든지, 고의로 안 하려고 한다든지 혹은 어떻게든 꾀를 부려 '내가 대통령으로 5년을 채워야 되겠다'든지 하는, 그런 것을 感得(감득)할 수 있는 어떤 언행도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경제가 결딴났는데 이걸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데 전력을 투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내각제보다는 그런 경제문제에 중점을 두고 더 얘기를 했지요." 
  
  ―그처럼 金 대통령이 내각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았다면 한나라당의 설득에 자민련보다는 국민회의가 더 적극적으로 나왔어야 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것은 제3자가 봐서 하는 얘기이고, 국민회의는 국민회의대로 지난 1년 동안 가졌던 입장이 있지요. 그게 이해 못할 정도도 아닙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볼 때 몇 사람의 강경한 요구를 갖고 이것이 관철될 수가 없다. 관철하려고 하면 그건 결국 싸움이고, 싸움하면 결국 헤어지게 된다. 헤어지게 되면 나라는 결딴난다. 국민회의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야당하고는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가 헤어져 나라가 어지럽게 되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 하나 연기 못하고서 소위 몽니를 부리고 있는 측에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냐. 공조를 해서 공동정권을 세웠으면 정권의 한 축인데, 그 축을 부숴버리는 측에 책임이 있는 게 아니냐. 나는 그것은 할 수 없다. 이제 겨우 1년 반 만에, 아직도 어려운 점은 많이 있지만 그래도 허리를 조금 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걸 다시 주저앉게 만드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내 어느 누가 뭐라고 나를 욕하든 나는 부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연기밖에 없지 않으냐'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하나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전부를 결딴낼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께서 '내일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당내 사람들이 물을 때도, '마지막에 가서는 국가 차원에서 결심할 것이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 말을 기자들도 들었을 겁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內心(내심)으로는 그런 결론(내각제 개헌 연기-注)에 언제 도달했습니까.
 
  "지난여름에 그런 정도까지 도달했습니다." 
  
  ―여름이면 6월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그 이전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왔지만, 6월 지나면서 이젠 조만간에 결정해야겠구나 생각했지요. 8월까지라고는 했지만 그 前에 확실한 결심을 하고서 대통령과 얘기를 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왔죠." 
  
  
  "합당은 곤란하다"고 못박았다
 
 
  지금까지 金 총리의 말을 요약하면, '안 되는 내각제를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했을 때는 공동정권이 무너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나라를 생각해서 내각제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그런 뜻을 절차를 밟아 당내 의원들에게도 설명하려 했는데, 7월 12일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미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결국 그 사건 이후 심각한 內紛(내분)에 빠진 자민련의 당내 문제는 金 총리의 의사전달 방법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봐야겠군요.
 
  "그런 것도 있었어요. 내가 데리고 있던 친구(앞서의 李모 의원을 말함-注)가 찾아와서 무심코 묻는데 '이봐,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을 택해야 하고, 나중에 후회를 남기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할 텐데, 그런 것을 잘 좀 생각해 봐. 우격다짐으로들 그러지 말고',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걸 당에 가서는 '포기한 것 같더라'고 한 겁니다." 
  
  ―그 사람은 金 총리께서 당 총재 시설 비서실장을 지낸 李東馥(이동복) 의원입니까?
 
  "나는 누구라고 얘기 안 해요. 金龍煥 의원은 너무 노출이 됐으니까 얘기하지만… 그렇게 된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金龍煥 의원이 나를 찾아왔기에 다 설명했지요. 그러나 자기를 무시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믿고 하다 보니까 야속했던 점이 많아졌는데…, 이해를 합니다." 
  
  ―총리의 말씀은 이 문제를 잘 풀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그런 차질이 있어서 계획이 헝클어졌다는 얘기군요. 
  
  "그래서 뒤죽박죽이 된 거죠. 내가 과정을 밟는 데 소홀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나도 반성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심정은 지금까지 설명한 그대롭니다. 그런 정도는 이해를 해주지 않겠나 하는 신뢰도 있었죠." 
  
  ―金大中 대통령과 워커힐 호텔에서 만난 자리에서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을 통합하는 新黨(신당) 얘기도 나왔다고 하는데 어떤 얘기가 오갔습니까.
 
  "대통령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는 개혁이 되지 않는다. 개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당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국민회의나 자민련의 共助 정도로는 지난 1년여 동안 해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新黨을 만들어 새로운 의지를 규합해 총선 후에 나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얘기였습니다.
 
  나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합당은 안 됩니다'고 했죠. 그걸 자꾸 원하는 사람, 그렇게 끌고 가려는 발언들이 심심찮게 나와 자꾸 신경을 건드렸는데, 그런 얘기는 안 했지만, 합당은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어요."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합당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했다는 말이죠. 
  
  "그랬어요. 더 얘기는 안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때 3黨이 통합을 했는데, 통합을 하면 작은 당은 없어지는 거다. 그게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합당은 곤란합니다' 그랬죠. 청와대에서도 다른 소리가 자꾸 신문에 나니까 다음 다음날 합당은 합의한 일이 없다고 말했잖습니까." 
  
  ―그런데 朴泰俊(박태준) 총재까지 마치 정계개편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얘기를 했잖습니까. 
  
  "朴泰俊 총재는 어떤 얘기를 구체적으로 했는지 나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주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의하면 그것도 한 방안이라고는 얘기한 것 같아요. 그 정도지, 자기는 딱 부러지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해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金大中 대통령과 한 얘기를 미리 朴泰俊 총재에게는 얘기를 안 했습니까.
 
  "얘기했죠. 그 다음 다음날엔가 얘기했어요. 그런데 (金 대통령과 워커힐에서 만난) 그날 저녁으로 국민회의에서는 合黨 운운하는 얘기가 퍼트려지더군요. 나는 대통령의 말씀을 예사로 들었거든요. 늘 하던 말씀이기도 했죠. 그 이전에도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그전에 우리 당 모임에서, '합당 운운하는 사람들이 이 중에 있는 모양인데, 그런 사람들은 黨을 떠나달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런 마음에 변동이 없습니다." 
  
  
  "2人者면 어떻고 10人者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7월 21일 내각제 유보 기자회견을 할 때, 어느 기자가 '내년 16대 총선에서도 자민련 간판으로 나오느냐'고 물었을 때 딱 부러지게 '아니다'고 말씀을 안 하셨잖습니까. 그것이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합당이 기정사실화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죠. 
  
  "글쎄 그런 걸 말꼬리를 잡아서 그러는데, 나는 내 출마 여부에 대해 확인하려는 질문으로 알고 '그건 그때 가서 봐야겠다' 그런 거죠. 내가 출마를 한다면 2∼3월에 (총리를 그만두어야 하는) 時限(시한)이 있지 않느냐. 그때 나는 자민련으로 돌아가야 될 거다 그랬거든요. 그 말의 확실 여부를 묻는 것으로 알고 그건 그때 가서 결심할 것이다고 한 거죠." 
  
  ─질문과 답변에 오해가 있었던 것이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어긋나는 게 다 그런 겁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총리께서나 金龍煥 의원이 일치단결해 내각제 공약은 변함이 없다고 워낙 강경하게 말해 왔고, 국민들도 약 50%는 내각제를 희망하는 쪽으로 여론이 나오기 때문에 어렵겠지만 한편으로는 改憲 가능성을 예상하기도 했는데 너무나 간단하게 약속을 변경하니까, 또 총리께서 굴복을 했구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맨날 날더러 2人者(인자)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언론에서 말하지만, 2人者면 어떻고 10人者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관계입니까. 나는 그런 데는 관계하지 않아요. 나라일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면 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겁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계하지 않아요." 
  
  ─1997년 大選 때 내각제가 합의되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이번의 유보는 형식 면에서도 너무나 간단하게 끝나버린 게 아니냐는 생각들을 갖는 것 같습니다. 
  
  "要式(요식)을 갖춰서 왜 그때 출발할 때처럼 변경하는 것도 하지 못했느냐는 뜻이 담겨져 있는 얘기들인데, 나로서는 오랜 고민 끝에 얘기를 한 겁니다. 작년 12월 18일 (大選 승리 1주년) 기념일에 어떻게 했습니까. 全權(전권)을 대통령과 총리에게 맡긴다고 兩黨에서 결의를 해서 맡겨줬습니다. 그랬으면 두 사람이 결심하는 것이 그렇게 요식을 갖추지 않더라도 받아줘야지요. 그렇기 때문에 내각제 연기를 양당에서도 追認(추인)해 주고, 8人 위원회도 구성해 첫째 회합에서 내년 총선 후에 내각제를 추진한다고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다 절차를 밟았어요." 
  
  
  내년 총선 후 內閣制 계속 추진
 
 
  ─그런데 改憲이 되려면 실질적으로는 여야가 합의해야 하고, 대통령이 동의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여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총리께서는 한나라당의 설득은 시도하셨으면서 국민들에 대한 설득은 안 하셨지요. 안 했을 뿐만 아니라 자민련에는 그런 행동을 자제시키기도 했습니다.
 
  "그게 참 아쉬운 부분이에요. 내가 국무총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여기에 앉아 있는데 돌아다니며 국민들에게 그걸 떠들어댈 도리가 없더라고요. 하다 못해 보궐선거를 하는데 내가 가서 몇 번 지원을 해주었으면 두 군데는 분명히 당선되었을 겁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안타깝게 보고만 있었는데, 총리 자리에 있으면서 내각책임제를 갖고 돌아다니며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죠. 내가 당에 간다면 거리낌없이 국민들과 대화를 할 겁니다만 여기서야 어떻게 하겠어요." 
  
  ─내년 16代 총선에서 또다시 내각제를 공약으로 내걸 것입니까.
 
  "물론이죠. 내각제를 총선 후에 계속해서 추진하기로 兩黨이 확인을 했잖습니까." 
  
  ─그 확인이라는 것이 내년 총선에서도 내각제 추진을 공약으로 내건다는 말씀입니까.
 
  "공약이고 뭐고, 내각책임제는 총선 후에 계속 추진한다고 양당에서 확인을 했어요. 그런데 언론은 이것을 무시해요. 다른 얘기지만, 우리 언론은 한나라당의 한 의원이 얘기하는 것은 크게 보도하면서 집권하고 있는 양당이 앞으로 할 큰 일을 확인했는 데도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럼 16代 총선 이후에는 어떻게 내각제를 추진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지난 대통령 선거 前 黨에 있을 때는 이 IMF 경제위기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국민들도 그땐 내각제에 대해 60%를 넘는 선호도가 시현되어 있었죠. 그래서 대통령이 중심이 돼서 양당이 밀어붙이면, 또 우리의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잘 설명하면 국민들도 상당히 호응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지구당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내각제 改憲을 금년에 다 끝내면 政界(정계)를 떠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기자회견을 할 때 내각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의원직은 계속 가져야겠다,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내각제를 추진하는 것이 장단점은 있겠지만, 대통령이 집권연장을 꾀한다는 시각도 상당히 있지 않겠습니까.
 
  "정치적으로 공격한다면 어떤 말을 못하겠습니까. 그건 상관없다고 봐요. 이제 대통령도 내심으로는 사실 내각책임제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순수하게들 받아줘야지요. 내년 총선 후에 어떤 양태로 이 문제를 추진할지를 지금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공격하는 사람이야 말이 없어서 공격못하겠어요? 그러나 眞意(진의)는 그렇지 않아요.
 
  우스운 것이, 내각책임제 改憲을 했다고 해서 (이어 치러질 총선에서) 우리가 多數黨(다수당)이 된다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내각책임제는 다수당이 권력을 차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제도만 갈아놓고 국민들이 우리를 다수당으로 만들어 주지 않고 한나라당이 다수당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권 연장하려고 그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것도 미안하지만 신문이 선동한 것" 
  
  
  ─死生決斷(사생결단)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개헌하고 또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거를 곧바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時限을 상당히 갖게 되겠죠. 또 改憲을 하게 되면 경과규정도 넣어야 할 것이고… (기득권이) 존중될 수 있는 방법이야 다 있는 것이지요." 
  
  ─내각제가 살아 있으려면 자민련이 16代 총선에서 최소한 지금 의석(55석)은 잃지 않아야 할 텐데, 그에 관해 어떤 전략을 갖고 있습니까.
 
  "선거를 앞두고 이 소리 저 소리 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더 많은 의석을 얻으려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런 정도로 알아주세요." 
  
  ─선거에 나가기 前 전략의 핵심은 당의 단결인데, 자민련의 당내 단결이 현 시점에서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내일 저녁(8월14일)에 의원들을 다 이곳으로 부릅니다. 오늘도 어떤 의원에게 그랬어요. 좀 강경한 사람인데, '자 보자. 이 소리, 저 소리, 걱정스러워서 하는 얘기들이겠지만, 그런 걱정하는 소리가 결국엔 자기 기반을 다 흔들어 놓는 줄 왜 모르느냐'고 말입니다. 어려울수록 단결하는 자세를 의연하게 보일 때 국민들은 의지하게 되고 믿고 맡기게 되는 겁니다." 
  
  ─金龍煥 의원과는 7월 12일 사건 뒤로는 아직 대화가 안 이뤄졌죠?
 
  "자꾸 부채질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문제는 자민련 의원들 중에서 대구 경북 지역 의원들을 어떻게 안심시키느냐 하는 것인데요.
 
  "다 괜찮아요. 中大(중대) 선거구제로 변경하면 여러 가지로 어렵다고 걱정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도 미안하지만 신문이 선동한 거예요. 그걸 했을 때는 자민련이 기존 기반에서 3분의 1을 건지기 어렵다고 누가 썼습니까. 그걸 보고 다들 불안해서 야단들이에요.
 
  내 얘기는, 선거구제는 국회에서 여야 간에 난상토론을 해서 가장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정하고, 우리로서는 내각책임제가 됐을 때를 대비한 선거구 획정도 해나가야 하니까, 미리부터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보다는 시간이 있으면 선거민들과 잘 접촉해서 굳은 의지들을 보여주고 믿게들 해줘야겠다,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中(중)선거구제로의 합의가 가능하다고 봅니까. 
  
  "아직 정식으로 논의도 안 했어요. 정치개혁위원회가 제대로 기능도 못하고 있는 상태예요. 지난번 임시국회에서 내가 야당의 질문에 대해 '선거구 문제야말로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與野 간에 충분히 논의해서 가장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해서 정해줘야 할 문제이다. 그럴 때 정부는 그에 필요한 행정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일방적으로 강행할 문제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나는 정부의 參謀長" 
  
  
  ─다음 총선 때의 국민회의 자민련 간 聯合公薦(연합공천) 문제로 대통령과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까. 
  
  "아직 그것까지는 얘기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얘기하기엔 너무 빨라요. 아무래도 때가 돼야 할 것 아닙니까." 
  
  ─자민련으로서는 내각제를 양보했으면 연합공천에서는 반드시 일정 부분을 얻어야 하는 것이겠죠.
 
  "양당 8人 위원회에서 모든 기초적인 것을 얘기할 것입니다. 거기서 올라오는 것을 채택할 겁니다." 
  
  內閣制 연기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그만 얘기하자는 金 총리에게 화제를 돌렸다.
 
  ─앞서 정치가 불안해지면 개혁이 안 된다고 했는데, 공동정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분으로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개혁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개혁이란 한마디로 이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나라를 21세기의 시대에 對備(대비)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미흡한 것을 고쳐놓고, 흐트러진 것을 바로 세워 놓고, 세계가 더불어 사는 21세기에 더불어 살 수 있는 토양들을 다져놓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개혁의 主眼(주안)이라고 봅니다. 대통령께서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경제문제에서 현 정부의 개혁은 재벌해체 쪽으로 가는 것 같고 그런 말이 이젠 공공연히 쓰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재벌해체가 아니라, 소위 그룹이라는 것이 개혁되어야 되겠다는 것이죠. 주력기업이 主(주)가 되어 그에 최선을 다하는 기업경영이 되어야겠다는 겁니다. 1백 수십 개씩의 기업을 거느리면서 수십조씩의 국민세금을 결딴내고 있으니 이것만은 합리적인 경영시스템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중공업하는 회사가 아이스크림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것이지, 다 해체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기업이란 어떻든 돈을 버는 게 목표이고, 돈을 버는 방법으로써 전문화를 하든 다각화를 하든 정당하게 돈만 벌면 되지, 기업더러 정부가 전문화해라, 다각화해라, 지시하고 간섭할 이유와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 돈 수십조를 빚지고서, 한 기업 살리느라 그 돈 투자하고, 다른 데서 번 돈 또 그것에 투자하고…, 이런 짓을 언제까지 계속하느냐 하는 거지요" 
  
  ─앞서 공동정권이라는 말을 되풀이하셨는데,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공동정권 안에서 총리께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일종의 정부의 코디네이터(coordinator:調整者)예요. 치프 오브 스태프(Chief of Staff:參謀長)와 같은 말이지요. 공동정권이라고 하지만 일단 국무총리로 취임하면 그건 치프 오브 스태프입니다." 
  
  ─경제문제는 빼고 말씀하는 거죠.
 
  "경제문제는 옆에서 대통령에게 자꾸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하는 게 그리 좋지 않습니다." 
  
  
  國家保安法의 본질은 손댈 수 없다
 
 
  ─이번 8·15 赦免(사면) 復權(복권) 문제에 대해 총리께서도 관여하셨습니까.
 
  "나는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보고는 상세히 받았지만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도 그렇고 지난번의 경우도 그렇지만, 金賢哲(김현철)씨의 赦免만이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간첩으로 實刑(실형)을 살던 사람들을 너무 쉽게 풀어주는데 보수 본류의 정당이라면 이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하셔야지 않습니까.
 
  "그건 여러 가지 입장이 있으니 두고 봅시다." 
  
  ─그리고 國家保安法(국가보안법) 폐지는 없다고 했는데 改正(개정)은 있는 겁니까. 
  
  "改正도 얘기는 하고 있지만 아직 손댄 것은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국무회의에서, 허가받고 북한에 간 것이나, 허가받지 않고 간 것이나 하여튼 가서 하고 있는 행위가 도저히 용서 못할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돌아오거든 엄격히 다루라고 지시했습니다." 
  
  ─國家保安法이 존재하는 근거는 우리 憲法(헌법)에서 북한을 反(반)국가 단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보지 말자, 反민주단체로 보자, 또는 사실상 국가로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국가보안법의 본질을 바꾸자는 주장을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그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심지어 국가보안법을 문제시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보안법 때문에 무슨 생활에 부자유스러운 게 있느냐'고 反問(반문)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99%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생활에 제약을 받거나 부자유스러운 일이 없을 겁니다. 國家保安法은 국가의 안전을 위해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정해 놓은 겁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국민에게는 그 법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현대그룹에서 금강산 관광비로 9억4200만 달러를 북한에 주게 되었는데, 그것을 원貨(원화)로 주는 게 낫지 않으냐, 그래야 북한이 그 돈으로 무기는 못 사고 남한에 있는 물건을 살 것이고, 그것으로 域內(역내) 무역도 활발해지지 않겠느냐는 견해가 있습니다. 동서독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금 당장 再考(재고)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실은 나도 걱정을 않은 것은 아닌데 찬성을 한 이유는, 어떤 경우도 다시 남북이 전쟁을 하는 일은 피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전쟁이 나면 우린 再生不能(재생불능)이 됩니다. 북쪽이 더 부서지겠지만 남한도 부서져요. 우리가 근 40여 년 걸려서, 그 별별 고비를 다 참고 넘겨가며 이룩해 놓은 이 모든 것이 다 부서져요. 그렇다면 저쪽을 極限(극한)사태하에 몰아넣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겁니다. 왜냐면 쥐도 급하면 고양이를 물고 늘어져요. 너 죽고 나 죽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어렵지만, 최소한도 그쪽이 극한사태에 함입되지 않을 정도로는 성의를 베풀자 그것입니다. 금강산 사업에서 우리가 준다는 것도 그것의 일환이에요. 그러다 상황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나아지면 그에 대한 변화도 있을 것이고, 좋지 않으면 고쳐야 할 것이고… 일단 약속들을 해서 하고 있으니까 어떤 결과가 오는지 인내를 갖고 해보자, 그런 심정이지요." 
  
  
  "흡수통일이라는 말로 北 자극해선 안 돼" 
  
  
  ─햇볕정책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7·4공동성명을 하면서 유지했던 정책도 결국은 전쟁을 막고, 전쟁을 막는 사이에 체제경쟁을 통해 우위에 선다, 그걸 통해서 통일로 간다는 것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전쟁을 막는다는 것이 북한이 우리와 비등한 국력을 갖고 있을 때는 합당한 對北(대북)정책인데 지금은 북한이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고, 3백만명이 지난 5년 동안 굶어 죽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며, 더구나 재래식 군사력에서는 우리와 이제 비교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런 평화공존, 분단고착 정책이 아니라 이 변화된 역사적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통일지향 쪽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흡수통일 쪽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1970년대, 80년대에나 맞는 정책을 쓰고 있다고 보는데요.
 
  "해석하기에 달려 있겠지만,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요. 다만 관계가 단절되었던 남북 간이 朴 대통령의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 그래도 뭔가 있으면 얘기도 하고 접촉을 계속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은 큰 변화라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흡수, 흡수 하는데, 저쪽에서 싫어하는 것을 자꾸 말해서 자극할 이유가 뭡니까. 내가 언론인들 보고도 그랬어요. 쓸데없이 저쪽의 신경을 쓰게 만드는 말을 자꾸 쓸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겁니다. 어차피 어느 날엔가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전제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국제적으로 우리의 對北정책이 나름대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안타까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참고서 걸어갑시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흡수통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北을 자극하니까 안 하는 것이 맞겠는데, 그렇다고 흡수통일 할 것이 뻔한데 흡수통일 안 하겠다는 것을 對北정책 3원칙에 집어 넣는 것은 더욱 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지난번 제가 前方(전방)에 위문을 갔을 때 將兵(장병)들에게 그랬어요. '여러분의 敵(적)은 분명히 저 앞에 있는 인민군들이다.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명심하고 조국에 충성을 바쳐주기 바란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그게 신문에 보도되자 무슨 이름의 단체가 항의를 해왔어요. 어떻게 인민군이 敵이냐고요. 그런 단체가 지금 우리나라에 우글우글해요. 그런 것을 왜 내가 모릅니까." 
  
  ─지금 국제사회에서 우리는 이상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지금 3백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20세기 평화시에 3백만명이 굶어 죽은 경우는 북한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은 그것을 주제로 청문회 한 번 한 적도 없으며, 그리고 大統領은 그 책임에 대해(金正日 정권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외국 難民(난민)을 구하러 다닙니다. 이런 나라가 있느냐는 겁니다.
 
  "나는 3백만명이 굶어 죽었는지 어쩐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북쪽은 해방 후에 배불러 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죽었는지, 배고파서 죽었는지, 아오지 탄광에서 죽음을 강요당했는지 누가 알아요? 그런 하나하나를 갖고 우리가 흥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어려움은 분명해요. 그러나 北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金日成(김일성)이가 죽고 얼마 후에, 그리고 3년 전부터 북쪽이 식량 문제로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야단들을 했습니까. 피난민 몇십만명이 갑자기 오면 어떡할 것이냐. 그걸 준비해라. 휴전선이 무슨 상관이냐. 별별 소리를 다했지만 그런 경우가 어디 있었습니까.
 
  물론 3백만명이나 죽었다면 문제 삼을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사방에서 얘기하는 것, 나는 하나도 제대로 맞춘 것이 없다고 봐요. 얼마나 죽었는지…" 
  
  ─康仁德(강인덕) 前 통일부 장관은 최소 100만명이라고 했고, 불교운동본부에서는 350만명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더 있어 보면 더 밝혀지겠죠. 가령 북한에 갔다 오면 뭘 좀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많습디다만 제대로 아는 것도 별로 없데요." 
  
  ─우리 국민 중 다수인 보수 세력에서는 金 총리께서 이른바 진보적인 金大中 정부의 對北정책을 견제해 주기를 바라는 이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요새 얘기를 들어보면, 심하게 말하는 이는 배신당했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허허허 웃으며)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과연 공산주의자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뭘 했는지 나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런 말을, 배신이니 하는 말을 함부로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난 솔직히 말해 지금 북쪽과 하는 일이 좀 지나친 면이 없지는 않지만, 탓할 것 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가야 해요. 이렇게 가면서 접촉도 하고, 쓰다듬어도 주고… 그렇다고 우리가 정신을 팔아먹었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것을 안 하고 있습니까. 괜찮아요. 그저 덮어놓고 몰아세우는 것만이 북쪽과 잘 대결하는 길은 아니라고 봐요. 인내를 갖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가 그 어느 날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나는 그렇게 봅니다." 
  
  
  도로표지판, 이름, 고유명사는 漢字 병기 해야
 
 
  ─漢字倂記(한자병기) 정책은 앞으로 확대 강화할 생각입니까.
 
  "지금 4백만~5백만명에 이르는 관광객 중 반 이상이 일본, 중국 등 漢字(한자)문화권 사람들입니다. 여기 와서 도로표지판으로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영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로표지판에 계속해서 英文(영문)만 써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또 姓名(성명), 固有名詞(고유명사)만은 漢字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글專用(전용)으로 가 우리 손자쯤 가면 자기가 무슨 이씨인지, 무슨 유씨인지도 모르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姓名은 조상과의 관계를 일관되게 유지해 가자는 하나의 證票(증표)입니다. 유씨만 해도 柳씨, 劉씨가 있고, 유라고 쓰는 사람도 있고 류라고 쓰는 사람도 있어요. 한글만 써서는 자기 姓도 몰라요. 조상들하고 단절시켜 놓고, 무슨 國粹主義者(국수주의자)도 아니고, 한글전용이 무슨 소리예요. 姓名, 固有名詞 이런 것은 반드시 漢字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뜻이 애매한 말은 괄호 속에 漢字를 倂記해서 뜻을 분명히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언론의 한글전용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보시겠습니다.
 
  "정말 너무들 쉽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름, 고유명사, 애매한 말은 괄호 속에라도 漢字를 써서 뜻을 분명히 해줄 여유조차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현명하느냐 하면, 청주비행장에 가보세요. 우리 할아버지 때 그곳에 비행장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거긴 風向(풍향)이 늘 일정한 곳인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곳은 飛上里(비상리)이고, 내리는 곳은 飛下里(비하리)예요. 조상들이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걸 한글로 써놓아 보세요.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漢學者(한학자)도 아니고 두드러지게 뭘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지만, 뭔가 우리 조상들의 靈氣(영기)를 그런 데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걸 다 단절시켜 놓고서는 될 일이 아니에요." 
  
  ─요즘 金九(김구) 선생 기념관을 만든다고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金九 선생 기념관만이 아니라 이제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도 만들기로 했으니 建國(건국)대통령인 李承晩(이승만) 대통령 기념관부터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그래요. 국회의사당 건물 한가운데 큰 홀(로턴다 홀-注)이 있어요. 丁一權(정일권) 국회의장 시절 국회의사당을 지으면서 그 큰 홀을 가운데 만들어 놓은 뜻은, 그곳에다 초대 국회의장에서부터 역대 의장들의 胸像(흉상)을 세워두려는 것이었어요. 초대 의장이 바로 李承晩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걸 하려고 하기만 하면 젊은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반대하고, 만들기만 하면 때려부수겠다고 해서 아직도 못 만들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 張勉(장면) 박사 기념행사를 하는 데 도와달라고 해서 예비비에서 2억원을 지출해 주었습니다. 金九 선생 기념관도 정부에서 나름대로 지원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李承晩 대통령은 얘기만 나오기만 하면 난리예요. 그걸 만들었다가는 다 때려부술 형편입니다. 그래도 朴 대통령 기념관은 이제 건립위원회도 발족하고 했으니 이걸 하면서 해나가야지요.
 
  李承晩 대통령은 建國의 할아버집니다. 다른 얘기 할 것도 없어요. 요새야 별별 얘기 다하지만, 그래도 李承晩 대통령이 대통령을 하셨기에 이 나라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걸 우리는 겪어온 사람 아닙니까. 사실 모모 한다는 사람들 중에 李承晩 대통령 묘소에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군요. 나는 뭣하면 그곳에 가 참배하곤 합니다." 
  
  ─청년 장교 시절에도 李承晩 대통령에 대해 그런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까.
 
  "그럼요.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建國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땐 金九씨는 우리가 좀 의심을 한 게 사실이에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순수하게, 왜 갈라져야 하느냐, 그 애를 써 光復(광복)이 되었는데 왜 남북이 갈라져야 하느냐, 그런 순수한 생각으로 평양까지 갔지만 가셔서 실망했어요.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죠. 그런 피로 얼룩진 建國史(건국사)를 요새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아 마음대로 떠드는지…, 도대체 내가 알 수가 없어요." 
  
  
  東江댐 백지화 결정된 바 없다
 
 
  ─이번에 홍수가 났을 때 서울이 잠기지 않은 것은 소양강댐과 충주댐이 홍수조절기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더 안심하려면 東江(동강)에 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金大中 대통령은 기존 태도를 바꾸어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그것이 정부의 확정된 방침입니까. 
  
  "나는 아직도 대통령께 그것을 들은 바가 없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조사단으로 하여금 더 철저한 조사를 시켰고, 환경단체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그렇게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이젠 그곳밖에 댐을 만들 곳이 더 없다는 것을 대통령께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인지, 제가 직접 들어본 일은 없어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총리께서 가장 정력적으로 추진한 것 중 하나가 국민연금 확대 실시인데, 일부 변호사 단체에서는 그것이 憲法정신에 위배된다고 異議(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즉 낸 사람이 낸 만큼 받아야 하는데, 많이 낸 사람이 덜 받고, 적게 낸 사람이 많이 받는 것은 자본주의 정신에 위배되고, 그것은 연금이 아니라 세금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의견은 그런지 몰라도, 연금제도는 꼭 필요합니다. 일본처럼 실시한 지가 오래된 곳도 연금이 매년 문제가 돼요. 정부가 매년 상당한 보조를 해주고 있어요. 연금은 정부재정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확대 연금제도를 겨우 발족시킨 단계예요. 그런데 조금만 어려우면 이 소리 저 소리가 나오고, 집어치우라고 하고, 그러면서도 老後保障(노후보장)하라고 하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건 좋은 일이니까 가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사회보장 측면에서 조금 나은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뜻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갖고 시비하는 모양인데, 앞으로 가면서 다듬어 합리적으로 만들어야지요. 지금 이걸 중단한다든지 변질시키면 앞으로 못해요. 일단 하면서 모자란 것은 고쳐가야지요." 
  
  ─마지막으로 우리 月刊朝鮮 독자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지요. 그동안 내각제 문제를 두고 서로 오해가 된 부분이 많았던 데 대해서 말이죠.
 
  "세상이라는 게 사실 모두들 같은 농도로 알고 인식할 수는 없는 문제지요. 같이 정치를 하면서도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있고 그렇지 못할 것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일반 국민 여러분이 아시고 싶은 것이 많겠지만 모든 것을 다 알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지난 40년 가까이 정말 나름대로는 요만큼이라도 이 나라에 기여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는 심정으로 노력을 해왔습니다. 나는 내 개인적 욕심을 얻어내려고 터무니 없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요만큼이라도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겠다 하면 나는 어느 위치에서도 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해외에 쫓겨나가서도 그냥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다 못해 돈 벌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찾아다니며 대통령께 건의드렸고, 그런 일을 여러 가지 했어요.
 
  그렇게 나는 늘 국가 차원에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생각을 내 생각만큼 국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지 못하고 해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이 정당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는데, 그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믿어주십시오. 정치라는 게, 국민이 안심하고 내일에 대한 자기의 꿈을 실현시키려 계획을 세워 별 지장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꿈을 이룩하는 노력을 할 수 있는 보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뒷받침을 해드리려고 있는 것인데, 그런 철학 밑에서 국민이 허용해 주는 한에서 봉사를 할 것입니다. 늘 짜증스러운 일도 많겠지만 좀 달래주시면서 내일을 기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설 같은 마지막 말이 끝나자 비서가 "다음 일정이 있어 일어서야 할 시간"이라고 보고했다. 金 총리는 "괜찮다"면서 냉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에게 "李會昌 총재와 만나보니 앞으로 대화할 상대라고 느꼈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대화야 되지요. 李 총재도 나름대로 입장은 다르지만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이고… 다만 李會昌씨가 근원적으로 나와 다른 것은 대통령 되고 싶은 집념이 강해요. 나는 그런 거 떠난 사람이고… 나는 그러니까 국민의 뜻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하는 것, 바로 내각책임제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李 총재는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것인데 그런 현격한 차이가 좁혀질 것 같지가 않아요." 
  
  
  "나하고 팔씨름 한번 해볼까요?" 
  
  
  ─내각제 개헌을 끝낸 뒤에 정계에서 은퇴하실 생각이었다고 하셨지요? 
  
  "난 그럴려고 그랬어요. 부여지구당도 후배에게 다 넘겨주었잖습니까." 
  
  ─그럼 내각제 개헌이 안 되면 언제까지나 政界(정계)에 남아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逆說(역설)은 성립하지 않지요. 내가 나이가 얼마인데 언제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허용되는 기간 내에 이룩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것이죠." 
  
  ─건강이 정상적인 집무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닙니까.
 
  "건강은 좋아요. 웬만한 젊은 사람에게도 진다고 생각지 않아요. 나하고 팔씨름 한번 해볼까요?" 
  
  ─金大中 대통령은 건강이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너무 스케줄이 무거워서 좀 덜하시라고 내가 권하고 있지요." 
  
  ─총리께서는 朴正熙 대통령과 金大中 대통령 두 분을 국무총리로서 모셨는데, 朴 대통령과 金 대통령의 관계와 관련해 많은 생각이 있으시겠습니다.
 
  "글쎄요. 두 분은 라이벌이었잖습니까. 그리고 朴 대통령 계실 때 金 대통령이 괴로움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이 朴 대통령의 本意(본의)는 아니었어요. 가령 일본서 일종의 납치사건이 났을 때도 朴 대통령은 모르는 일이고 그건 HR(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말함-注)이 했어요. 밖에선 마치 朴 대통령의 승인하에서 한 일처럼 말하지만 천만에요. 그건 내가 아는 일입니다." 
  
  그는 "朴 대통령은 냉정한 분 같지만 아주 인정이 많은 분"이라고 말했다.
 
  "朴 대통령이 계획적으로나 고의로, 혹은 라이벌에 대한 증오의식으로 金 대통령을 괴롭히려는 심사는 없었다고 봐요. 그건 분명합니다. 金 대통령이 그걸 아시는지 어쩐지는 잘 몰라요. 그러나 내가 알아요. 하나의 정치적인 배려라고 하더라도 朴 대통령 기념관도 지난 大選 前에 내가 이건 해주셔야겠다고 얘기해서 이제 발족이 된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金 대통령은 어느 정도 朴 대통령에 대한 속마음의 일부라도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한테는 '다 지내고 보면 그저 그런 기복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다 용서해야 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金賢哲씨 赦免 문제도 그런 점에서 '지내다 보면 용서할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金 총리는 朴正熙와 金大中 두 대통령을 똑같이 국무총리로 모시면서 느낀 소감을 이렇게 부연했다. 
  
  "朴 대통령은 제 처삼촌이지만 사실은 혁명의 지도자로 모셨습니다. 朴 대통령은 나를 어떤 점에서는 경계도 했어요. 그러나 난 경계할 인물이 아니었죠. 그 주변에서…, 나를 예컨대 나세르라고 했어요. 朴 대통령을 나기브로 하고 (나기브를 거세한) 나세르 짓을 하려 한다는 거예요. 그런 쓸데없는 모략을 주변에서 했어요. 朴 대통령 시절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잖습니까. 늘 성의껏 모시려 했고 어떤 어려움은 내가 대신 안고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런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었습니다.
 
  金 대통령은 일종의, 혁명은 아니지만, 공동정권의 파트너로 지금까지 아무런 트러블이 없었습니다. 같이 앉아 얘기를 해도 서로 의견이 상충해 입장이 거북해지거나 한 예는 없었습니다. 또 하나 내가 느끼는 것은 金 대통령은 합리적인 얘기에 대해서는 아주 이해가 빠르다는 겁니다. 그런 성격을 갖고 계세요." 
  
  
  "기분이 나쁜 거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과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르지요. 金泳三씨는 고집을 부리면 이유에 상관이 없어요." 
  
  ─옛 중앙청 철거 문제가 그런 예였죠.
 
  "글쎄 말이죠. 중앙청 철거는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는데, 다만 병행했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현관만이라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서 이것이 36년간 우리를 점령했던 사령부였다고 그 實物(실물)을 후손들에게 보여줬으면 했습니다. 그 현관 바로 뒤에 홀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옮겨두었으면 했어요. 그곳이 바로 우리나라 制憲國會(제헌국회)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런 뜻을 李御寧(이어령)씨를 통해 金泳三 대통령에게 거듭 부탁했는데도 막무가내라고 하더군요." 
  
  ─金大中 대통령과 두 분이 얘기하실 때는 서로 호칭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대통령께서는, 총리께서는… 이렇게 부르지요." 
  
  ─총리께는 각하라는 호칭이 더 익숙할 텐데요.
 
  "옛날에야 각하라는 말이 입에 달려 있었지만 이제는 대통령이라 부르죠." 
  
  ─두 분이 얘기를 하시면 편하십니까.
 
  "아주 편해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저 농담도 하고 그럽니다. 그리고 처음엔 우리가 만날 때 비서실장이 배석하곤 했지만, 도중에 비서실장은 오지 말라고 하고 둘이서만 만나요." 
  
  ─그렇게 단 두 분이서만 만난 것이 오래되셨습니까.
 
  "금년 봄부터 그랬지요." 
  
  ─이번 주에도 두 분이 만났지요?
 
  "화요일 날(8월 10일) 만났지요." 
  
  ─내각제 연기 발표를 하고 나서는 처음 만나신 거죠?
 
  "처음은 아니고 늘 만나지요. 둘이서 단독으로만 만난 것이 처음이죠. 내가 왜 그랬느냐 하면, 둘이서만 만나면 자꾸 없는 얘기가 돌아다녀요. 그래서 '이제 거기엔 안 들어가겠다' 그랬더니 (金 대통령이) 웃으면서 그러자고 그래요. 하두 쓸데없는 소리가 돌아다녀 그런 모양이다고. 그랬는데 일요일 날(8월 8일) 대통령께서 전화를 해오셨어요. '아이구, 이번 週부터는 좀 만납시다' 그래요. 그래 '그럽시다' 했지요." 
  
  ─두 분이 만나시면 私的(사적)인 얘기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들도 합니까.
 
  "많이 하지요." 
  
  ─이번 週에는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金賢哲씨 문제하고, 국회 문제를 주로 얘기했습니다. 金賢哲씨 문제 때문에 대통령이 퍽 고민을 합디다. 내가 그것을 알죠. (지난 大選에서) 당선되고서 (金大中 당선자가 金泳三 대통령을) 만났을 때 金泳三씨가 아들 문제를 아주 간곡히 부탁했어요." 
  
  ─金大中 대통령께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金 대통령께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게 짐이 된 겁니다. 사방에서 반대를 하는데도 '내가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하고 (우리 둘이 만났던) 그날도 고민을 해요. 그래서 지금의 赦免案(잔여형 집행 면제)이 나온 겁니다." 
  
  ─그것이 그 자리에서 합의된 겁니까.
 
  "대략 그 범위에서 얘기했지요." 
  
  ─그런 金大中 대통령으로서는, 金泳三 전 대통령이 저렇게 독재자라고 나오니 섭섭한 면이 있겠습니다. 
  
  "그래도 金泳三씨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을 안 하려고 그래요. 나도 그러려고 하고. 왜냐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야 뻔하지 않습니까. 前任(전임) 대통령이 바로 後任(후임) 대통령보고 독재자라고 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 그런 것은 터치를 안 했죠. 다만 이렇게는 말했습니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逝去(서거)했을 때 내가 弔問(조문)사절로 갔는데,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현직 대통령과 함께 다 왔습디다. 그리고 같이 다닙디다. 그러면서 같이들 인사하고 그러는 것이 보기도 좋던데…, 우리나라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그런 얘기를, 金泳三씨가 욕을 하고 할 때 했어요." 
  
  ─그랬더니 金 대통령은 金泳三 전 대통령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글쎄, 날 그렇게 미워하나?' 그 말씀 한마디밖에 안 하더군요." 
  
  
  動中靜의 인물
 
 
  이렇게 해서 세 시간 이어진 인터뷰가 끝났다. 바깥에서는 그의 진퇴 문제로 시끄러운데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을 건넌 뒤 그는 대략 다섯 번의 큰 위기를 넘겼다. 1963년 초 民政(민정)이양을 앞둔 최고회의의 내분으로 '自意半 他意半(자의 반 타의 반)'의 외유, 1964년 6·3 학생시위와 계엄령 선포 직후 군부의 압력에 의한 2차 외유, 공화당 의장 시절이던 1968년 朴 대통령 친위 세력의 압력에 저항하여 던진 공직 사퇴 카드,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밤 新軍部(신군부)에 의한 연행·조사.
 
  이런 위기를 넘기고 大政客(대정객)으로 살아남은 金 총리는 공화당, 신민주공화당, 自民聯 등 세 번의 창당(그는 청년장교 시절에는 酒黨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을 지휘한 기록도 갖고 있다. 그를 만나면 늘 역사와 마주한 느낌을 갖게 된다.
 
  내각제 연기 파동은 그에게는 여섯 번째의 위기인 셈인데, 金 총리 특유의 자신만만함과 익살로 해서 기자는 이날 그런 위기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亂世를 살면서도 人間性을 잃지 않은 사람'이란 평을 듣는 金鍾泌 총리는 이날도 소용돌이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장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動中靜(동중정)의 인물 金鍾泌 총리와 부인 朴榮玉(박영옥) 여사 두 사람만 산다는 총리공관의 정원 잔디밭에는 殺氣(살기)가 빠진 햇볕이 비스듬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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