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팩트>가 27일 보도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과 서훈 국정원장의 회동 장면. 사진=더팩트
예전 상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연예인의 열애설 등 베일에 싸인 사안을 명백한 증거 또는 사진을 통해 단독보도하기로 유명한 온라인매체 <디스패치>가 정치권을 파헤치면 좋겠다는 것이다. <디스패치>는 아니지만 온라인매체 <더팩트>가 27일 중요한 장면을 보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이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는 국가정보기관의 수장 서훈 국정원장과 지난 21일 저녁 약 4시간의 비공개 회동 후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진을 공개한 것이다.
이 사진은 정치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양 원장은 '정치인 문재인'의 행보를 계속 함께 하며 네팔행까지 동행했고 문 대통령 취임 후에는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변에서도 그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임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난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비선실세' 논란을 피하기 위해 백의종군이라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 양 원장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 싱크탱크의 수장으로 취임, 정치로 복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에 이어 서훈 국정원장까지 만났다. 정치권에서는 민주연구원장이 국회의장과 국정원장에 별도로 취임인사를 해야 할 정도의 당 최고위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당에 '실세 중의 실세'가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양 원장이 어떤 엄청난 역할을 할 것인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양 원장은 보도 후 입장문을 통해 "서로 아는 오랜 지인들의 모임으로 정치나 선거 얘기는 하지 않는 사이"이며 "내 식사비는 내가 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입장문에는 이번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본질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문장이 적지 않다.
입장문에서 양 원장은 “대한민국 국정원장이 비밀 얘기 할 장소가 없어 다 드러난 식당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는 가정 자체가, 정치를 전혀 모르는 매체의 허황된 프레임”이라며 “비밀 얘기를 나눠야 할 눈치 보이는 회동이라면 어떻게 둘이 함께 당당히 걸어 나와 한참을 더 얘기를 나누고 예의를 갖춰 헤어지는 모습을 다 노출했겠느냐”고 했다.
또 "(이 매체는) 여의도 당사에서부터 지하철, 식당까지 저를 미행하고 식당 근처에 차를 세워둔 채 블랙박스로 영상을 촬영한 것으로 안다. 식당 안의 상황을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추측과 억측으로 무책임한 주장을 확산시키고 있다. 미행과 촬영에 급급해, 마지막 헤어지는 장면 하나를 포착해 이를 바탕으로 근거 없는 폭로를 재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아무 생각 없이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매체야 그렇다 쳐도 숱한 매체들이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의혹 재생산에 부화뇌동 한다면 서글픈 일”이라고 했다.
모든 언론이 주목하는 회동의 의미는 축소한 채 <더팩트>를 '아무 생각없이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매체', '정치를 모르는 매체'로 폄하한 것이다. 양 원장의 언론관과 선민(選民)의식이 드러난 대목이다. 그러나 <더팩트>의 이번 보도를 신문과 방송 메이저 매체는 물론, 온라인 등 거의 모든 매체들이 받아 보도했다. 보도 내용에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모르는 매체나 폭로를 주로 하는 매체라면 여권 실세와 국정원장의 비공개 회동을 보도할 자격이 없다는 말일까. 그의 기준에서 어떤 자격을 가진 매체여야 이런 보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인지 양 원장에게 묻고 싶다.
글=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