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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동경 유학생과 윤심덕·김우진

[옛 잡지를 거닐다] 이서구의 <기자 시절> ③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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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잡지는 흥미롭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가득한 보물상자다. 먼지를 탈탈 털고 다시 읽으면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함과 마주할 수 있다.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다. 잡지 필자 대개는 20세기를 활짝 불 밝혔던 문인(文人)들이어서 눈길이 더 간다. 앞으로 옛 잡지에 실린 보석 같은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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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과 김우진.

종로경찰서 순사와 경기도 기마경찰대는 새벽부터 출동하여 단성사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시민들과 날카롭게 대치해 있고 종로 삼정목 파출소에 본부를 두고 총지휘를 하는 종로서장 삼
()이와 고등주임 삼륜(三輪)은 상혈(上血)된 눈동자로 길 건너만 노리고 있었다.
이윽고 연사를 태운 자동차가 단성사 정문에 도착되자 우레 같은 박수는 쏟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 청년학생이 방학 동안 고향에 돌아왔으면 그뿐이지, 이렇듯 열광적인 환경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일본 유학생에게는 이렇듯 기대가 컸던 것이요 때가 때인지라 반드시 배일적인 웅변이 터져 나와 잠시 동안이나마 가슴이 시원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며, 세계 대세로 미루어 본 우리나라의 운명을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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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국내 최초의 민간인이 설립한 극장인 단성사. 일제강점기 단성사는 무대예술 공연을 비롯해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상영의 주역을 담당했다.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이나
, 강연을 하러 온 사람이나, 강연회를 마련한 신문사나 어느 틈에, 서로 통하는 바 있어 오늘의 강연회는 시작하기 전부터 몹시 긴장되었고 놈들의 경계도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강사들이 단상에 올라앉고 청중이 물결같이 몰려들 때 돌연 정복을 한 경관 한 녀석이 단상에 뛰어올라 서더니 흥분된 어조로
오늘 집회는 허락지 않는다. 곧 해산하라.”
고함을 쳤다. 어느 틈에 정복 순사, 사복 형사들이 새새 틈틈이 끼어 섰다가 군소리 한마디만 해도 팔목을 끌고 덜미를 치게 되니 흥분된 군중도 하는 수 없이 흩어가게 되고 신문사에서는 경찰에 가서
한번 허가해 놓은 집회를 개회도 하기 전에 미리 해산시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 이유를 밝히라.”
항의를 하니 놈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강연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그 공기가 불온하므로 해산을 시킨 것이다.”
이날 동아일보 사설에는
공기가 불온하다고 일단 허가한 집회를 개회도 하기 전에 해산을 명하니 세상에 공기를 취체하는 경찰은 처음 보았다.’
고 통렬히 공격을 했으나 여기 대해서 놈들은 꿀 먹은 벙어리인 양 대구를 하지 않고 강사들만 뒤를 따르며(소위 미행) 귀찮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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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건립된 인사동의 터줏대감 조선극장은 영화상영과 판소리, 가무곡 공연 겸용관이었다. 사진은 조선극장 터 표석.
강연회 사건이 겨우 가라앉자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이 동경 유학생으로 조직된 고학생 동우회의 고국방문 순회 연극단이었다. 이 단체 공연은 강연과 달라서 일정한 각본에 의해 전개되는 고정적인 것이다. 놈들도 그다지 겁을 집어 먹지 않고 각본만 검열을 하고 흥행 허가를 내주었다. 동우회 공연은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그 첫 막을 열었는데 당시의 멤버를 보면 첫째 현해탄에서 사의 찬미를 부르며 정사(情死)를 한 윤심덕(尹心悳) 양이 성악을 했고 그와 죽음을 같이한 김우진(金祐鎭) 청년이 연출을 맡아 보았다. 나는 이때 동우회 담당 기자로 이들과 거의 기거를 같이했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이는 이때부터 좋았든가 생각난다. 동우회연극 중에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김영일(金英一)의 사()
라는 일종의 사회극으로 동경에 유학하고 있는 동포 중에서 특히 부잣집 아들이 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고학하는 친구들을 모른 체하는 일면과 온갖 고생을 달게 참아가며 조국 광복의 역군 되기를 목표로 고학을 하고 있는 학생의 대조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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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집 '김영일의 사(死)'(조명희 작).
 
이것은 물론 주최자인 고학생을 위한 동우회의 의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었으며 관중은 고학생의 입장에 동정하여 함께 울고 박수를 보냈었다.
이 박수를 보내는 무수한 관객 중에 가장 아름답고 호화스러운 계급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기생(妓生)이라는 족속들이었다. 한마디로 기생하면 청년학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합일지 모르나 그때의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동경서 돌아온 대학생사방모자에 금단추 번쩍이는 대학 정복을 떨어뜨리고 거리를 산책하는 22, 23세의 청년에게는 모든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특히 화류계기생들 중에서도 소위 인텔리 기생이라고 불리는 클럽들은 그야말로 제 돈을 써 가면서 동경 유학생들과 접근하기에 열중했다. 그것을 일컬어 사상(思想) 기생이라고 했으며 화류계에서도 특별 취급을 했다.
이러한 틈에 기생들 중에서 천업(賤業)을 청산(淸算)하고 일본에 유학을 가는 사람도 있었으니 지금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으로는 대구(大邱) 기생으로 가야금의 명수로 이름이 장안에 떨치던 정금죽(丁琴竹)이었다. 그는 그의 호적 이름인 정칠성(丁七星)이라는 이름을 찾아가지고 동경에 건너갔다. 그다음에 또 한 사람 생각나는 것은 김금도(金錦桃)라는 신의주 출신의 여인(麗人·미인이라는 뜻-편집자) 이 사람도 정금죽이와 전후해서 동경 유학의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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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기생의 모습이다. 사진출처=www.k-heritage.tv

기생들이 웃음 팔기를 부끄럽게 여기고 떳떳한 남편에게 시집가기를 소원하고 거문고 뜯고 노래 배우기를 꺼리고 학교에 다니기를 좋아하게 되니 화류계에는 때 아닌 혁명이 일어난 것이요, 기생 어머니들에게는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나 내린 듯이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강향난(姜香蘭)이라는 경상도 기생이 머리를 깎아버리고 남장(男裝)을 한 사건이었다. 이 사람은 기생 노릇 하기가 지긋지긋하나 어머니의 고집을 벗어날 길 없어 숫제 머리를 깎아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여자가 머리 자르는 것이 숫제 유행(流行)이지만 그 당시로 말하면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다. 나는 즉시 청진동 그의 집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감상을 듣고 흥분된 붓끝으로
화류계에 울리는 경동(警動)! ()기생 속에도 백합화 같은 정()은 있다.”
는 등, 최고 최대의 찬사를 늘어놓은 생각이 떠오른다. 이같이 화류계가 물 끓듯 할 때 동경 유학생이 떼를 지어 서울에 나타나서 특히 극장에서 연극을 하게 되니 그네가 잠자코 있을 리는 없다. 밤마다 돈 벌러 요릿집에는 가지 않고 제돈 내고 들어가는 극장만 찾아가서 연극 구경에 넋을 잃고 앉았으니 기생 어머니들은 기가 맥혀서 한숨만 쉬는 판이었다. 쓰다 보니 여명(黎明)기의 화류애사(花柳哀史)의 서론과도 비슷이 된 감이 있다.
이번에는 여기서 붓을 멈추고 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설산()과 수재민
 
동아일보가 창간된 다음해(단기 4254) 여름이다. 한강 일대에 큰 홍수가 나서 뚝섬서부터 양화도까지는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둑이 시원치 않은 데다가 상류에서 내리 밀리는 흙탕물 줄기는 성낸 호랑이같이 함부로 휩쓸어 내려 닥치고 보니 뚝섬이 물바다가 되고 이촌동이 자취도 없이 물속에 함몰되었고 영등포 일대, 약간 높은 지대에는 피난민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홍수가 밀려오던 첫날은 신문 재료를 얻기 위해서 쫓아다녔으나 다음날부터는
신문 취재도 소중하지만 보다 더 급한 일이 수재를 만나서 집을 잃고 배를 주리며 언덕 기슭에 울고 있는 이재동포를 구조하는 일이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놈들이 무슨 성의가 있어서 독립만세 부르던 사람들을 애써 구호할 것이요, 우리가 나서서 구호운동을 전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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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
동아일보의 간부회의는 비장한 분위기 속에 끝나고 직각으로 구호반을 조직하였다. 신문에는 구제품을 모집하는 사고(社告)를 크게 내고우선 주선되는 대로 쌀과 의복을 싣고 이재민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영등포반에 배치되었고 우리 반의 반장은 당시 주필이었던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이었다. 설산 선생의 인기는 그야말로 굉장하던 때였고 나 역시 그의 학자다운 기풍과 소박한 태도에 가장 경의를 표할 때이다. 설산 선생과 함께 나서서 이재동포에게 구제품을 분배하게 된 나의 행운을 자랑하고 싶었었다.
수레에 가득 실은 쌀과 의복! 인부가 끌고 가는 곳은 아직도 흙탕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구렁텅이다. 수레의 뒤를 미는 설산 선생도, 나도 하반신은 흙투성이다. 나는 내 몸 고달픈 생각보다 설산 선생이 겪는 고달픔에 마음이 무거웠다.
입으로 부르짖는 애국사상! 글로써 내놓는 애족심!”
그것은 숫제 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종일토록 수레를 밀고 몇십 리 흙탕물을 헤쳐 가며 이재동포를 찾아다니는 정성! 이것은 참으로 몸소 행하는 애족심이요, 실천에 들어간 애국심일지도 모른다.
설산 선생 점심 좀 잡수시고 계속하십시다!”
지국장이 휴식하기를 권하면 설산 선생은 가장 평범한 어조로
뭘요! 나보다 몇 끼나 더 굶은 사람들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어서 저쪽 언덕 밑으로 가보십시다.”
나는 뭔지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아나서 흙 묻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무슨 영광의 길이나 재촉하듯이 수레 뒤를 힘차게 밀었다. 이날 해가 저물어 돌아오는 길이었다. 영등포 정거장에서 기차를 탔다. 차가, 홍수가 아직도 용솟음치는 한강철교를 건넌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설산 선생이 말이 없다. 힐끗 바라다보니 어느 틈에 앉아서 졸고 있다. 수염은 며칠이나 못 깎았는지 텁석부리가 되었다. 아마 수재가 나는 날부터 그대로 일 것이다. 나는 그의 잠든 얼굴에 무엇인가 신성(神聖)한 것을 느꼈다. 마음이 흐뭇했다.
이 사람이 정말 애국지사이다.”
나는 설산을 알고 그에게 귀염을 받고 있는 자기를 얼마나 행복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계속)
(출처=p203~205, 신태양19585월호)

입력 : 2018.08.18

조회 : 5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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