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③] 이태희 시인의 두 번째 디카시집 《푸른 책에 밑줄 긋다》

사진과 시가 하나 되는 디카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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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 호수 위 오리들의 자맥질, 보도블록을 느릿느릿 건너는 달팽이, 은빛으로 누운 갈치의 한 생애. 이태희 시인의 두 번째 디카시집 푸른 책에 밑줄 긋다(도서출판 상상인)는 카메라 렌즈와 시어(詩語)를 나란히 놓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풍경에 천천히 밑줄을 긋는다.

 

디카시(di카詩)는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한 이미지에 짧은 시를 덧붙이는 장르다. 이 시집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흐름을 따라 구성됐으며, 연꽃과 모과, 붓꽃과 달팽이, 태양 흑점과 신호등, 그림자와 사마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사물들이 시인의 눈과 카메라를 통해 존재와 기억, 시간과 관계를 묻는 개념의 장(場)으로 확장된다.

 

■ 하늘은 만인의 책

시집의 표제작 '하늘은 책이다'는 이 시집 전체의 미학을 압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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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책에 흰 밑줄 긋는다

시나브로 지워진다

하늘은 만인의 책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다

— 이태희 '하늘은 책이다'

 

구름이 그어놓는 흰 선 하나에서 시인은 '만인의 책'이라는 개념을 끌어내고, 곧이어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독자의 손끝에 오래된 종이의 감촉을 불러낸다. 추상은 다시 구체의 피부 속으로 되돌아오고, 독자는 그 왕복운동 안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 사물의 생애를 읽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거창한 서사보다 사물의 조용한 생애에 닿는다. '갈치의 생애'는 그 대표적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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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를 누비고

푸른 파도를 가르며

은빛 찬란히 오르던

 

칼같이 살아온

한 생애가 누워 있다

— 이태희 '갈치의 생애'

 

시장 좌판에 놓인 갈치 한 마리. 그 광채에서 시인은 한 존재가 살아낸 세월의 밀도를 읽는다. '칼같이 살아온'이라는 표현은 생선의 날카로운 형태와 삶의 태도를 동시에 담아,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게 만든다.

달팽이 한 마리가 보도블록을 지나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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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으릿 느으릿 달팽이 간다

오월의 보도블록 위로 간다

 

급한 일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 일 없다는 몸짓으로

 

그러나 온몸으로 전력 질주한다

— 이태희 '달팽이의 속도'

 

마지막 행의 반전이 날카롭다. 느림과 전력 질주가 한 몸에 공존한다는 역설은, 느리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다.

 

■ 계절이 묻는 것들

사계절을 순환하는 구조 속에서 시인이 가장 자주 돌아오는 질문은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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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얼어야 봄이 올까

 

얼마나 녹아야 봄이 올까

 

얼마나 견뎌야 봄이 올까

— 이태희 '봄을 기다리며'

 

세 행의 물음표가 겹쳐지면서 계절의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된다. 언제쯤 충분히 버텼다고 할 수 있을까. 독자는 자신의 겨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봄이 다가오는 순간을 포착한 '봄 마중'은 그 기다림 끝의 도착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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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흰 눈 이마에 차고

봄 산 마른 솔잎 눈썹에 젖다

호수의 오리들 자맥질에 가슴이 뛰고

물가의 진달래 까치발로 섰다

 

그렇게 봄이 왔다

— 이태희 '봄 마중'

 

흰 눈, 마른 솔잎, 자맥질하는 오리, 까치발로 선 진달래. 네 개의 이미지가 쌓이다가 마지막 단 한 줄로 봄의 도착을 선언한다.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 오히려 봄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 존재의 경계에서

시인은 이따금 존재의 경계를 흔드는 질문을 던진다. '장자의 꿈'은 그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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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인가 나비인가

씨앗인가 열매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미망의 길 위에

신기루 같은 생

— 이태희 '장자의 꿈'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빌려 존재의 경계 자체를 흔들어놓는다. 사진 속 피사체가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 순간, 독자는 언어 이전의 감각 속에 놓이게 된다. 사진은 단풍나무의 씨앗이다. 이 씨앗이 낙하하면 아름다운 비행을 한다. 장자의 호접몽을 환기한 상황이면 이 씨앗들이 나비의 형용으로 보였다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꽃과 나비, 씨앗과 열매, 꿈과 생시의 구분 또는 접점에 대해 질문하면서 이 모든 언사를 '미망의 길 위에 신기루 같은 생'이라고 호명했다. 문학평론가 김종회는 "작은사진 한 장에서 많은 생각과 그 깊이를 체현한 시"라고 평했다.

 

'우듬지'(나뭇가지의 끝)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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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가벼워야 앉을 수 있을까

 

얼마나 비워야 흔들리지 않을까

— 이태희 '우듬지'

 

두 행만으로 한 계절 전체의 무게를 담아낸다. 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는 찰나를 포착한 사진과 이 두 줄이 만날 때, 독자는 자신이 무엇을 내려놓아야 덜 흔들릴지를 생각하게 된다.

 

■ 사람과 사랑 사이

자연과 사물에 머물던 시인의 시선은 때때로 사람과 사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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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펼치고 고개를 숙인 처녀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누구누구는 누구누구랑 뭐뭐했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래가 있다

사람과 노래 사이에 사랑이 있다

— 이태희 '엘레지'

 

그리고 사랑의 변화를 묻는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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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니?

 

두 질문 사이, 꽃치자는 말한다

꽃도 사랑도 생물이라네!

— 이태희 '변신'

 

꽃치자의 입을 빌린 대답이 깜찍하면서도 진하다. 변하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역설이, 사랑에 대한 불안을 오히려 따뜻하게 감싼다.

 

사진과 시가 함께 '겪어지는' 경험

 

한국디카시협회 회장인 문학평론가 김종회는 "사물을 감성적으로 포착하는 솜씨가 돋보이고, 거기에 몇 줄의 시행으로 의미의 깊이를 더하는 기량이 놀랍다"며, "계절의 감각과 활달한 상상력의 대위법을 보여준 그의 시 세계가 더욱 화명하고 유암하게 전개됐으면 한다"고 평했다.

 

이 시집에서 사진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다. 호수의 잔물결, 나무 꼭대기 까마귀, 나비 같은 모습의 단풍나무 씨앗, 낙엽을 밀고 돋아난 봄꽃, 눈 속 움튼 새싹에서 보듯 화면의 구도와 노출, 색감은 차분하면서도 또렷하다. 군더더기를 지워내고 꼭 필요한 사물 몇 가지만 남긴 화면은 시의 언어와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서로를 비춰준다. 독자는 사진을 '본' 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태희 시인은 1963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1988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인천대·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수영·정지용 시를 연구했으며, 시집 오래 익은 사랑(2001)을 냈다. 2023년 첫 디카시집 꽃 트럭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디카시집이다. 현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와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며, 한국디카시인협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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