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3월 29일 경북 안동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열린 제7·8대 영종회(嶺宗會) 회장 이·취임식은 한국의 종가문화 전통이 처한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자리였다.
“400~500년 이어온 종가와 종가문화는 한국 문화의 원형”
영남 유교 문화의 마지막 보루로 불리는 집단이 있다. 대구·경북 불천위(不遷位) 종가의 종손들로 구성된 영종회(嶺宗會)다. 불천위는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구히 모시는 인물을 뜻한다.
그 불천위 종가의 장자들만 모인 영종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종가와 제례, 종택과 문중을 지켜온 전통의 핵심 계승 집단이다. 지난 3월 29일 경북 안동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열린 제7·8대 회장 이·취임식은 이 전통이 처한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자리였다. 이 자리에는 권기창 안동시장, 안동향교 이충섭 전교, 예안향교 이필상 전교와 100여명의 종손들이 참석했다. 언론에서도 손병현 매일신문 기자, 류석호 전 조선일보 기자 등이 함께 자리했다.
이날 행사에서 공유된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종가문화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속 여부는 이제 ‘의지’와 ‘선택’의 문제로 넘어왔다.
“소멸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꽃을 피울 것인가.”
이 질문은 이날 영종회 전체를 관통하는 시대의 화두였다. 분명한 사실은 다시 꽃을 피우자는 목소리였다.
“특히 종부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
제7대 회장을 맡았던 이목 회장은 이임사에서 감사와 겸손의 뜻을 밝혔다. 그는 “바쁜 가운데도 이·취임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준 내외 귀빈과 회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며 “영종회 설립 이후 처음으로 외부 인사를 모시고 뜻깊은 행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집행진과 회원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자신의 임기에 대해 “회원들의 협력과 성원으로 소임을 맡아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특히 종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종부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며 “참석자 모두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한다”고 이임의 말을 맺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이성원 신임 8대 회장은 취임사에서 종가가 직면한 구조적 위기를 짚으며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는 “최근 영종회 내부 연수와 토론에서 종손들의 고민이 한꺼번에 표출됐다”며 “종가 재산과 종중 재산의 갈등, 제사와 묘소 관리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고 밝혔다.
특히 “아내가 제사를 거부하는 사례까지 나올 정도로 전통이 일상에서 흔들리고 있다”며 “이는 특정 종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어 “과거에는 문중이 종가를 보호했지만 이제는 종가가 문중을 감당해야 하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종손과 종부의 삶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종손이 장가가기 힘들다’고 합니다. 이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 속에도 종가의 어려움이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습니다. 종손, 종부 삶의 무거움에 종가 변화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그는 변화의 방향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내놓았다. “보수적 변화냐, 진보적 변화냐는 각 종가가 처한 현실에 따라 다르겠지만, 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며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임기 동안 변화의 초석을 놓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종가 문제를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종가 문제는 종손·종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 씨족의 문제이자 나아가 지역사회와 국가 전체의 관심사”라고 규정했다.
이어 종가문화의 가치에 대해 “400~500년 이어온 종가와 종가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우리만의 ‘K-종가’”라며 “문화의 원형, 바로 의식주(衣食住) 문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 강국은 곧 문명 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경북 지역 종가의 독자성을 강조했다. 그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과 쌍벽으로 불리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경우를 언급하며 “경남이나 경기 지역에서는 종가와 종손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희미하지만, 경북은 여전히 불천위 종가 전통이 살아 있는 지역”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이(李珥·1536~1584), 윤선도(尹善道·1587~1671) 등의 종가 사례를 비교하며 “다른 지역과 달리 경북은 종가문화가 집적된 독특한 문화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듯, 경북의 종가 역시 국가적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종가 앞에는 가난과 임무만 남아 있고, 종손과 종부는 거의 홀로 그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 역시 혁신을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다”
이 회장은 영종회의 역할을 ‘해법 제시 조직’으로 규정했다. 그는 “영종회와 종가문화연구원이 함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해 단기 과제와 장기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며 “특히 묘소 관리와 제사 문제에 대해 임기 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 전통의 본질에 대한 성찰도 강조했다. 그는 “문화는 필요할 때 유지되고 필요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며 “전통 역시 혁신을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해법의 단초를 선현들의 가르침에서 찾았다. 보백당 김계행(金係行·1431~1521)의 “묘소에는 이름만 비석을 세우라”는 유언과 퇴계 선생의 “장례는 현실에 맞게 하되 옛 법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말을 언급하며 “허례허식을 버리고 본질을 지키라는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이어 영종회의 지향으로 ▲군자의 모임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직언의 전통 ▲민중과 괴리되지 않는 자세를 제시하며 “여민동락과 적선의 정신으로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종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회장은 권한을 가진 자가 아니라 ‘일을 맡아 보는 사람’, 즉 유사(有司)”라며 “겸손한 자세로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안동, 정신 문화와 놀이 문화, 음식 문화가 공존하는 한국 문화의 1번지”
권기창 안동시장은 영종회의 역사적 의미와 종가문화의 미래 비전을 함께 제시해 큰 박수를 받았다.
권 시장은 “오늘 이 자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영종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 방안을 다시 다짐하는 자리”라며 참석한 종손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권 시장은 경북 지역이 지닌 정신적 전통을 강조했다.
“경북인은 화랑 정신, 선비 정신, 새마을 정신, 호국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정신의 창으로서 길을 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종손 어르신들이 바로 그 중심에 서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또한 우리 안동은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한국인,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서 사유와 성찰의 정신 문화와 재미와 감동의 놀이 문화, 그리고 이야기와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한국 문화의 1번지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안동을 한국 문화의 1번지로 만들어주신 분이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입니다.”
권 시장은 이어 종가문화의 미래 과제를 제시했다.
“이제 우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종가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시킬 수 있는 그러한 준비를 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안동시가 든든한 후원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유교가 도리를 밝히고 불교가 자비를 밝히듯”
임강사 주지 지현 스님은 축사에서 종가 전통의 의미와 미래 방향을 함께 짚었다. 그는 먼저 “영종회를 이끌어 온 이목 회장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이성원 신임 회장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밝혔다.
지현 스님은 이성원 회장과의 오랜 인연을 언급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깊이 스며드는 종손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고 했다. 이어 종가와 사찰의 관계를 설명하며 “한쪽은 예를 지키는 집이고, 한쪽은 마음을 닦는 도량이지만 그 본뜻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유교가 도리를 밝히고 불교가 자비를 밝히듯, 결국 두 길은 사람을 바르게 세우고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하나의 길로 이어진다”며 유교와 불교의 공통된 지향을 강조했다. 또 “공경과 자비, 예와 수행이 함께할 때 삶이 온전해진다”고 덧붙였다.
지현 스님은 영종회의 성격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영종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시간을 잇는 다리이자 사람을 잇는 길이며, 살아있는 전통의 자리”라고 규정했다.
전통의 방향에 대해서는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흐르지 않는 물은 썩고 흐르는 물은 맑아지듯, 전통도 지키기만 하면 굳어지고 흐르게 해야 살아난다”며 “이제 영종회는 과거를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전통 속에서 숨 쉬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살아있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가는 문중과 역사를 이어온 핵심 기반”
이날 행사에는 주호영 국회 부의장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대구시장 경선 국면 속에서도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 일정까지 미루고 안동을 찾은 그는 이성원 회장의 연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주 부의장은 “그동안 짐작만 했지 미처 알지 못했던 종가의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됐다”며 “오늘 연설은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종가의 의미를 강조했다. “족보는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중심인 종가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며 “종가는 문중과 역사를 이어온 핵심 기반”이라고 했다.
또 “기회가 된다면 종가와 종손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며 “종가문화가 K-문화의 중요한 자산으로 이어지고 되살아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자신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서는 “현재 절차가 진행 중이며 결과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며 “대구·경북이 정치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전통은 고여 있는 유산이 아니라…
안동에 모인 종손들은 이날, 과거를 회고하기보다 현재를 직시했다.
전통은 더 이상 당연하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이다. 종가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지켜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그날 국학진흥원에 울려 퍼진 말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통은 고여 있는 유산이 아니라, 흐를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