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지긋시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지다.

끝없이 맑은 소리 천 년을 머금은 채,
따스히 서린 입김 상기도 남았거니,
차라리 외로울망정 뜻을 달리 하리요!

  억새풀 2

바람은 무슨 악연으로
억겁 세월을 갈퀴질하고

돌산은 또 그만한 세월
곧은 뼈로 버티어 왔나

끝없는 대치의 하늘
핏빛 휘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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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艸丁 金相沃 선생의 1주기를 추모하는 책이 「그 뜨겁고 아픈 경치」(고요아침刊)다. 이어령 선생을 비롯, 고인이 生前에 교류했던 문인과 예술인 36명의 추억담으로 채워져 있다.
국어 교과서에 「옥저」, 「청자부」, 「백자부」, 「다보탑」 등이 실릴 정도로 작품의 결이 고왔던 艸丁 선생은 문단에 숱한 일화를 남겼다. 詩人 유재영은 艸丁 선생을 「난해한 전서체 같은 분」, 「목기로 말하면 제기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마치 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고 했다.
詩人 김승규는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일상에서는 자상한 선배처럼 허물이 없으시다가도 문학 이야기나 작품의 시비를 가릴 때는 서릿발처럼 날카롭고 차가우셨다」고 기억했다. 詩人 민영은 「성미가 급하신 듯 다소 말을 더듬으셨지만 넓은 이마에 굴곡이 깊은 童顔(동안),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으시고 감색 상의를 걸친 멋쟁이」로 묘사했다.
艸丁 선생의 고교 제자였던 소설가 이제하는 『하도 열정적인 강의에다 갑자기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교실 앞줄 책상들이 곧 잘 비어 있곤 했고, 교탁 위에 걸터앉은 채 껌을 씹으면서 도연하게 청자 예찬을 하시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교장 선생님과 한바탕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艸丁 선생과 함께 재직했던 이휘문 前 경남여고 교장은 『5·16 군사정변 당시 모든 공무원이 이른바 중국 인민복 같은 「재건복」을 입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지만, 艸丁 선생 혼자 더블버튼의 양복을 멋있게 차려입고 출근하시며 되레 옷차림이 문제라면 파면시키라고 목소리를 높이셨다』고 했다.
艸丁 선생은 「아자방(亞字房)」이란 골동품 가게를 열 정도로 도자기 애호가였다고 한다. 2000만원짜리 전세를 살 때 4000만원짜리 이조백자를 빚을 내 살 정도다. 김상태 前 이화여대 교수는 『가난한 글쟁이가 수천만원짜리 백자를 산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다』고 기억했다. 선생의 맏딸인 김정훈씨가 전한 일화다.
<부산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온 직후인 1964년 마포에다 작은 전셋집을 얻어 살던 때였다. 이 무렵 아버지는 우연히 인사동 어느 가게에서 백자 연적을 보신 후 거의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열에 들떠서 며칠을 힘들게 지냈다. 그 값은 우리 전셋집의 족히 두 배 가까운 거금이었다. 그래서 남한테 넘어가기 전에 眼福(안복)이라도 누려야 한다고 우리를 데려간 것이었다.〉(p190~191)
艸丁의 아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빌렸고 참기름집하는 전셋집 주인에게 통사정을 해서 돈을 빌렸다. 심지어 고리도 마다않았고, 「달라변(당시는 아주 비싼 이잣돈을 그렇게 불렀다)」까지 빌려 백자 연적을 샀다. 艸丁 선생은 드디어 연적을 갖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 왕국의 옥새를 받아 든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艸丁은 예술에는 지나치리만큼 완벽주의자였다고 한다. 한국 詩人 중 자신을 제외하고 阮堂(완당·김정희), 靑馬(청마·유치환), 未堂(미당·서정주)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었고, 주저없이 한국의 「스리 킹(권력의 킹은 朴正熙, 돈의 킹은 이병철, 예술의 킹은 김상옥)」으로 꼽을 정도였다.
무려 30여 개의 아호를 가진 艸丁의 예술혼에 대해 소설가 박경리는 이렇게 고백한다.
「옳은 영혼들이 천대를 받고 추방을 당하고 짓밟아서 쓰레기통에다 던지는 무서운 세태에, 어느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같이 어찌 저 혼자에게만 용기를 주시고 격려를 주셨다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