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월급 얼마나 될 것 같나” 정홍원 총리 말에 장영자의 대답은? : 월간조선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오는 16일 회고록 《운명과 경주를 한 정홍원 스토리》를 도서출판 ‘홍성사’에서 펴낸다. 정 전 총리는 이 책에서 ▲법조인의 꿈을 안고 가난을 극복해왔던 젊은 시절 ▲각종 범죄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 시절 ▲새누리당 공천위원장과 제42대 국무총리로 일했던 시절 등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다. 국정(國政) 책임자로서 통감(痛感)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에 대한 소회,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월간조선》은 2018년 11월호에 실린 정 전 총리와의 인터뷰를 계기로 이 책을 ‘단독 입수’할 수 있었다.

“돈은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의 회고록에는 정치 비사(祕史)만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검사 시절 각종 비리 사건을 추적·수사하면서 경험한, 여러 인간 군상(群像)에 대한 이야기가 돋보였다. 일생을 법조인으로 살아온 정 전 총리의 인생관·세상관이 드러나 있었다.

정 전 총리는 전두환 정권 때 ‘어음 사기’로 세간을 뒤흔들었던 ‘이철희-장영자’ 사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그는 공판부 검사였다가 대검 중수부로 차출돼 이 사건을 수사했다.

〈사건을 수사하며 내가 만난 장영자라는 여인은 마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세상 물정을 전혀 몰랐다. 이런저런 심문을 하는 중에 그녀의 현실과 괴리된 사고에 하도 기가 막혀 내가 그녀에게 물어봤다.

“도대체 검사 월급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당시 평검사 월급은 대략 50여만 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검사 월급이면… 한 1000만 원은 되지 않겠어요?”

이런 식이었다. 그녀에게는 도무지 경제관념이란 게 없는 듯했다. 뭐든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금액에 최소한 ‘0’이 하나는 더 붙었다. 누가 자기에게 인사를 하러 오면 거마비 조로 건네는 돈이 100만 원이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내 두 달치 월급 정도를 거마비로 주었다는 셈이다.〉

이철희 장영자 부부가 거액어음 사기 사건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후인 1982년 7월 7일 법정으로 가고 있다. 사진=조선DB

7000억 원대 어음 챙긴 장영자

장영자는 전직 국회의원과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의 권세를 배경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외모와 언변을 무기로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과시한 다음,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을 노렸다. ‘좋은 조건에 자금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할인해 내놓았다.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1981년 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7111억 원어치의 어음을 받아 자금 6404억 원을 조성했다.

정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워낙 큰 사건이라 검사 10여 명 이상이 이 사건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호락호락 대해주지 않았다. 워낙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해 제대로 된 답변 하나를 받아내기가 어려웠다”며 “나는 어떻게 하면 그녀로부터 성실한 답변을 받아낼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고 했다. 그는 궁리 끝에 다음과 같은 묘수(妙手)를 냈다.

〈마침 그녀와 나는 동갑이었다. 나는 박카스 몇 병을 사가지고 조사실로 들어갔다.

“당신이랑 나랑 동갑이니까 우리 힘들게 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다 이야기합시다.”

소탈하게 접근한 방식이 통했는지 그녀는 속내를 많이 털어놓았다.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가끔은 내게 그녀가 먼저 박카스를 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략)

(장영자는)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4년 다시 100억 원대의 사기를 벌인 혐의로 구속되었다. 두 번째로 검찰에 불려 왔을 당시 나는 부장검사로 그녀 사건을 지휘했다. 이때도 주임검사가 조사를 다 끝내고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교도소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가 교도소에 더는 못 가겠다며 바닥에 드러누운 것이다. 여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으니 주임검사가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1998년 3월 6일 당시 정홍원 서울지검 3차장 검사가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의정부지청 검사 비리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나는 1차 수사 때 얻은 기지를 활용했다. 본래 그녀는 자존심이 센 데다 조금은 허황된 면이 있었다. 그걸 이용한 것이다. 주임검사를 시켜 이렇게 그녀를 타이르게 했다.

“장영자씨, 여기서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밖에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하고 신문사 사진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어요. 이러다가 교도관들에게 붙잡혀 실려 나가면 무슨 망신입니까? 텔레비전하고 신문에 추한 모습이 고스란히 보도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좋습니까? 당당하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걸어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빨리 일어나서 단정하게 나가세요.”

그러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고,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복도로 걸어 나갔다고 했다.〉

“돈이 무엇이기에...”

장영자는 그 이후에도 2001년 5월 220억 원대의 구권화폐 사기 행각으로 세 번째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된다.

정 전 총리는 장영자 사건에 대해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그러진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며 “돈이 무엇이기에 남보다 많이 배우고 누리며 살아온 멀쩡한 사람들이 탐욕의 늪에 빠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돈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결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되뇌게 만든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물질 만능주의’로 병들어가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경종(警鐘)을 울리는 말이다.

정리=신승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