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서희’와 ‘이순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 월간조선

"문재인 정부는 국익수호를 위하여 ‘서희’의 역할과 ‘이순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비서관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말이다.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도대체 서희와 이순신이 어떤 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외교 행태와 비슷하기라도 하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희는 993년 거란(요)의 소손녕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외교 담판을 통해 거란군을 물러가게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화로 강동 6주를 개척한 인물.

소손녕이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국경을 마주한 우리 대신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니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자 이렇게 받아쳤다.

“우리야말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래서 국호도 고려라고 했다. 오히려 너희가 차지한 만주도 우리 땅이다.”

이 당당한 논변과 명분 앞에 소손녕이 굴복해서 군사를 물렸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사실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것은 송나라와 대결하는 와중에 고려가 송나라와 손잡고 자신들의 배후를 치는 걸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후일 청나라가 조선을 친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서희는 이 점을 간파했다. 그는 소손녕을 설득했다.

“우리가 너희와 통교하지 못하고 있는 건, 우리 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이다. 여진문제만 해결되면, 우리가 왜 이웃과의 통교를 마다하겠나?”

소손녕은 동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희는 거란군이 철군한 후 강동 6주 개척에 나설 수 있었다.

서희는 거란쪽의 입장도 살려줬다. 송나라와의 단교, 그리고 요나라 연호 사용을 약속한 것이다. 요나라 연호 사용은 송나라 대신 요나라에게 사대(事大)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거란의 체면을 세워줌으로 철병할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려가 안융진전투 등에서 승리, 군사적 역량을 보여준 것이 서희의 성공적인 외교담판을 가능케 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려는 송나라와 단교하는 과정에서도 모양새를 갖췄다. 994년 원욱을 송나라로 보내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 사실을 알리면서도 그것이 거란의 군사적 압박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고려는 송나라와 손잡고 거란을 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송나라도 거란과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생각을 없을 때였다. 송나라는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는 “우리는 너희에게 할 만큼 했는데, 너희가 생각이 없다면, 우리도 할 수 없네”라면서 송나라와 자연스럽게 단교했다. 다만 이후에도 문화-상업 교류는 계속 이어나갔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함선과 무기를 확충하고, 병사들을 조련하고, 휘하 장수들과 전략전술을 논의하느라 노심초사하는 얘기가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이순신은 군사를 움직이는 일에는 지극히 신중했다. 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순신은 아군에게 유리한 조건이 아니면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친 것은 단 한 차례였고, 대개는 전라도 해역에서 적을 요격하는 형식의 전투를 벌였다. 연안항해에 의존하던 당시의 항해 기술상 부산까지의 항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리상으로도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무래도 유리해서였다. 이순신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철저한 준비, 그리고 무리한 싸움은 절대로 하지 않는 신중함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이게 불만이었다. 이순신이 ‘무적함대’를 거느리고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을 치라는 것이 조정의 오랜 요구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조선 수군의 피해가 너무 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1597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해임되어 백의종군하게 된 것도 그러한 ‘항명‘이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후임 원균은 도원수 권율이 곤장까지 때리며 압박하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함대를 이끌고 부산을 향해 출격했다가 칠천량에서 패전했다. 조선 수군은 120여척의 함선과 2만여명의 장졸을 잃고 궤멸됐다.

서희는 단순히 말 잘하는 명분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거란과의 ‘역사전쟁’에서 이긴 게 아니었다.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통찰력과 줄 건 주고받을 건 받아내는 유연성이 서희가 거란과의 담판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순신 역시 명분론으로, 혹은 운이 좋아서 이긴 게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와 신중함이 ‘이순신 신화’의 원동력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국익수호를 위하여 ‘서희’의 역할과 ‘이순신’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조국 민정수석에게 묻고 싶다.

조 수석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 사람 중에서 서희와 같은 냉정한 통찰력과 유연성을 겸비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이순신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태산처럼 신중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부터 조국 민정 수석, 여당 인사들 모두 국제정세는 못 읽고 경직된 도그마에 사로잡혀 한일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지 않나? 아무런 준비 없이 큰소리만 치다가 일본이 사소한 경제 카드 몇 장 꺼내 들자 '경제침략' 운운하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지 않나?
국익은 말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다. 머리와 실력으로 지켜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