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4일 열리기로 한 남북정상회담 실무회담을 하루 연기하자고 통보해 왔다. 지난 두 차례 정상회담의 전례로 미뤄보아, 오는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도 정해진 날짜에 열리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도 북한의 요구에 따라 당초 열리기로 한 날짜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두 달 정도 연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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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김은성 국정원 2차장(오른쪽). |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성사된 정상회담은 원래 6월 12~14일까지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를 봤었다.
그런데 6월 11일 당시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남북정상회담이 6월 12~14일에서 13~15일로 하루 연기됐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2012년, 김대중 정부서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을 지낸 김은성씨는 회담 연기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월간조선》 2012년 2월호 보도 내용의 일부다.
<그날이 2000년 6월 10일인데,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나러 방북하기로 한 6월 12일(월) 전 토요일이었습니다. 6월 10일은 국정원 창설 기념일이고 직원들은 오전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하였고, 저는 오후에 골프를 쳤으므로 기억이 또렷합니다.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운동장 스탠드엔 임동원 국정원장, 권진호 해외담당 차장, 그리고 병중(病中)이던 국내담당 차장을 대리한 제(당시 대공실장)가 앉아 있었습니다.>
김 전 차장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가 오전 10시30분쯤이었는데, 운동장을 가로질러 김보현 제5국장이 황급히 임동원 원장과 차장 일행들을 찾아왔다고 한다. 김보현 국장은 남북정상회담 준비 업무를 맡고 있었다. 김 전 차장은 “김 국장이 문서 한 장을 임 원장에게 건네면서 당황한 말투로 ‘정상회담 못 하겠다고 합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수금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평양에 올 수 없다는 글"
<원장도 문서를 읽더니 안색이 변해요. 일어서면서 ‘차장들 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청 원장실로 옮겼습니다. 여기서 원장이 한 페이지짜리 문서를 회람시켰습니다. 북에서 보낸 전문이었는데, 두 문장 정도 되었습니다. ‘나머지 돈을 다 줄 때까지 회담을 연기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컨대 수금이 완료되지 않았으니 평양에 올 수 없다는 협박조 글이었습니다.>
김은성 전 차장의 주장을 정리하면, 북한은 자신들에게 건네질 돈이 다 남한으로부터 다 넘어오지 않자 이를 빌미로 회담을 연기했다는 것이었다. 김 전 차장은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 하루 전에 돈을 보내지 않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겠다는 전문(電文)을 보냈다”며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라고 비판했다.
2007년엔 수해를 이유로 연기
2007년 10월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도 당초 예정된 날짜보다 두 달여 후에 열렸다. 당시 김만복 국정원장은 그해 8월 2~3일 비밀 방북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만나 8월 28~30일 평양에서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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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8월,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김만복 국정원장(좌)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우). |
북한은, 정상회담을 열흘 앞둔 8월 18일, 수해를 이유로 돌연 회담 연기를 통보해 왔다. 결국 남북은 10월 2~4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날짜를 변경했다. 당시 통일부와 북한 매체들은 수해가 심각하다고 전했었다. 통일부는 8월 14일 “대동강 범람으로 능라도 5·1경기장이 침수됐다”는 보도자료도 배포하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21일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은 “아리랑 관람을 위해 매일 수만 명의 근로자와 학생, 해외동포, 외국인들이 능라도 5·1경기장으로 찾아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리랑은 북한이 자랑하는 대규모 집단 공연으로,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체제선전을 위한 중요한 선전수단인 아리랑 공연이, 침수된 능라도 경기장에서 열렸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北 매체, 수해 피해 규모 축소하기도
8월 17일 <조선중앙통신>은 “철길 노반 100여 곳의 7만 8000㎥ 유실, 산사태 200여 곳의 6만 2400㎥”라고 보도했다. 사흘 뒤 <조선중앙방송>은 “철길 노반 70여 곳의 3만 5000㎥ 유실, 산사태 64곳의 3만㎥”라고 전했다. 불과 사흘 만에 피해 규모가 약 절반 이상 줄어든 것이다.
‘체제불안을 막고자 일부러 피해규모를 축소한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단 며칠 사이에 전혀 상반된 보도를 한 전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보통 수해가 났을 때 북한은 내부적으로는 축소보도(또는 묵살) 하는 반면, 대외적으로는 지원을 끌어내고자 피해규모를 부풀려 왔었다.
물론 실무회담 차원에서 연기된 것이라 크게 의미부여 할 필요 없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두 번의 정상회담은 우리 정부가 강하게 요청한 측면이 강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미북 갈등에서 코너에 몰린 북한이 직접 우리 정부에 (정상회담을) 제의한 것이라 회담 자체가 연기되거나 결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실무회담 연기에 靑 "잘 모르겠다"
한편 남북정상회담 실무회담 연기에 대해 청와대는 단순한 실무적 문제로 판단, 연기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복수의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4일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실무회담을 연기한 배경에 대해 “잘 모르겠다”면서도 “실무회담 자체에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는 요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어 “(북한 내부의) 실무적인 문제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