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반에서 '미투(me too)' 운동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제34회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앞둔 주말인 3월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여성대회'가 열렸다. 이번 대회는 전국적인 미투 열풍 속에서 열린 대회여서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28개 여성단체가 모인 '한국여성단체연합'과 '3·8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4회 한국여성대회 조직위원회'가 개최한 이날 한국여성대회에서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미투 고백'이 줄을 이었다.

교수와 경찰관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같은 조직 상사에게 당했다는 피해 증언이 줄을 이었고, 초등학교 때 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나오는 등 '보통 여성'의 미투 관련 증언이 봇물터지듯 나왔다.

 

이은선(19) 양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교사로부터 1년에 걸쳐 성폭력을 당했던 일을 고백했다.
이 양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교사였던 A씨는 나의 몸을 만지고 무릎에 억지로 앉히거나 여자화장실까지 들어와 추행했다"며 "다른 선생님은 물론 외부 성교육 교사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교사조차 '설마 선생님이 그랬겠어?'라며 무시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 양은 "100년 전 여성들이 참정권을 요구했던 까닭은 단순히 정치참여를 위해서가 아닌, 정치적·사회적 해방을 위해서였다"며 "청소년도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반드시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남 지역에서 20년째 경찰관으로 근무 중인 임희경씨는 지난해 4월 갓 부임한 후배 여경 B씨로부터 '상사에게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B씨를 도와 가해자인 C순경을 고발했다.
하지만 임씨에게 돌아온 것은 냉대와 보직이동이었다. 임씨는 "B씨를 도와 문제를 해결했지만 오히려 지구대장은 '너 때문에 성과점수 꼴찌를 받게 됐다'고 질책했고, 가해자 C씨는 나의 신상정보를 경찰조직 전체에 유포하고 나를 '꽃뱀 여경'으로 몰았다"고 폭로했다. 임씨는 결국 보직을 이동해야 했다.
임씨는 "저는 지금 제 경찰 인생을 걸고 대한민국 경찰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1인 시위를 펼치고 있다"며 "제가 사랑하는 경찰이 진정한 민주조직으로 바뀌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진보정당 조직에서 일했다는 18세 이아란 양은 "정당 활동을 하던 당시 정당 내 간부가 같은 여성 정당원의 외모를 비하하는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며 "문제점을 공론화하기도 하고 이를 비판했지만 오히려 정당은 '당을 위해 의견을 덮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나를 비난했다"고 폭로했다.
이 양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진보정당이 오히려 미투운동을 조롱하고 음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며 "우리도 운동권이나 투사이기 전에 같은 사람이다"라고 강조했다.

평론가이자 공연기획가인 남정숙 전 성균관대학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도 20년간 받아온 성폭력과 성희롱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남 교수는 "교수도 성폭력을 당하겠냐고 하시겠지만 저도 많은 성폭력을 당해왔다"며 "20년을 넘게 공부해 교수가 됐지만 여전히 성폭력의 피해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과장이 되면 부장한테 당하고, 부장이 되면 전무한테 당하고, 사장이 되면 회장에게 당하는 것이 우리나라 여성들"이라며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남 교수는 "미투는 권력형 성폭력의 전형"이라고 규정하면서 "권력형 성범죄는 절대 가해자의 처벌로 끝나는 게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매년 3월 8일 돌아오는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둔 여성단체들은 이날 '3·8 여성선언'을 통해 "촛불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여성들의 외침은 이제 '미투'를 통해 양성이 평등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성평등이 빠진 민주주의는 여성들에게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차별과 동조, 침묵의 구조가 문제"라면서 "여성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세상은 끝났고 여성들은 남성 중심 사회구조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날 한국여성대회에서는 지난 2013년 불거진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를 도왔다가 업무상 불이익 조치를 받고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박모씨가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여성대회에 축전을 보내 "올해 세계 여성의 날은 미투운동 한가운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2차 피해와 불이익, 보복이 두려워 긴 시간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담아준 피해자들에게 경의를 느낀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다시금 성찰하고 있다"며 "정부는 사회 곳곳에 실질적 성평등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젠더폭력에 한층 더 단호하게 대응하겠다"고 약속했다.

 

 

글=권세진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