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새워 시를 쓰고
시집을 펴낸 시인의 정성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누군가 함께 시를 읽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리뷰를 쓴다.
제사에 대해
“열 사람 점심은 혼자 할 수 있어도 한 위 제사는 혼자 못한다”는 부담감 가득 안은 제사 드는 날
제사 모시기 전의 마음가짐과 제사상 차림과 제사 모신
후에서도 오로지 후손 잘되기를 바라는 맘은 경전(經典) 지어
커가는 아이들 조상에 대해 자연스레 눈 공부시키며, 정성 다하는 모습으로 경건하게 다가서게 했지
제사 드는 날 머리 감으면 부모님 초상에 비 만난다
제사 드는 날 머리 감으면 부음 받는다
제물 값 흥정 않는다. 제물 장만하며 간 안 본다
콩나물은 곧은 것을 쓴다 : 꼬불꼬불하면 후손들 삶이 꼬여 고생한다
실과 굄질하며 속을 꼭꼭 채워라 : 속 꼭 찬 후손 난다
밤친 보풀과 껍질은 대문 가운데 두고 버린다: 아들과 딸이 고루 잘되라고
제사 드는 날 고기 먹으면 자손 총기 없어진다 : 조상 보다 먼저 먹는 것 경계
제삿밥은 높은 곳에 올렸다가 먹는다 : 후손들 높은 사람 되라고
제상 아래 똥 싸는 아도 있어야 그 집 흥한다
밤 쳐서 담근 물 마시면 마른버짐 안 핀다
배 껍데기 먹으면 귀 민다
제사에 올린 삼수(숭늉) 먹으면 마른버짐 안 핀다
“남의 집 제사 가서 감 놔라. 배놔라. 깎아놔라. 굴러 간다” 불협화음 종종 담 넘던 시절 이야기가 가문마다 다른 격식 가가예문(家家禮文) 두 눈 번쩍 띄워 성균관 의례 정립 위원회 발표문 주시한다
유교에서 제일 덕목인 효에는 웃어른 공경하라는 의미 만 있는 것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꼭 지켜야 하는 근본이 있음이다
“부모님 추모하는 맘으로 돌아가신 부모님 생신에도 고기(육류) 안 먹었다”는 말 모두 실천하지 못해도 돌아가신 날 인연법 펼쳐 부모님 기억하며 간소한 정성 표하는 것이 그리 어렵기만 할까?
“제사 끝날 때쯤 첫닭 우는 것이 제일 제사 잘 지낸 것이다”란 말일랑
종일 동동촉촉하던 긴장감이 스르르 녹은 시간처럼 흘려보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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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 수첩 정리하며
살길 찾아 도회지 향하던 친척들 이삿짐
신작로 오를 때마다 하얗게 언 아부지 눈물
사연 줄 하나 보탤 때처럼
링거 줄 뜨겁게 달구는 아부지 눈빛
적막 깨고 급히 문지르는 안부
연명치료 거부하는 것인지
마무리 못한 생각 이어가시는 것인지
알길 없어 안개 속 막막한 걸음 옮긴다
오로지 식솔들 굶기지 않으려
산간 개간하며 천수답 가꾸던 노력들
뒤돌아보고 수정 보완할 겨를 없이
내달리기만 했던 시간 속
늙은 농기구 긴 하품 싸늘한데
주렁주렁한 호스들 검푸른 혈관 불러
알 수 없는 처방전 요구한다
뜨거운 눈물로 빈 가슴 둥둥 쳐
전하시는 당신의 생각 알 길 없어
마른 땅에 먼지 일으키는 안타까움
작은 위로 드리려 사부곡 썼는데
한시(漢詩) 아니라 품격 떨어진다는 말씀 미루고
일헌(逸軒) 종손*께 보내
격려의 말씀 들었노라 사리니
교류 많으셨던 분들 주소 줄줄 나열하시어
추우에 집배원 산골 나들이시켰는데
아뿔싸
빈손 민망해 반송료 달고 돌아온 시집 받고
차마 붉은 줄 긋지 못하고 V 표시만 하노라니
반 틈만 남은 우인들 주소록 앞
병상의 아부지 거친 호흡 가슴 저며 눈시울 데우네
*일헌 종손: 야성 정씨 15대 정재홍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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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제 시인이 쓴 평설에 따르면 신순임 시인은 청송 명가에서 태어나 경주 양동마을로 시집을 갔다. 시인의 고향인 청송군 파천면 중평리에는 후백제 견훤과 대구 팔공산 전투 때, 왕의 복장으로 위장하여 위기의 왕건을 구하고 죽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12세순인 불훤재 신현(申賢, 1298~1377) 선생의 종택 안분당(安分堂)이 있다.
성리학을 개척한 대학자 불훤재 선생의 직계가 신순임 시인이다. 종택 안분당에서 나고 자란 마지막 세대라고 한다.
조명제 시인의 말이다.
“뿌리 깊은 명가의 종부가 어느 결에 시를 쓰고, 그것도 흔해빠진 시가 아니라, 양대 명가의 전통과 문화, 문화유산과 인물, 고결한 정신의 학덕과 인정(人情), 자연친화와 극직한 효심 등등을 구구절절 연구하고 취재하여, 저력의 시로 형상해 내는지 그 능력이 휘이 가늠할 수 없다.”
기자는 지난달 청송 산불 피해 현장을 다녀왔다. 보광사 만세루가 불 탄 모습을 지켜봤고 시인이 자랐던 청송군 파천면 일대를 둘러보았다. 불 탄 고택들과 재사(齋舍)들, 시꺼멓게 멍든 산과 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으나 넓고 깊은 청송의 풍광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기자도 어린 시절, 제사나 차례 지내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릇에 떡과 과일을 모양을 내어 높이 쌓아 올리는 굄질을 도맡았다. 수저를 챙기고 제사상 차림을 도왔으며 제주와 향을 준비하고 떨리는 손으로 지방을 썼다. 부족한 살림에 제수 음식을 마련하려 허리를 졸라매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시구처럼 ‘제사 끝날 때쯤 첫닭 우는 것이 제일 제사 잘 지낸 것이다’는 도저히 실천하지 못했고 실천할 수도 없었으리라. 시 가득 종부의 삶이 배여 있다. 풍성한 시어와 안목에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나열을 넘어서는 날카로움이 아주 조금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