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끌려간 곳은 소위 ‘먹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비워둔 방이었는데 가끔 징벌을 받은 죄수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문자 그대로 텅텅비어 있는 그 방은 마루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고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아 낮인데도 어두컴컴하였다. 영등포 구치소의 독방처럼 천장은 높고 마루는 길쭉하게 생긴 영점칠 평의 방이었다. 이를테면 마치 좁은 바위틈 공간과 같이 생간 방이다.····(中略)
··· 그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고통이 되었다. 입에선 끊임없이 개처럼 질질 흘려대고 있는 침. 질퍽하게 오줌을 싸놓은 옷. 손을 뒤로 묶여 팔이 없는 사람의 꼴을 하고 있는 지금의 형상이 그들을 놀라게 하고 미치게 하고 말 것이다.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싶었다. 이를테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먼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싶었다.···(中略)
··· 그 때 나는 놀랍게도 내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가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었다. 손목을 죄는 手錠(수정·수갑의 뜻)의 고통도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혹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있는 防聲具(방성구)도 이젠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 마치 여름날 나뭇잎새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방의 애벌레처럼 물렁물렁해진 것을 알았다. 다리나 팔 대신에 빨판 같은 게 끝에 붙어있는 여러 개의 발이 몸통에 달려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내 몸을 완전히 관찰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머리만은 마음껏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 마리의 완전한 그리고 다소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버린 것은 분명했다···(中略)
··· 이 때의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나의 의식은 여전히 벌레로 변해버린 내 몸통의 눈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벌레의 눈을 통하여 마치 열쇠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자신을 완전히 숨긴 채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볼 수가 없다. 이보다 더 안전하고 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김영현은 1977년 11월16일 늦은 가을비가 내릴 무렵, 시위 예비음모 사건으로 김사인(동덕여대 교수·시인·문학평론가), 이을호(전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강금실 전 법무장관 전 남편) 그리고 후배 몇 명과 함께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김영현·김사인·이을호·김태경은 당시 서울대 인문대 74학번 4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들은 나중 사회변혁 운동에 앞장서거나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재야 세력의 핵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해 김영현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8개월간의 수형 체험을 하게 된다. 그가 겪었던 영등포 구치소 독방, 서울 구치소, 안양 교도소의 풍경이 바로 「벌레」를 만든 배경이 됐다. 0.7평의 잊을 수 없는 모진 체험이 결과적으로 작가 김영현의 문학적 상상력을 키웠다.
「벌레」는 김영현의 출세작이자 그의 문학적 잠재력을 활짝 펼치게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89년 『창작과 비평』봄호에 실려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 젊은 평론가(신수정)는 「벌레」를 빗대 ‘이성적 인간이 억압하고 배제해온 무의식의 저편을 되살아나면서 90년대 문학이 시작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민중문학이 가지는 작가의 작위성, 과도한 이념집착, 형식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80년대 민중문학과 크게 대별된다. 벌레취급을 받은 감방 경험을 얘기하고 있지만, 또 감방 경험을 통해 독재 권력의 무자비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제의식에 깊이 천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주의에 가까운 묘사력과 문체의 세련감, 모도 드라마 같은 1인칭 서술이 더해져 독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느낌을 준다. 극단적인 공포경험이 우스꽝스럽고 희화될 정도다. 이것이 80년대 문학에서 「벌레」가 차지하는 위상이다.
---
작중 ‘나’는 카프카의 벌레처럼 ‘먹방’이라고 불리는 0.7평의 독방에서 벌레 같은 경험을 한다.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긴급조치 9호 위반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참 재수 없었던 사건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박정희 정권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 조기선거를 실시한다는 얘기를 듣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사실 투쟁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 겁이 많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언젠가 시위를 할 때도 누군가 내 손에 짱돌을 쥐어주었는데 나는 것것을 끝내 던지지 못하고 책상머리에다 곱게 모셔둔 일도 있을 정도다.
‘내’가 감방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자 먹방에 가둔다. 얼굴에 방성구가 채워지고 손은 뒤로 묶여졌다. 침이 앞섶에 누렇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줌을 참을 수 없다. 교도관에게 하소연 했지만 그는 냉담하게 돌아선다. ‘나’는 분노와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오줌을 옷에 싼다.
뜨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오줌은 곧 척척하게 푸른 수의의 바지를 적시고 사타구니를 타고 엉덩이께로 하여 바닥으로 흘러갔다. 그런 상태로 한참 동안 오줌을 누었다.
하지만 배설의 느낌은 ‘나’를 한 마리의 벌레로 만들었다. 수치도 사라지고 손목을 죄는 수정의 고통도, 입을 틀어막고 있는 방성구의 괴롬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의식은 벌레로 변해버린 몸통의 눈 속에 들어가 마치 열쇠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외친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볼 수가 없다. 이보다 더 안전하게 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