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세지보살도〉. 사진=삼례책마을 책박물관
접혀 있던 신(神)이 펼쳐진다.
천 위에 그려진 채 수백 년을 '신들의 땅' 라싸(Lhasa)의 어느 사원 서고에서 잠들어 있던 탕카 46점이 전북 완주 삼례책마을 책박물관(관장 박대헌)에 도착했다. 3월 20일부터 6월 21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히말라야가 품은 불심: 18~19세기 티베트 탕카전〉이다. 참고로 역대 달라이 라마의 거처였던 포탈라궁이 있는 곳이 라싸다.
탕카(Thangka)는 들고 다니는 신전이었다. 비단이나 면포에 그린 세로로 긴 족자 형식의 불화(佛畵)로, 상하에 나무 봉을 달아 의례 때는 벽이나 기둥에 걸고, 이동할 때는 말아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유목의 땅 티베트에서 사원은 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화승들은 신을 천 위에 그려 말았고, 수행자들은 그것을 안고 이동했다. 의례가 시작되면 펼쳐 걸었고, 끝나면 다시 말아 길을 떠났다. 신이 이동하는 종교, 신앙이 접히고 펼쳐지는 종교—탕카는 그 몸짓 자체였다.
이번 전시작들은 18~19세기 라싸에서 활동한 전문 화승들이 엄격한 도상 규범에 따라 제작했다. 동일 사원 소속 화승들의 손끝에서 나온 덕분에 화풍과 안료, 구성 방식이 46점 전체에 걸쳐 놀라울 만큼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 일관성이 오히려 낯설게 빛난다. 일관성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한 사원의 교학 전통과 신앙 체계가 화면마다 각인된 결과다.

〈약사여래도〉

〈관음보살도〉

〈라마조사도〉
전시의 중심은 46점이 이루는 도상의 스펙트럼이다. 〈약사여래도〉(79.5×59㎝)는 청색 신체에 약초와 보주를 두 손에 나눠 쥔 여래 그림이다. 치유의 원력이 색으로 굳어진 형상이다. 상단에서 공양 비천이 좌우 대칭으로 떠내려오고, 청색 배경 위의 적·금색은 서늘하면서도 뜨겁다. 〈관음보살도〉(81×57㎝)는 다비(多臂), 여러 손이 압권이다. 한 손은 합장, 다른 손엔 연화 가지, 머리 위 작은 화불이 조용히 신원을 밝힌다. 하단의 수면은 정토를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대세지보살도〉(81×57㎝)는 본존과 협시 보살이 연화 가지를 사이에 두고 수행과 공양의 관계를 말없이 가시화하는 삼존 형식이다.
이 가운데 결이 다른 작품이 하나 있다. 〈라마조사도〉(83.5×57㎝)는 특정 고승의 초상이 아니다. 삭발한 승려형 본존이 연화대 위에 앉아 보주를 들고, 하단 양측에 시자가 배치된 이 그림은 인물이 아니라 관계를 그린다. 라마와 수행 공동체 사이의 위계, 그 조용한 질서가 화면의 진짜 주제다.
여래도와 보살도 외에도 전시에는 마하칼라와 같은 호법신 도상, 타라보살도 등 티베트 불교 신앙의 다층적 세계가 펼쳐진다. 광물성 안료가 발하는 색은 수백 년이 지나도 바래지 않았다.
군청·주홍·녹청 위에 금니로 마감한 윤곽선, 방사형으로 뻗는 광배의 선묘—그 앞에 서면 히말라야와 한반도의 거리가 갑자기 좁아지는 감각이 온다. 중앙 본존을 세우고 좌우에 협시를 배치하는 구성 원리는 한국 불화와 같은 문법이다. 다른 산, 다른 언어, 그러나 같은 배치—불심의 지형도는 생각보다 넓고 또 가깝다.
지난해 〈도석화와 서왕모: 19세기 중국 민속신앙의 미학〉에 이은 연속 기획이다. 동아시아에서 히말라야까지, 신앙의 시각적 계보를 2년에 걸쳐 잇는 두 번째 장이 완주에서 펼쳐진다. 박대헌 관장이 이끄는 삼례책마을 책박물관의 기획력이 다시 한번 주목된다.
입장료는 없다. 완주책박물관 제2전시관. 063-291-7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