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호수 위 오리들의 자맥질, 보도블록을 느릿느릿 건너는 달팽이, 은빛으로 누운 갈치의 한 생애. 이태희 시인의 두 번째 디카시집 《푸른 책에 밑줄 긋다》(도서출판 상상인)는 카메라 렌즈와 시어(詩語)를 나란히 놓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풍경에 천천히 밑줄을 긋는다.
디카시(di카詩)는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한 이미지에 짧은 시를 덧붙이는 장르다. 이
시집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흐름을 따라 구성됐으며, 연꽃과 모과, 붓꽃과 달팽이, 태양 흑점과 신호등, 그림자와 사마귀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사물들이
시인의 눈과 카메라를 통해 존재와 기억, 시간과 관계를 묻는 개념의 장(場)으로 확장된다.
■ 하늘은 만인의 책
시집의 표제작 '하늘은
책이다'는 이 시집 전체의 미학을 압축한다.
푸른 책에 흰 밑줄 긋는다
시나브로 지워진다
하늘은 만인의 책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다
— 이태희 '하늘은
책이다'
구름이 그어놓는 흰 선 하나에서 시인은 '만인의 책'이라는 개념을 끌어내고,
곧이어 '수수만년 읽어도 닳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독자의 손끝에 오래된 종이의 감촉을 불러낸다. 추상은 다시 구체의 피부 속으로 되돌아오고, 독자는 그 왕복운동 안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 사물의 생애를 읽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시선은 인간의 거창한 서사보다 사물의
조용한 생애에 닿는다. '갈치의 생애'는 그 대표적 예다.
깊은 바다를 누비고
푸른 파도를 가르며
은빛 찬란히 오르던
칼같이 살아온
한 생애가 누워 있다
— 이태희 '갈치의
생애'
시장 좌판에 놓인 갈치 한 마리. 그 광채에서 시인은 한 존재가 살아낸 세월의 밀도를 읽는다. '칼같이
살아온'이라는 표현은 생선의 날카로운 형태와 삶의 태도를 동시에 담아,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게 만든다.
달팽이 한 마리가 보도블록을 지나는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느으릿 느으릿 달팽이 간다
오월의 보도블록 위로 간다
급한 일 없다는 표정으로
서둘 일 없다는 몸짓으로
그러나 온몸으로 전력 질주한다
— 이태희 '달팽이의
속도'
마지막 행의 반전이 날카롭다. 느림과 전력 질주가 한 몸에 공존한다는 역설은, 느리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다.
■ 계절이 묻는 것들
사계절을 순환하는 구조 속에서 시인이 가장 자주 돌아오는
질문은 '기다림'이다.

얼마나 얼어야 봄이 올까
얼마나 녹아야 봄이 올까
얼마나 견뎌야 봄이 올까
— 이태희 '봄을
기다리며'
세 행의 물음표가 겹쳐지면서 계절의 이야기는 삶의 이야기가
된다. 언제쯤 충분히 버텼다고 할 수 있을까. 독자는 자신의
겨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봄이 다가오는 순간을 포착한 '봄 마중'은 그 기다림 끝의 도착을 그린다.

먼 산 흰 눈 이마에 차고
봄 산 마른 솔잎 눈썹에 젖다
호수의 오리들 자맥질에 가슴이 뛰고
물가의 진달래 까치발로 섰다
그렇게 봄이 왔다
— 이태희 '봄
마중'
흰 눈, 마른
솔잎, 자맥질하는 오리, 까치발로 선 진달래. 네 개의 이미지가 쌓이다가 마지막 단 한 줄로 봄의 도착을 선언한다. 군더더기
없는 구성이 오히려 봄의 감동을 증폭시킨다.
■ 존재의 경계에서
시인은 이따금 존재의 경계를 흔드는 질문을 던진다. '장자의 꿈'은 그 전형이다.
꽃인가 나비인가
씨앗인가 열매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미망의 길 위에
신기루 같은 생
— 이태희 '장자의
꿈'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빌려 존재의 경계 자체를 흔들어놓는다. 사진 속 피사체가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해지는 순간, 독자는 언어 이전의 감각 속에 놓이게 된다. 사진은 단풍나무의 씨앗이다. 이 씨앗이 낙하하면 아름다운 비행을 한다. 장자의 호접몽을 환기한 상황이면 이 씨앗들이 나비의 형용으로 보였다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꽃과 나비, 씨앗과 열매, 꿈과 생시의 구분 또는 접점에 대해 질문하면서 이 모든 언사를 '미망의 길 위에 신기루 같은 생'이라고 호명했다. 문학평론가 김종회는 "작은사진 한 장에서 많은 생각과 그 깊이를 체현한 시"라고 평했다.
'우듬지'(나뭇가지의 끝)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한다.
얼마나 가벼워야 앉을 수 있을까
얼마나 비워야 흔들리지 않을까
— 이태희 '우듬지'
두 행만으로 한 계절 전체의 무게를 담아낸다. 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는 찰나를 포착한 사진과 이 두 줄이 만날 때, 독자는
자신이 무엇을 내려놓아야 덜 흔들릴지를 생각하게 된다.
■ 사람과 사랑 사이
자연과 사물에 머물던 시인의 시선은 때때로 사람과 사랑으로
향한다.
치마를 펼치고 고개를 숙인 처녀
얼레리 꼴레리 얼레리 꼴레리
누구누구는 누구누구랑 뭐뭐했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노래가 있다
사람과 노래 사이에 사랑이 있다
— 이태희 '엘레지'
그리고 사랑의 변화를 묻는 '변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니?
두 질문 사이, 꽃치자는
말한다
꽃도 사랑도 생물이라네!
— 이태희 '변신'
꽃치자의 입을 빌린 대답이 깜찍하면서도 진하다. 변하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역설이, 사랑에 대한 불안을
오히려 따뜻하게 감싼다.
사진과 시가 함께
'겪어지는' 경험
한국디카시협회 회장인 문학평론가 김종회는
"사물을 감성적으로 포착하는 솜씨가 돋보이고, 거기에 몇 줄의 시행으로 의미의
깊이를 더하는 기량이 놀랍다"며, "계절의
감각과 활달한 상상력의 대위법을 보여준 그의 시 세계가 더욱 화명하고 유암하게 전개됐으면 한다"고
평했다.
이 시집에서 사진은 단순한 삽화가 아니다. 호수의 잔물결, 나무 꼭대기 까마귀, 나비 같은 모습의 단풍나무 씨앗, 낙엽을 밀고 돋아난 봄꽃, 눈 속 움튼 새싹에서 보듯 화면의 구도와
노출, 색감은 차분하면서도 또렷하다. 군더더기를 지워내고
꼭 필요한 사물 몇 가지만 남긴 화면은 시의 언어와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서로를 비춰준다. 독자는 사진을 '본' 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태희 시인은 1963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1988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인천대·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수영·정지용 시를 연구했으며, 시집 《오래 익은 사랑》(2001)을 냈다. 2023년 첫 디카시집 《꽃 트럭》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디카시집이다. 현재 인천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로 글쓰기와 스토리텔링을 가르치며, 한국디카시인협회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