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의동 2세 백송’ 세 그루, 새 친구 ‘창덕궁 백송’ 맞이할까 : 월간조선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는 작은 명소가 하나 있다. 1990년 폭풍으로 쓰러진 천연기념물 백송(白松)터다. 이른바 ‘청와대 백송’이라 불린 이 나무는 키만 16m에 달하는 300년 수령의 거목이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각계 인사들은 백송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썼지만, 3년 뒤 고사(枯死)한 후 지금은 밑동만 남아 있다.

중국 북경이 원산지인 백송은 자라면서 껍질이 벗겨져 백색 또는 회백색을 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릴 때는 푸르스름한 잿빛을 띠다가 차차 껍질이 벗겨지면서 하얗게 된다. 흰빛으로 얼룩덜룩한 무늬가 녹색 잎과 조화를 이뤄 한국에서는 정원의 관상수로 애용됐다. 중국의 경우 건축재로 사용하거나 종자의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쓰기도 한다.

당시 통의동 백송을 가꿔온 인근 주민이 있었다. 동네에서 ‘백송 할머니’로 알려진 홍기옥씨다. 홍씨는 1970년대 통의동으로 이사 온 뒤부터 백송의 품위 있고 영험한 자태에 흠뻑 빠졌다. 여름날엔 그늘 밑에서 쉬고 명절에는 나무 밑에서 주민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을 정도로 정이 깊었다. 그는 아끼던 백송이 쓰러지자 일본까지 건너가 살릴 방도를 직접 배웠다. 매번 물과 영양제를 주고 손수 관리했다. 백송은 끝내 소생하지 못했지만 홍씨의 정성 어린 이야기는 마을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런 홍씨에게 최근 고민이 하나 생겼다. 백송의 2세 묘목 관리 때문이다. 그는 백송이 죽을 당시 가지 네 개를 잘라 밑동 옆자리에 심었다. 지금은 어느새 번듯한 나무들이 된 ‘2세 백송’ 네 그루는 소유주가 각각 다르다. 홍씨, 문화재청, 서울시청, 종로구청이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런데 2015년 여름, 고사 상태가 온 홍씨의 백송이 수해까지 입어 쓰러지게 된 것이다.

1993년 4월 서울 종로구 통의동 주민 홍기옥씨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선물할 백송을 손보고 있다. 사진=조선DB

당시 홍씨는 기존의 2세 백송 한 그루가 뽑힌 빈자리에 ‘새 친구 백송’을 심으려 했다. 본인이 10여 년 전 창덕궁 비원에 따로 심어둔 백송 한 그루를 옮겨와 심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소관부서인 종로구청 공원녹지과는 불허 통보를 전했다. 토지 사용 문제와 식수(植樹)할 면적이 협소하다는 점이 이유였다. 녹지과 관계자의 말이다.

“당시 네 주(柱) 중에 한 주가 고사 상태가 있어서 저희 쪽에서 ‘나무병원’이라는 전문단체에 의뢰를 했었습니다. 그때도 거의 다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나마 약품 처리도 하고 기울어지지 않게 지지대도 설치했지만 살아날 기미가 없어 철거했습니다. 홍 할머니가 인생을 바쳐 키우신 거라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뒤에 주민들 회의를 거쳐서 ‘할머니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생육 환경에 무리가 없게 세 주 정도로 관리하자’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물론 할머니가 심은 창덕궁 백송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옮겨와 심고 싶다는 그분 뜻도 압니다. 그렇지만 거기(통의동 백송터)가 (할머니) 사유지도 아니고, 생육 환경을 따져봤을 때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백송에 반평생을 바친 홍씨는 물러설 수 없었다. 2세 묘목 한 그루가 떠난 빈자리를 그대로 두기가 너무도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노구를 이끌고 종로구 환경과, 녹지과, 감사과에 민원을 수차례 제기했다. 종로구가 막히자 서울시청에도 찾아갔고, 내친김에 청와대도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1990년 당시 홍기옥씨가 백송의 잎을 씻어주기 위해 물을 뿌려주고 있다. 사진=조선DB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은 민원 제기 과정에서 병까지 앓았다. 그럼에도 몸의 아픔보다, 사라진 2세 백송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허망함이 그에게는 더 큰 슬픔이었다. 잘려나간 백송 원목과 2세 묘목들을 지켜온 그만의 ‘사연 깊은 고집’이었다. 홍씨의 말이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 계실 때 청와대에다가도 진정서 넣었고, 서울시에도 탄원서 넣었어요. 작년 가을에는 종로구 민원실장에게 수차례 전화를 했어요. 구청에 들어가기도 몇 번 들어갔고. 그랬더니 ‘잘되겠죠’라는 말만 돌아왔어요. 그 백송 신경 쓰느라, 제가 재작년 12월 25일 구급차 타고 서울아산병원 가서 수술까지 했어요. 동네 주민들이 ‘할머니 그러다가 나무고 뭐고 쓰러지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살았을 때 다시 심지를 않으면, 저거는 고작 세 그루밖에 서 있지를 못해요. 그래서 제 어미(통의동 백송)한테서 받은 그거(창덕궁 백송)를 심겠다는 거예요. 이 백송들에는 제 20년 손때가 묻어 있어요. (나무 관리를 위해) 1억 원 가까이 바치기도 했어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아요. 다시 심을 수만 있다면...”

폭우로 쓰러질 당시의 통의동 백송. 사진=조선DB

홍씨의 정성 어린 오기가 통한 걸까. 식목일인 어제(지난 5일), 종로구청에서 새 소식이 들려왔다. 구청 측에서 오는 9일 홍씨와 함께 통의동 백송터를 들러 생육 환경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녹지과 관계자는 “최근에 할머니가 다시 구청에 오셔서 함께 말씀 나눴다”며 “할머니 말씀대로 한번 (현장을) 확인해 보고 (창덕궁 백송이)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다 같이 살펴보려고 한다. 할머니 친한 지인도 함께 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3년 동안 길고 긴 홍씨와 구청 측의 줄다리기가 끝나게 될까. ‘백송 할머니’의 염원은 비로소 이뤄질 수 있을까. 통의동 2세 백송들이 ‘새 친구’를 맞이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글=신승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