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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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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작사자 兪湖의 노래 인생 『울분과 술기운으로 단숨에 지은 노래』 ● 서울 수복 되던 날 明洞에서 朴是春씨 만나… 단숨에 「전우야 잘자라」 작사ㆍ작곡 ● 작곡가 朴是春씨의 의뢰로 히트곡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63곡 作詞 ● TV드라마「유호극장」5년간 250회 방송… 프로그램 제목에 처음으로 작가 이름 붙여 兪 湖 1921년 황해도 해주 출생. 1939년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 졸업. 1942년 東京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 수료. 1943년 동양극장 미술부ㆍ문예부 입사.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근무. 1949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1954년 경향신문 문화부 차장ㆍ부장. 1962년 방송작가로 복귀. 1980년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1985년 한국방송작가 교육원장. 1968년 방송문화상, 1987년 한국방송 60주년 문화포상, 1993년 서울시문화상, 2002년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 작사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삼다도 소식」, 「이별의 부산정거장」, 「고향만리」,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전우야 잘자라」 「진짜 사나이」(군가) 등 63곡.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반세기 만에 돌아온 「전우야 잘자라」 지난 3월24일,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兪湖(유호·본명 兪海濬·83) 선생은 반세기 전의 감격이 느껴지는 듯 조용히 가사를 읊조리고 있었다. 3월1일, 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서울시청 광장)에 참석한 참전 용사들이 그의 노래 「전우야 잘자라」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에게 『「전우야 잘자라」를 다시 부르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콧날이 시큰했다』고 했다. 1950년 10월은 국군장병과 민족 전체를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가 한강을 넘지 못하고 敵(적)치하에서 숨어서 살았던 그는 작곡가 朴是春의 筆洞(필동) 집에서 서울 수복의 감격과 환희를 담아 「전우야 잘자라」를 지었다. <1절-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자라. 2절-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3절-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느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4절-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골프도 20여 년 전 그만두고 거의 운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兪湖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껍데기만 건강하다』면서 혈압이 조금 높아 조심하고 있다고 했다. 兪湖 선생은 현재 한국방송작가교육원장을 12년째 맡아 오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드라마 작가, 작사가,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친 그는 本業(본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모두 다 外道(외도)』라고 눙쳤다. 兪湖는 「맑은 호수」 兪湖 선생은 1921년 11월15일 황해도 해주의 廣石川(광석천) 근처에서 아버지 兪鎭明(유진명)과 어머니 白川 趙氏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은 黃州(황주)에서 태어나 黃濬(황준), 차남은 延安서 태어나 延濬(연준), 그는 海州서 태어나 海濬(해준)이라고 불렸다. 큰누이가 5남매 중 첫째이고, 둘째 누이는 兪湖씨 바로 위다. 고려大 총장을 지낸 초대 법제처장 兪鎭午(유진오) 박사와는 가까운 친척이다. 아버지는 친척이기도 한 구한말 개화파의 한 사람인 兪吉濬(유길준)의 영향으로 일본 明治大學(명치대학)에서 1년을 수학한 뒤 귀국했다. 황해도 黃州 군수를 시작으로 여러 곳의 군수를 지낸 끝에 당시 副知事(부지사)격인 參與官(참여관)에 올랐다. 어느 해인가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도 상부에서는 쌀 供出(공출)을 前年 대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를 거부한 그의 부친은 공직에서 사직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부친은 桂洞(계동)에다가 50칸이 넘는 집을 짓고 定着(정착)했다. 桂洞 꼭대기에 양조장을 개업하고 金鑛(금광)에도 손을 대서 생활은 윤택했다. 兪湖는 서울에서 제2공립고등보통학교(現 경복高)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제국미술학교 도안과 2년을 수료했다. 그 후 귀국한 兪湖 선생은 1943년부터 1년여 동안 東洋劇場의 美術部와 文藝部에서 일했다. 연극 상설 극장이라 1년 내내 공연을 했다. 그것들을 보면서 그는 극본 두 작품을 써서 靑春座(청춘좌)에서 상연했다. 그때 처음으로 「兪湖」라는 필명을 썼다. 兪(유)자는 맑을 兪라고도 해서 「맑은 호수」를 연상해서 지은 것이다. 방송소설을 쓰면서 그는 방송작가로 데뷔했다. 그리고 朗讀小說(낭독소설) 두 편을 京城放送局(후에 서울중앙방송국, KBS의 전신)에서 방송했다. 그것이 인연이 돼 1945년 광복이 되면서 10월에 編成課에 들어가서 라디오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광복 후 처음으로 방송된 연속 낭독 소설 「기다리는 마음」을 집필함으로써 본격적인 방송작가의 길을 걸었다. 이 땅에 처음으로 연속 방송극 시대를 연 것이다. 당시 김영수, 김희창, 최요안, 이익, 김성민, 이서구 선생 등과 본격적인 연속 방송극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61년 TBC-TV가 開局하면서 「初雪(초설)」로 본격적인 TV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1965년 TBC의 일요드라마 「일요극장」은 방송사의 연속극 경쟁이 치열할 때, 선생이 집필한 「맞벌이 부부」, 「짚세기 신고 왔네」 등의 작품이 잇달아 인기를 얻자 아예 작가의 이름을 딴 「兪湖극장」으로 타이틀을 바꿔 2년간 계속 방영을 했다. 일요극장부터 계산하면 5년간 250회의 방송횟수를 기록한 셈이다. 兪湖 선생의 작품세계는 도시 서민들의 哀歡(애환)을 코믹 터치로 그리는 것이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시골 영감, 신식 할머니, 서울에 돈 벌러 온 시골 처녀, 호스티스 등 모자란 듯한 밑바닥 인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그의 작품 밑바탕에 진한 휴머니즘과 페이소스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기 극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이름이 드높았다. 자신의 드라마 주제곡을 비롯, 많은 히트곡의 歌詞(가사)를 썼는데,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맨발의 청춘」, 「님은 먼 곳에」 등이 그것이다. 그는 1970년代 이후 두 民放(민방)의 주말연속극과 주간극을 한꺼번에 맡아 그야말로 안방극장에 1960년代에 이어 「유호시대」를 再現했다. 이같은 공로로 1968년 처음으로 마련된 방송문화상 「문예부분」 첫 수상자가 됐다. 그 후 그는 계속 집필 활동을 해 오다 1980년부터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직을 5년간 역임했다. 『遺作 방송드라마 남기고 싶다』 ―방송드라마는 언제 그만두신 겁니까. 『1991년 2부작 추석특집 드라마 「너두 늙어봐라」입니다. 사실, 그전에 1990년 KBS-1TV 신년특집 드라마 「구리반지」를 마지막으로 「편안하고 유유자적한 일상을 즐기고 싶다」며 絶筆(절필)을 선언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어떤 것이 있나요? 『일일연속극 「딸」인데, 1960年代에 300회가 넘게 放映(방영)됐어요. 당시로선 최장 드라마였지요. 이후 金秀賢(김수현)이란 여류작가가 「신부일기」로 400회를 훌쩍 넘겼어요. 요즘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6개월쯤 방영하더군요. 너무 길면 긴장미가 떨어져요』 ―요즘 드라마를 예전과 비교하신다면? 『드라마에서 作家가 보이질 않아요. A라는 드라마와 B라는 드라마가 차별이 안돼요. 굳이 작가 정신까지는 언급 안 하더라도 작가의 색깔이 나와야 하는 건데… 不倫(불륜)을 다루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생활주변에서 훈훈한 인간미가 드러나는 소재들을 발굴했었는데, 요즘 작가들은 튀어 보려는 생각인지 소재가 꼭 不倫이야. 텔레비전은 온 가족이 본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좋은 작품 하나 남기고 싶은 욕심은 없으세요? 『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 작품을 써 보자고 모 연출가와 약속한 지도 벌써 7년이 넘어요. 제목도 「同行」(동행)으로 정해 놓고, 60분짜리 2회로 하기로 했지요. 그 연출가가 「어떻게 됐냐」고 재촉하면 「名作은 그렇게 빨리 안 나온다」고 하지만 마음대로 안 돼요. 추석 전에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여섯 살짜리(너무 어리면 演技가 어려우니까) 손주를 데리고 단둘이 先塋(선영)을 찾아가는 얘기지요. 선영 가는 길에 짜증 내는 손주를 달래서 省墓(성묘)를 하고 온다는 이야기인데 잘 다듬어지질 않아요. 내 욕심이지』 ―광복 후 방송작가의 系譜(계보)는 어떻게 됩니까? 『1세대로는 兪湖, 韓雲史, 趙南史 등이 있습니다. 趙南史씨는 「청실홍실」이란 일일연속극 하나 남기고 죽었어요. 2세대는 윤혁민, 이희우, 박정란, 김수현, 김정수, 이금림씨 등이 있는데 여자들이 너무 기세를 올려선지 남자들이 맥을 못 췄어요. 지금도 여자들 勢(세)가 강해요. 김운경, 이황경 등 남자들이 버티고 있습니다만』 ―1949년 경향신문사로는 어떻게 옮기신 겁니까? 『1945년 광복되던 해에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에 들어갔는데, 경향신문 문화부장 겸 부국장인 金光洲(김광주) 선생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분은 중국 上海 남양醫大를 중퇴하고 上海 임시정부 金九(김구) 선생을 밑에서 돕던 소설가였습니다. 그는 이미 1933년 新東亞에 「밤이 깊어갈 때」로 문단에 데뷔한 분이었어요. 그분이 같이 일하자며 날 끌기에 경향신문 문화부 평기자로 들어갔어요』 「전우야 잘자라」 작곡 秘話 兪湖는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졌지만 피란을 가지 못하고 敵治下를 청파동 집에서 겪었다. 해방둥이 아들과 그 밑의 갓난아이 때문이었다. 6월27일 한강다리가 끊어지던 날, 그날 낮 서울역까지 들어온 人民軍들을 목격했다. 오후 서너 시쯤이었을까. 미군 전투기가 서울역 상공을 저공 비행하며 날았다. 기총소사가 불을 뿜었다. 서울역을 목표로 한 美軍機의 공격은 서울역을 비켜나 청파동 일대, 兪湖씨의 셋방에 떨어졌다. 『마당에 폭탄 두 발이 떨어지고 지붕이 홀랑 날라갔어요. 안채에 살던 사람의 부인은 卽死(즉사)했어요. 동사무소에 부역하러 갔다가 다행히 화를 면했어요. 놀라서 집에 오니 아내가 허벅지를 다쳤어요. 포탄에 맞은 게 아니라 폭풍에 날리는 나무에 찔려서 상처가 심했어요. 거리가 뿌연 연기로 자욱한데 막걸리집 주인은 거리에서 춤을 추었어요. 폭격에 놀라 실성을 했더군』 숙명여대로 가는 고갯길에는 그의 형 兪黃濬(유황준·작고)의 병원이 있었다. 무작정 고개를 올라가다 형제는 마주쳤다. 恐慌(공황) 상태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과 의논해서 나는 해방둥이 아들과 갓난아이를 데리고 경기도 廣州(現 하남시)에 있는 기계 兪씨 集姓村(집성촌)으로 가기로 했어요. 아내는 다쳐서 걷지를 못해, 내가 갓난아이를 업고 하나는 걸리고 해서 서울을 벗어나기 위해 결사적으로 움직였지요』 9월28일 兪湖씨는 서울 수복이 되자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랜 만에 시내를 거닐며 자유로운 공기를 실컷 들이켰다. 『선발대로 청파동에 들어온 해병대가 철로길을 「삭삭」 스쳐 지나갈 때의 기분이 최고였어요. 그날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에 나갔더니 문화부 평기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선지 당분간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榜(방)을 붙여 놓았어. 明洞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생각하고 길을 건넜어요. 그때는 지하도가 없었지. 길을 건너다가 밀짚 벙거지를 쓴 작곡가 朴是春(박시춘)씨를 만났어요. 시골에 피란 갔다가 돌아온 朴씨는 明洞이 그리워 가족은 필동 집으로 보내고 나오던 길이었대요. 우리는 明洞 술집에서 痛飮(통음)을 했죠.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通禁(통금) 때문에 필동에 있는 朴是春씨의 적산가옥으로 옮겼습니다. 그 집에 가서도 잔뜩 마셨어요』 그들은 그날 밤, 朴是春씨 댁에서 「전우야 잘자라」를 작사ㆍ작곡한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그들은 北進(북진), 統一(통일), 解放(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朴是春씨가 먼저 『우린 살았다. 北進 통일이 임박했으니까 軍人들의 사기를 돋울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兪湖씨가 한 절의 노랫말을 지어 朴是春씨에게 내놓으면 그는 기타를 튕겨 가며 멜로디를 五線紙(오선지)에 그려 나갔다. 『朴是春씨는 當代 최고의 기타리스트였어요. 10여 세 때 日本에서 영화관 조수로 일을 시작했지만, 재주만큼은 선배들이 모두 인정을 했답니다. 내가 넘긴 노랫말을 술기운에 수십 번 지우고 그려 넣기를 반복하더니 멜로디를 완성했어요』 두 사람은 아침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曲을 마무리한 후, 明洞으로 해장국을 먹으러 나갔다고 한다. 兪湖씨는 4절까지의 가사를 힘들이지 않고 단숨에 지어 냈다고 한다. 화랑담배 나눠 피우는 義理를 담아 『3개월 동안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술기운도 있고 기분도 좋겠다. 오랜 피란살이에 통일이 된다니까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전우야 잘자라」를 술 먹고 만들었다면 사람들이 욕하겠지만…』 ―어떻게 4절까지 짓게 됐나요? 『가사가 짧으니까 자연히 4절이 됐어요. 노랫말을 구성하는데, 군인들이 낙동강까지 쫓겨갔다가 올라온 것이니까 1절을 洛東江, 2절은 추풍령, 3절은 한강수, 4절은 삼팔선으로 잡았어요』 ―노랫말을 지을 때 어떤 점에 신경을 썼나요? 『아이들도 쉽게 따라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쉽게 썼습니다. 본래 軍歌(군가)로 지은 노래는 아니었으니까요. 며칠 사이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불렀어요』 ―이 노래가 어떻게 軍에 전달됐습니까? 『朴是春씨가 아는 정훈장교가 가져가서 정훈국에서 발표를 했어요. 軍부대에서 油印物(유인물)로 악보를 인쇄해 군인들에게 나눠준 것을 기억합니다. 정훈장교인 鮮于煇(선우휘) 등 朴선생이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鮮于輝 조선일보 주필과는 자주 만난 적은 없지만 만나기만 하면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인사를 해요. 아무튼 北進하는 국군이 부를 만한 군가가 없었던 참에 잘 된 거지요. 이 노래는 혼자 부르면 심심하고, 여럿이 부르면 힘이 막 나지요』 ―전우야 잘자라의 2절,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의 가사는 어떻게 생각하신 겁니까? 『군대 담배는 「화랑」 담배밖에 없었잖아요. 담배가 얇은 포장 종이에 담겨 있어서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면 부스러졌어요. 비록 그런 담배지만 그걸 나눠 피우면 왠지 남자들끼리의 義理(의리)가 떠오르죠』 軍歌는 「진짜 사나이」한 곡 作詞 ―「전우야 잘자라」의 가사가 악보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나온 지가 오래 돼 대중 가요집이 잘못된 게 많아요. 예를 들면, 「담배를 나누어 먹던」이라고 돼 있는데, 제가 작사할 때는 「담배를 나누어 피던」으로 했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담배를 피운다고 하지, 먹는다고는 안 하거든요』 北進 장병의 주제곡이 되었던 이 노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1·4 후퇴를 할 무렵에는 陸本에 의해서 금지곡이 된다. 육군에서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란 대목이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휴전 이후에 이 노래는 복권되었다. 兪湖는 陣中歌謠(진중가요) 「전우야 잘자라」 외에 본격적인 軍歌를 작사했다. 「전우야 잘자라」를 작사한 공로로 육군본부에서 주관하는 군가선정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진짜 사나이」. 육군본부 정훈국에서 그에게 의뢰해 작사한 곡이다. 1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산봉우리에 해-뜨고 해가 질 적에/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美軍들 군가를 들어보면 나라 사랑 이야기는 없습디다. 동네 계집애들 이름을 가사에 집어 넣어서 낄낄거리면서 훈련의 피곤함을 잊는데, 참 실용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軍歌도 앞으로는 그렇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美軍들은 부대 이름도 사람 이름으로 짓고, 인간미가 있어요』 兪湖씨는 경향신문 문화부장 시절, 동료들과 술을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고 나서 불광동 집엘 택시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 녹번동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은 그는 滿醉(만취) 상태에서 거동수상자로 몰렸다. 『헌병이 나를 검문소 안으로 데리고 가서 검문을 하는데, 「내가 전우야 잘자라 노래를 지은 작사자인데」라고 했더니, 헌병이 내게 「한번 불러보라」고 하기에 담배를 한 개피 달라고 했어요. 냅다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를 하는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까지만 기억이 나고 그 다음은 영 생각이 안 났어요. 두 번째 불러도 마찬가지고. 이 이야기를 金鍾泌(김종필) 총재 등 5·16혁명 주체들에게 했더니, 金총재가 날 만날 때마다 짓궂게 놀렸어요. 좌우간 술기운에 톡톡히 망신당한 거야』 노래인생의 시작, 朴是春씨와의 만남 ―朴是春씨와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1945년 10월 서울중앙방송국에 들어갔을 때, 朴是春씨는 서울중앙방송국 초대 경음악단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1946년 조선방송사업협회에서 광복이 됐으니까 건전가요를 보급하자는 案(안)이 나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목장의 노래」, 「하이킹의 노래」를 작사했어요. 작곡은 朴是春씨가 했고요. 1947년 朴是春 악단장이 내가 편성국에서 드라마를 쓰고 있는데, 작사를 하나 급하게 해달래요. 당시 댄스홀들이 盛業中(성업중)이라 樂士(악사)들이 수입이 좋은 댄스홀로 몰렸습니다. 朴是春 악단장은 악사들을 한꺼번에 모아 레코드를 吹入(취입)하기 힘이 드니까 악사들이 모인 김에 한꺼번에 연주해서 레코드를 취입하려고 한 것이었어요. 조금 있으면 악사들이 다 모인다며 지금 당장 作詞를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光復이 됐으니까 復古(복고)풍으로 하자고 합디다. 제목을 「신라의 달밤」이라고 정해서 갖고 왔어요. 어이가 없어서 멜로디를 물어 보니 朴씨가 테이블을 두두리며 「딴 딴 딴」 하며 조용히 불러요. 나는 字數(자수)를 맞춰야 하니까 3절 노래인데… 「이거 어때요?」 하면 무조건 「좋아, 좋아」 하더군요. 드라마를 쓰다 말고 한 시간쯤 걸렸을까. 내가 펜을 놓자마자 「휙」하고 바람 소리를 내며 들고 나가더군요』 「비 내리는 고모령」도 사연이 있다. 兪湖는 朴是春으로부터 作詞(작사) 부탁을 받고 서울중앙방송국 도서관으로 갔다.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한국 全圖(전도)를 보니 東大邱(동대구)역 옆에 급행 열차도 서지 않는 顧母驛(고모역)이 눈에 띄었다. 顧母驛이라는 漢字가 무슨 사연을 간직한 것 같았다. 그는 가사를 적어 내려갔다. 이 노래는 1948년 가수 玄仁씨의 특유한 低音(저음)에 실려 인기를 모았다. 『1984년 「비 내리는 고모령」 노래비 제막식에서 大邱 달성구청 홍보관이 노랫말과 같은 어머니와 아들의 사연이 있다고 하기에 「틀리진 않았구나」 하고 안도했지요』 ―朴是春씨와 함께 몇 곡을 만들었습니까? 『나는 朴是春씨를 만나 5년 동안 작사를 했습니다. 작사자가 나밖에 없는지 같이 했어요. 「고향만리」, 「럭키서울」,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등이 나온 겁니다. 난 방송작가로 시작했는데, 朴是春씨를 만나서 노랫말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드라마 주제가도 작사했는데, 「짚세기 신고 왔네」, 「님은 먼 곳에」 등이 있어요. 朴是春씨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미부여를 했어요. 「신라의 달밤」은 광복을 기념해 復古風으로 노래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1·4 후퇴 때는 군인들 사기앙양을 위해 대구에서 「전선야곡」을 지었습니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兪湖씨, 우리 제주도 온 김에 이곳에 노래 하나 떨어뜨리고 가자」고 해서 나온 게 「삼다도 소식」입니다. 피란 수도 釜山에서 서울 수복이 가까워지자 그는 피란살이의 설움을 노래하자고 해서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지었습니다. 朴是春씨를 보면 마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記者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니까 당시에 크게 어필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의 달밤이오』… 『수고하십니다』 ―노랫말을 지으실 때 어디에 가장 중점을 두시나요? 『어린 아이들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쉬운 語彙(어휘)를 골라요. 그 다음이 멜로디를 보고 字數를 조정합니다. 作詞는 詩와는 엄연히 달라요. 개중에는 문학성이 짙은 노랫말도 있지만 대중성을 가진 어휘를 고르려면 문학성 있는 노랫말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다만 좋은 노랫말이 있으면 작곡가에게 曲想(곡상)이 떠올라 많이 불려지는 가곡이 만들어집니다』 ―작사료는 어떻게 받습니까? 그는 저작권료(작사료)의 구체적인 금액을 묻는 기자의 질문엔 은근히 답변을 피했다. 『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내 노래가 63곡이오. 드라마 주제곡까지 합치면 나도 많이 쓴 편이죠. 저작권료가 들어오면서 무슨 노래가 어느 노래방에서 몇 번 불려졌다는 일람표가 옵니다. 「신라의 달밤」, 「럭키서울」, 「고향만리」,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열댓 곡은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어요』 ―가수 玄仁씨와는 언제 만나셨습니까? 『朴是春씨는 玄仁씨가 중국에서 돌아와 노래를 하는데, 누가 자기에게 소개를 했대요. 마침 「신라의 달밤」을 작곡하고는 누굴 줄까 하고 고심했답디다. 朴선생이 日政 때부터 좋아한 가수는 南仁樹씨였거든요. 그래서 朴是春씨 曲(곡)은 南仁樹씨가 도맡아 부르다시피 했는데 朴是春씨의 말이 「신라의 달밤은 南仁樹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며 玄仁씨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1947년 노래 발표회가 明洞의 明治座(명치좌)에서 열렸습니다. 경향신문사와 가까워 건너가 봤어요. 朴是春씨 말을 그대로 옮기면 「玄仁은 코가 크고 서양 사람이 되다만 듯한 얼굴」이었는데, 唱法(창법)이 독특해 청중들이 홀딱 반했지요. 노래가 끝나도 박수 소리가 끝나야지. 내가 구경하던 날 玄仁씨은 여덟 번 앙코르를 받았어요. 무대 뒤에 가 봤더니 「歌手라는 게 저래서 좋구나」를 느끼겠더라구요. 통금시간이 지나 파출소에서 검문을 받는데 「누구냐?」 해서 「신라의 달밤이오」 하면 「수고하십니다」 하고 보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으니까요. 하도 유명하니까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암구어로 쓰였다고 합디다』 럭키레코드社 문예부장 休戰(휴전)이 되자 兪湖씨는 경향신문사 문화부에 복귀한다. 그러나 매일 朴是春씨의 성화에 배길 수가 없었다. 朴씨는 자신이 차린 럭키레코드의 문예부장 자리를 兪湖씨에게 제의했다. 레코드社의 문예부장은 가수들을 상대해야 하고, 작사·작곡자를 선정해야 하는 등 핵심자리였다. 『신문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경향신문 金光洲 문화부장의 배려로 레코드사 일에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레코드 봉투의 디자인, 레코드 라벨 디자인, 포스터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제사 하는 얘기지만 朴是春씨는 그때 돈 한 푼도 주지 않았고, TBC 경음악단장 이봉조씨도 그랬어요. 이봉조씨는 영화 주제가 「떠날 때는 말 없이」, 「종점」 등 서너 곡을 부탁했는데, 일이 끝나면 「막걸리 먹으러 가자」는 게 전부였고, 나도 그것으로 만족했구요』 ―朴是春씨의 럭키레코드는 경영이 잘 됐나요? 『말도 말아요. 朴是春씨가 어찌나 무모하게 일처리를 하는지 고생만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日本에서 녹음·제작까지 해서 판매를 했어요. 朴是春씨는 녹음한 原版(원판)을 찍어 낼 방법에 대해 고심했어요. 돈도 없고, 기계를 日本에서 들여올 엄두를 못 냈어요. 어느 날, 朴是春씨가 투자를 한 日食 집 주인과 을지로 고물상에 나가자고 해요. 고물상에서 참기름 짜는 기계를 두 대 사다가 신당동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에 설치했습니다. 고물상에다가 日本 노래 헌 레코드라도 좋으니까, 헌 레코드를 잔뜩 모아다 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日本 레코드가 흔했어요. 헌 판을 녹인 물에 밀랍 원판을 눌러서 판을 찍어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참기름 기계를 혼자 누를 수가 없으니까 서너 사람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눌렀습니다. 이렇게 눌러서 말려 놓으면 판이 완성되는 데 하루에 10장도 못 만들었어요. 레코드 가게 주인이 기다렸다가 서너 장씩 가져갔는데, 얼마 있다가 다시 가져와서 「이걸 어떻게 파냐」고 항의해요. 처음에는 玄仁씨의 「신라의 달밤」이 나오다가 日本의 엔카(演歌)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人力으로 하니까 덜 눌려서 그런 불량품이 나온 거지요. 열 장을 팔면 返品(반품)이 여섯 장은 됐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시나리오, 「祖國 3時」 兪湖씨는 경향신문 문화부장으로 5·16 군사혁명을 맞았다. 몇 달 후 경향신문을 그만둔 그에게 혁명 주체세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5·16 기념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었다.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하기에 난 시나리오를 쓴 적도 없고,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라면서 시나리오 작가인 김강윤씨를 소개했어요. 그쪽에서도 「혼자 하시기 뭐하면 다른 사람과 같이하셔도 좋다」는 것이었어요』 시나리오는 혁명주체 세력 간의 功 다툼과 異見(이견)으로 계속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육사 5기생들이 자신들도 혁명 주체인데 시나리오에는 金鍾泌씨 등 8기생을 중심으로 혁명이 성사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며 반발하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시나리오는 兪湖씨가 「祖國 3時」라는 제목을 붙여 촬영에 들어갔다. 『한강 다리를 넘은 시각이 새벽 3시 아닙니까. 시나리오 제목이 통과됐고, 朴正熙 대통령이 시나리오 원본 표지에 특이한 글씨체로 「祖國 3時」라고 썼어요』 그러나 영화는 공수부대가 한강변에 떨어지는 첫 장면을 찍고는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는 혁명 주체세력 간 갈등이 중도하차의 원인인 것 같다고 추정했다. ―문화부 기자로서 기억에 남는 취재는 어떤 것이 있나요? 『극단의 巨頭(거두)로 극예술연구회 출신인 柳致眞(유치진·작고)씨와 徐恒錫(서항석·작고)씨가 한때는 사이가 안 좋았어요. 柳致眞 선생을 중심으로 한 극단의 움직임이 더 두드러져서 柳致眞 선생의 손을 들어 준(기사로 두둔해 준) 적이 있어요. 徐恒錫 선생이 대단히 섭섭해하던 모습이 기억 나요』 兪湖씨는 자유당 정권이 1959년 4월 군정법령 제88호를 적용,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얘기를 꺼냈다. 『경향신문이 폐간되니까 사회 각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復刊(복간) 운동이 일어났어요. 문화부장인 나는 문화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으러 다녔어요. 대한잉크 사장을 지낸 金振贊(김진찬·작고) 당시 문화부 차장과 함께 발품을 팔아 가며 도장을 받았어요. 그러나 경향신문에 기고를 하던 대학교수들도 「자유당 처사가 부당하긴 하지만 서명은 곤란하다」며 움츠리더군요. 작고한 趙芝薰(조지훈) 詩人, 소설가 馬海松(마해송)씨는 두말 않고 도장을 찍더라구요. 知性人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兪湖 선생은 부인 高壽子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장남은 KBS 보도국 기자를 거쳐 바둑TV 이사로 정년을 마친 兪建穆(유건목)씨, 며느리 禹惠全(우혜전)씨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거쳐 경향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다 현재 영국에 유학 중이다. 장녀 兪南眉(유남미)는 고려大 신방과를 졸업한 李信雨(이신우)씨와 결혼했다. 李씨는 現 문화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兪湖 선생은 『우리 집에서는 나를 포함해 記者 출신이 네 명』이라면서 『남들은 나를 보고 신문사 社長이라고 한다』며 웃었다. 기자가 『좋은 노랫말 하나가 國難(국난) 때 국민을 단결시키는 큰 역할을 한다』고 하자, 兪湖 선생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통일이 되어 「전우야 잘자라」도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질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입력 : 200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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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밀리터리 인사이드’

gomsi@chosun.com 기자클럽 「Soldier’s Story」는 국내 최초로 軍人들의 이야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軍隊版 「피플」지면입니다. 「Soldier’s Story」에서는 한국戰과 월남戰을 치룬 老兵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후손들에게 전하는 전쟁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또한 전후방에서 묵묵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軍人들의 哀歡과 話題 등도 발굴해 기사로 담아낼 예정입니다. 기자클럽 「Soldier’s Story」에 제보할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gomsichosun.com)로 연락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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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채관 (2007-10-25)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요,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먹잔아요. 그런데, 크리스마스때도 왜 칠면조를 먹는지 궁금합니다. ^^ 소식이 뜸하시다했더니만, 미국에서 멋진 추수 감사절을 보내셨네요!

  • 이상흔 (2007-10-25)

    아마 추수감사절때 남은 것 소비 하느라 먹는 거 아닐까요^^ 그 많은 칠면조 버리려면 아깝잖아요. 미국에는 언제 가시는죠?

  • 유치찬란 (2007-10-25)

    22년째 미국에 살고있는 교포의 눈에 비친 이글은 엄청 유치하다.미국이 뭐 좋다고... 쩝 !

  • 이상흔 (2007-10-25)

    22년째 미국에 살고 있는 누나가 쓴 글이 아니라, 제가 쓴 글입니다. ㅠ.ㅠ 유치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휴가 10일 갔다 와서 쓴 것입니다. 미국이 왜 다 좋겠습니까. 적어도 제 눈에 비친 대부분의 미국 가정은 거의 가정붕괴 수준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가족제도를 볼 때마다 우리의 가정에 질서를 잡아주신 공자를 더욱 존경하게 됩니다. 그 부분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쓰겠습니다.

  • mrs lee (2007-10-25)

    추수 감사절과 크리스마스는 거의 한달이 되기 때문에 남은 칠면조를 먹을수는 없는 일이고 크리스마스에도 여러 사람이 모이니 나누어 먹기 편한 칠면조를 굽는집이 더러 있읍니다.

  • ㅁ미국30년 (2007-10-25)

    미국바도 종류가 많은데 주로 싱글, 이혼자, 중독자들이 가는 바를 이야기군요...일반보통미국민은 이런 바에는 안가는 이가 90%.지요-전체 미국을 바에서 본걸로 생각하면 곤란.

  • 이상흔 (2007-10-25)

    저도 미국에 1년가까이 머문적이 있습니다. 미국인과 결혼해 20년을 살아온 누나를 통해 미국의 많은 가정을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 하는 것니다. 바에야 원래 온갖 사람이 오기 때문에 바에 오는 손님을 두고 미국인 전체를 판단 하는 것은 곤란하다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작년에 우리나라의 호주제 폐지론자들은 호주제 폐지 이론을 펼칠 때 말끝마다 미국의 가정을 선진적이고, 이상적인 가족제도 인양 들먹였습니다. 미국 가족제도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한번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 그냥이 (2007-10-25)

    남는걸 소비하긴요. 우리야 터키가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못생기고 맛이없다고 하지만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음식이죠. 사시사철 터키 샌드위치를 먹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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