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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국제

모사드,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의 유품인 오메가 시계 53년 만에 회수

이스라엘의 적국인 시리아 국방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골란고원 탈취 등에 결정적 기여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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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시리아 이민사회 통해 시리아로 우회 침투
- 주아르헨티나 무관 지낸 하페즈가 대통령 되자 공보부 장관, 국방부 장관 물망에 올라... 군부 요인들 포섭해 기밀 수집
- 이스라엘, 엘리 코헨이 처형된 후 국가적 예우에 만전... 유해 회수 위해 노력, 유품인 시계 확인하자 모사드가 회수 작전 성공시켜
엘리 코헨은 1965년 5월 18일 다마스커스의 순교자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7월 5일 정보기관 모사드가 53년 전 시리아에서 처형된 이스라엘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1924~1965)의 손목시계를 '적의 손'에서 되찾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 언론은 "모사드가 2014년부터 코헨의 무덤 위치를 백방으로 찾았으며 이 손목시계는 이러한 유해 수습 작전의 일부"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를 접하는 순간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국가적 영웅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벤구리온, “무관심이야말로 나라의 안전에 있어서 최악의 敵”

엘리 코헨은 세계 첩보전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스파이 중의 스파이'다. 이집트 태생의 유대인이면서도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한 시리아계(系) 사업가로 위장해 시리아로 침투, 시리아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극비정보를 빼돌렸던 그의 사례는 제3국을 통한 우회침투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힌다.

코헨은 1924년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때 영국 식민당국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된 유대인 젊은이들이 처형당하는 광경을 목격한 후 열렬한 시오니스트가 됐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를 위해 일하던 그는 이집트에서 유대인 박해가 발생하자 1956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국방부 정보분석요원, 식료품 회사 회계담당자로 일했다. 하지만 이런 무료한 일들은 그의 피 끓는 애국심을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가 애국심을 발휘할 기회는 곧 다가왔다. 1960년 모사드가 접근해 온 것이다. 실은 그동안에도 모사드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쭉 주목해 왔다. 이 사실을 알고 감격한 코헨은 “어떤 형태로든 조국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엘리 코헨이 정보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있는 사이에 시리아는 계속해서 무력도발을 감행해 왔다. 벤구리온 이스라엘 총리는 이서 하렐 모사드 부장에게 “무관심이야말로 나라의 안전에 있어서 최악의 적(敵)”이라며 대(對)시리아공작 강화를 계속 촉구했다.

1961년 3월 엘리 코헨은 아르헨티나의 시리아인 사회로 침투했다. 1990년대에 대통령을 지낸 카를로스 메넴이 시리아계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시리아 출신 이민자인들은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엘리 코헨은 ‘카밀 아민 터베스’라는 이름의 시리아계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아르헨티나 주재 시리아대사관 무관(武官) 아민 알 하페즈 소령에게 접근했다. 하페즈 소령은 사교성 뛰어나고 열렬한 ‘아랍민족주의자’인 ‘터베스(엘리 코헨)’에게 매료됐다. 하페즈 소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터베스’에게 귀국해서 조국을 위해 봉사해 달라고 호소했다.

시리아 정보기관은 하페즈처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카밀 아민 터베스’의 이력에 나타난 고향 등을 찾아가 신원을 확인했다. ‘터베스’의 신원에는 아무런 하자(瑕疵)가 없었다. 물론 모사드가 엘리 코헨의 신분을 세탁하기 위해 치밀한 공작을 벌여놓은 덕분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한 애국적 사업가 ‘카밀 아민 터베스’는 1961년 8월, 시리아인 이민사회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시리아로 귀국(?)했다. 그는 시리아 군부, 정계, 관계(官界)의 요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친구

1963년 바트당(시리아, 이라크 등의 아랍민족주의정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아르헨티나 시절부터 ‘터베스’가 ‘장군’이라고 부르며 그의 성공을 예견(?)했던 하페즈가 대통령이 됐다. ‘터베스’는 일약 대통령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개각 때면 공보장관으로 그가 입각하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페즈 대통령은 우선 그를 국방차관으로 임명했다가, 후일 국방장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언질을 주기도 했다. 이는 하페즈가 그를 후계자 물망에 올려놓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터베스'는 겸손했다. 그는 시리아 사회의 신참자로서 좀더 시리아에 대해 잘 알게 된 후에 공직에 나가겠다며 관직을 사양했다. 대신 그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시리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과 교유하면서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그런 ‘터베스(엘리 코헨)’에게 각종 정보가 몰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한 부호(富豪)답게 정부와 군부의 요인들을 자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질펀한 파티를 벌였다. 그들이 술과 여자에 취해 내뱉는 말들은 엘리 코헨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정보였다.

‘터베스’는 군부나 정부 요인인 친구들이 바람을 피우는 장소로 그의 집을 빌려주기도 했다. 대신 ‘터베스’는 그들의 사무실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그들이 관리하는 비밀문서들을 태연하게 들여다보았다.

시리아군 참모총장의 조카 마지 대령도 ‘터베스’의 절친이었다. 마지 대령과 만날 때면, '터베스'는 짐짓 군사문제에 대한 문외한으로 행세하면서 군사문제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다. 마지 대령은 그의 무지함을 깨우쳐주고 시리아군의 막강함(?)을 알려주기 위해 직접 최전선인 골란고원으로 안내해서 중포(重砲)와 병력배치 상황 등을 브리핑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시리아군의 무기도입, 골란고원의 병력배치, 이스라엘로 흘러들어가는 강물의 수로변경공사 계획, 시리아 공군조종사들의 리스트 등이 코헨의 손을 거쳐 이스라엘로 흘러들어갔다. 특히 이때 넘어간 골란고원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는 1967년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골란고원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에서 가해지는 북부전선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골란고원에서 발원(發源)하는 식수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나는 텔아비브에서 온 이스라엘의 군인입니다”

1965년 코헨은 시리아군 방첩기관에 체포됐다. 코헨이 이스라엘로 발신하는 무전(無電)이 꼬리가 잡힌 것이다. 500여 명의 시리아인들이 그와 연루된 혐의로 체포됐다.

엘리 코헨을 체포한 시리아 방첩기관 책임자 아메드 수웨이다니 대령은 처음에는 그를 이용해 역공작(逆工作)을 펴보려 했다. 수웨이다니 대령은 코헨에게 거짓 정보를 발신하라고 요구했다. 행여 딴짓을 못하도록 감시를 붙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들은 코헨이 타전하면서 평소와는 달리 속도와 리듬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나는 체포되었다’는 메시지를 본부에 전달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때 후계자로까지 생각했던 절친이 이스라엘의 스파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하페즈 대통령은 경악했다. 그의 아내가 입고 있는 코트도 '터베스'가 선물한 것이었다. 하페즈는 ‘터베스’와 직접 대면했다. 일말의 변명을 기대하는 대통령에게 ‘터베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텔아비브에서 온 엘리 코헨, 이스라엘의 군인입니다.”

체포된 후 레바논 언론과 인터뷰에서 코헨은 모진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국에 진력하기 위해 시리아로 왔습니다. 나의 동포, 나의 아내, 그리고 세 아들의 장래를 위해... 내가 단 한 번도 이스라엘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정부도 엘리 코헨을 배반하지 않았다. 코헨을 구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프랑스 대통령과 총리, 동구권 국가지도자들, 로마 교황, 하페즈의 목숨을 구했던 의사 등 하페즈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사들을 총동원했다. 이스라엘이 수감하고 있는 시리아 간첩 전원과 코헨을 맞교환하자는 제안도 했다. 하페즈와 친한 프랑스군 장교를 통해 시리아에 비밀리에 현금과 민수물자들을 지원하겠다는 제안도 들어갔다.

하지만 절친이 이스라엘 간첩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하페즈는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코헨 구명을 위한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엘리 코헨은 1965년 5월 18일 다마스커스의 순교자 광장에서 분노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집행인이 관례에 따라 그에게 검은 마스크를 씌우려 했다. 엘리 코헨은 이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 나디아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디아, 제발 용서해 주오. 당신 자신과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그리고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해주기 바라오. 재혼하기 바라오. 이에 대해 나는 당신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겠소. 이는 아이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요. 나를 위해 우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부탁하오. 나의 마지막 키스와 인사를 보내오.” 

아들의 맹세

코헨은 죽기 전 감옥으로 찾아온 성직자에게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그에게 큰 빚을 졌다. 그리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온나라가 나섰다.

코헨이 처형되자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시위와 행사가 열렸다. 텔아비브에서의 추도 시위는 코헨이 시리아로 파견될 당시의 총리였던 벤구리온이 앞장서서 이끌었다. 여러 도시에서 거리나 공원, 광장에 엘리 코헨의 이름이 붙었다.

엘리 코헨의 아내 나디아에게 한 외국 기자가 "국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디아는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전 세계의 다른 어떤 정부가 해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3세가 되면 성년식을 치른다. 1977년 합동성년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의 아들들이 초대됐다. 행사에는 베긴 총리를 비롯해 국방장관, 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했다.

이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엘리 코헨의 아들 사울이었다. 생일보다 몇 달 앞당겨 특별히 행사에 초대받은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모든 아이와 똑같아지고 싶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영웅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살아 있게 되고, 다른 아버지처럼 우리와 함께 살고, 내가 아는 아버지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생애와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 쓴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면 역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맹세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나는 내 일생을 통해 결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나는 내 의무를 전력을 다해서, 또 이스라엘 국가를 위한 헌신에 의해서 완수하겠습니다!“

자리가 숙연해졌다. 사울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빛나는 영웅의 충실한 아들입니다. 아버지, 나의 맹세입니다!”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 이스라엘

‘빛나는 영웅’에 대해 조국 이스라엘도 계속해서 충실했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평화회담이 진행됐다. 이때 이스라엘이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엘리 코헨의 유해 반환을 시리아 측에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왔다. 한 기자가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에게 그것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이스라엘 정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엘리 코헨의 유해 반환이 회담의 전제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시리아가 엘리 코헨의 유해를 반환한다면, 이는 분명히 평화협정 타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뉴욕타임스'에 의하면 모사드는 2년 전 엘리 코헨의 체포부터 재판, 처형에 관여했던 시리아인들에 대한 정보활동을 강화해 코헨이 찼던 오메가 시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후 18개월 동안 이 시계를 회수하기 위한 작전을 벌여왔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출신 거부(巨富)로 행세하던 코헨은 자신을 철저하게 위장하기 위해 유럽을 자주 드나들면서 사치품을 많이 구입했는데, 이 시계도 그때 샀다는 것이다. 모사드는 스위스에서 코헨의 시계 구입 기록을 확인한 후 그가 생전에 이 시계를 차고 찍은 사진과 확보한 시계에 대한 정밀 감식 등을 통해 3개월 전 이 시계가 코헨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모사드는 코헨의 무덤도 찾고 있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시리아 정부는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엘리 코헨의 유해를 찾으러 침투해 올까 봐 여러 차례 시신을 옮겼기 때문에 정보당국조차 그 소재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스라엘은 엘리 코헨이 죽은 지 53년이 지나도록 그의 유품과 유해를 추적하고 있다. 사방이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너끈히 제압하는 이스라엘의 힘은 바로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이들에 대한 이런 철저한 예우와 보답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대통령이 민족사상 최대의 전란이었던 6.25행사를 외면하고, 국방부는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추모한다면서 ‘순직’ 운운하는 헛소리를 하다가 국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서야 '착오'였다고 변명하는 대한민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입력 : 2018.07.08

조회 : 2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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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 등이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제가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서 세상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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