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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치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특집] ②朴正熙의 下野 계획

“유신 2기 대통령 임기 종료 1년 前에 사표 낼 계획”

고병우  전 건설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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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17년 11월 14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날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동상 기증식이 열렸고, 14일에는 경북 구미와 서울 등지에서도 관련 행사를 개최한다. 작년부터 이어져 온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 시민강좌도 지난달 성황리에 끝났다. 오늘 탄생 100주년 특집을 맞아 《월간조선》이 과거에 다룬 기사들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생애와 리더십을 재조명한다. 필자들은 기자, 전문 학자,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던 관료 등 다양하다. 시대가 증명하고 역사가 인정했던 구국의 지도자 박정희. 그가 지녔던 민족중흥의 신념과 부국강병의 정책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월간조선》 2009년 11월호

[현대사 증언] 朴正熙의 下野 계획

“유신 2기 대통령 임기 종료 1년 前에 사표 낼 계획”

1978년 유신 2기 대통령 취임 직후 김정렴 비서실장과 柳赫仁 정무수석비서관에게 밝혀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南悳祐 당시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에게 한 말)

高炳佑 前 건설부 장관
⊙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수료.
⊙ 농림부 농업개발관,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기획관리실장,
    쌍용중공업·쌍용투자증권 대표이사,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 건설부 장관,
    동아건설·대한통운 회장 역임.
⊙ 저서: <혼이 있는 공무원> 등.
1978년 가을 추수 중인 농촌을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10월 26일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직속 경제연구소(국민경제연구회) 전문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1961년부터 1979년 10·26사태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일했다.
 
  5·16 당시 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이 나라에는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취직할 곳이 별로 없었다. 국민들은 해마다 草根木皮(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었다. 희망도 없고 樂(낙)도 없었다.
 
  1960년 당시 1인당 GNP는 81달러, 수출은 3300만 달러 수준에 불과했고, 해마다 2억~3억 달러의 미국 원조로 먹고사는 신세였다. 농촌에는 게딱지 같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전쟁의 참화가 할퀴고 간 도시에는 판자촌만 즐비했다.
 
  국가지도자나 정치인들은 政爭(정쟁)으로 여념이 없었다. 대학생들은 ‘남으로 오라, 북으로 가자’며 거리로 나왔고, 승려와 초등학생들도 데모로 날을 지새웠다.
 
  때문에 청년장교들이 1961년 5월 16일 미명에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많은 국민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6·25를 경험한 경제학도였던 나는 혁명공약 가운데 ‘反共(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제1항과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제4항에 특히 매료됐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정권을 잡은 직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를 찾아가 국민을 살릴 수 있는 경제정책을 제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때 나이 드신 원로 위원들은 눈치만 보고 있는데, 30대였던 朴東昴(박동묘) 서울상대 교수가 일어나 한국경제의 현황과 정책방향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박정희 의장은 박동묘 교수를 불러 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경제 싱크탱크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때 탄생된 연구소가 국민경제연구회다. 회장은 제2대 국회에서 재정경제위원장을 지낸 홍성하 금융통화위원이 선임됐다.
 
  위원으로는 박동묘 교수를 비롯해 서울 시내 모든 대학의 경제학 교수들이 초청됐다. 박동묘 교수(농림정책 담당), 정영기 전 부흥부 차관(산업 담당), 金正濂(김정렴) 전 재무부 차관(재정금융 담당) 등이 상임위원으로 참여했다. 나는 정영기 산업담당 위원을 보좌하는 전문위원으로 임명됐다. 전문위원을 포함한 연구원은 10명도 안되는 소수 정예 인선이었다.
 
  국민경제연구회는 담뱃갑에서 셀로판지를 제거해 수입을 줄이자는 것에서부터 중소기업 육성정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을 거의 매일 건의했다. 건의한 정책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신바람나게 일했다.
 
  1963년 民政(민정)이양을 앞두고 미국의 대통령경제자문회의와 같은 조직을 헌법기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결과 경제과학심의회의에 관한 규정이 제3공화국 헌법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국민경제연구회 연구원들은 원래 직장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국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申鉉碻 前 총리에게 공무원 훈련 받아
 
경제과학심의회의에 근무할 때 필자가 만든 ‘종합에너지수급전망’과 ‘종합에너지개발계획’.
  나는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일하는 쪽을 택했다. 내가 처음 맡은 자리는 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국 상공정책담당관이었다. 처음에는 별정직 서기관으로 발령났지만, 특별전형시험을 치고 난 후 일반직 서기관으로 재발령이 났다.
 
  경제과학심의회의 산업담당 상임위원은 申鉉碻(신현확) 前(전) 부흥부 장관이었다. 그는 일제시대에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수석 합격, 일본 상공성 사무관으로 임명됐던 수재였다. 그는 광복 후 대구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상공부 공정과장으로 임명되어 戰後(전후) 산업재건에 이바지했다. 이후 상공부 광무국장·공업국장, 부흥부 차관, 외자청장을 거쳐 39세의 나이에 부흥부 장관을 지냈다.
 
  나는 신현확 위원 밑에서 공무원 훈련을 톡톡히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에너지 계획을 세우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신 위원은 나에게 그 연구 책임을 맡겼다. 나는 지시를 받은 지 2년 만에 ‘종합에너지 수급계획과 개발정책’을 완성해 보고했다. 여기에는 제2차 경제개발계획서의 석탄·석유·전력 수급, 특히 수력·화력발전은 물론 원자력 발전계획까지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무부처인 경제기획원이나 상공부가 아닌 경제과학심의회의에 종합에너지 계획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한 것은 신현확 위원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이 끝났을 때, 박동묘 경제과학심의회의 농림담당위원이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서울상대 선배이자 은사였던 그는 농림부 장관이 되자 나를 농림부로 불렀다.
 
  나는 1967년 3월 농림부 조사통계과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나를 부른 박동묘 장관은 3개월 후에 경질됐고, 金榮俊(김영준) 차관이 장관으로 승진했다. 신상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김영준 장관이 나를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농어촌개발공사를 설립하려는데 설립 타당성과 설립방안을 起案(기안)해 브리핑 차트로 만들어 보라”는 지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당초 목표인 7.1% 성장을 넘어서는 8.5% 성장을 달성하자 자신감을 갖고 ‘農工竝進(농공병진)’ 정책을 선포했다.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朴正熙의 농촌개발 철학
 
농어민 소득증대 경진대회에서 사업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에 차트봉을 잡고 있는 사람이 필자.
  농림부의 분위기는 農·水協(농·수협)이 있는데 따로 농어촌개발공사를 신설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상공정책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관의 지시에 쉽게 공감하고 기안을 했다.
 
  김영준 장관을 따라 청와대에 올라가 난생 처음 박정희 대통령께 직접 차트 브리핑을 했다. 다행히 “잘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농어촌개발공사는 연내에 설립을 끝마쳤다.
 
  농어촌개발공사를 설립한 후 농산물의 수집·저장·가공 사업을 위해서는 원료농산물의 집단재배가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실무진이 작성해 둔 농산물 주산단지 사업계획을 명칭과 내용을 보완하여 ‘농민소득증대 사업계획’이라는 이름으로 김영준 장관에게 보고했다. 김 장관은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번 농어촌개발공사 보고 때와는 달리, 우리 일행에게 “앉으라”고 한 후 자신의 농촌개발의 철학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업은 농민뿐만 아니라 어민도 포함하여 농어민 소득증대사업으로 할 것 ▲사업 규모를 키우기 위해 농림부 재원에 국한하지 말고 경제기획원·재무부·상공부 등 경제부처는 물론, 보건사회부·내무부 등 非(비) 경제 부처도 같이 참여하도록 할 것 ▲각각의 사업계획에 참여하는 농어민에게 반드시 일정부분 자기부담을 시킬 것 ▲이를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농특사업)’이라고 부르고 지구마다 코드 넘버를 부여해 ‘코드 넘버 몇 번 사업의 진도’ 하면 모두가 쉽게 알 수 있게 하라는 등의 상세한 지시를 내렸다.
 
  이는 농림부 장관이나 다른 간부들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농어민들이 자금수요가 많을 터인데 농·수협의 자금은 한도가 있으니 시중은행의 돈을 빌려 쓰게 하고 시중은행 자금과 농·수협 자금 간의 금리 차이는 내무부 특별교부금을 사용해 메우라”는 지시까지 했다. 이는 농어촌 개발에 恨(한)이 맺힌 분이 아니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꿈과 애정이 담긴 지시였다고 생각한다.
 
 
  農特사업 시동
 
  농특사업은 내무부와 시·도지사, 시장·군수가 책임을 지고, 농림부는 계획과 지도 및 평가를 하는 것으로 업무분담을 하고 추진됐다. 농특사업의 총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었다. 박 대통령은 농특사업을 이 나라 농어촌을 잘살게 만들 기본계획으로 여기고 2주에 1회씩 바쁜 일정을 쪼개어 반드시 보고를 받고 지도했다.
 
  박 대통령의 지도에 따라 농특사업은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換金(환금)작물을 주로 선택했다. 겨울철에 새파란 상추를 먹을 수 있게 비닐하우스 농업을 권장하고, 양송이를 재배해 수출했다. 키가 크던 감귤나무의 종자를 현재 제주도의 감귤나무처럼 키가 작은 귤나무로 개량했다. 바닷가 바위에 붙은 굴을 따다 먹던 것을 청정 바다 가운데 뗏목을 띄우는 것처럼 망을 짜서 연승식으로 굴을 양식하도록 했다.
 
  농특사업 초기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농민들은 1년이 지나자 너도나도 참가를 희망하기 시작했다.
 
  농특사업 2차년도인 1969년 10월, 나는 각 시·군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전국농특사업경진대회를 개최했다. 가장 성공한 농가로 선정된 河四容(하사용)씨가 단상에 올라왔다. 그는 “머슴살이 7년 동안 한푼 안 쓰고 모은 돈으로 불모지 200평을 사가지고 충북 청원군에서 비닐하우스를 한 것이 성공하여 큰 돈을 벌었다”면서 “대통령 각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致辭(치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을 닦으면서 미리 준비한 원고를 치우고 즉석 연설을 했다.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까 성공하지 않았느냐. 누구나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후일 외국에 ‘Can do spirit’로 알려진 ‘하면 된다’는 철학은 이때 처음으로 제창된 것이다.
 
  1969년 2월 趙始衡(조시형) 농림부 장관은 나를 국장급인 농업개발관으로 승진시켰다. 농특사업 중간보고를 위해 조 장관을 수행해 청와대로 올라갔다. 박 대통령이 나오자 조 장관은 “각하, 고 과장을 국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라면서 내게 “고 국장, 인사 드려”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임자, 벌써 국장 됐어?”라며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어떤 아버지가 자식의 승진을 이보다 더 기뻐할 수 있을까?
 
 
  새마을운동의 태동
 
박정희 대통령이 작성한 ‘새마을운동의 개념과 추진방법’.
  농특사업이 농촌마다 활기를 띠고 있는 가운데 1970년 시멘트가 과잉 생산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멘트업계의 요청을 해결할 겸 이 시멘트를 받아 전국의 3만4000개 마을에 시멘트 200포와 철근 0.5t씩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내무부는 공동우물 파기, 마을 길 넓히기, 교량 가설, 공동빨래터 만들기, 지붕개량 등 10개의 시범사업을 예시하고 마을의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 사용하도록 지도했다. 1년 후 평가교수단이 사업 결과를 평가했다.
 
  1만8000여 개 마을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유용하게 사용해 마을이 몰라보게 발전했다. 나머지 마을에서는 정부 지원을 집마다 나눠 가지고 자기집 부엌을 고치는 등 의미 없이 써버리고 말았다. 대개 젊은 지도자가 있는 마을은 성공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기존의 지원을 성공적으로 사용한 마을만 추가 지원했다. 마을을 자립마을·자조마을·기초마을 등으로 나누어 지원에 차별을 두니, 마을 간에 경쟁이 붙었다.
 
  제2차 5개년계획이 완료되는 1971년 농특사업 제1차 계획도 완료됐다. 농특사업에 참여한 농·어가는 戶當(호당)소득이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을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부터 농림부의 농특사업과 내무부의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새마을소득증대사업으로 통합하여 추진하도록 했다. 1972년 4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개념과 추진방법’을 A4용지 18장 분량으로 정리해 하달했다.
 
  “새마을운동의 원리는 근면, 자조, 협동이다. 스스로 부지런해야 하고 남에게 의타하지 않고 자력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하고 협동정신을 함양해야 한다. 물건은 1+1=2이지만 사람의 힘은 1+1=2+α다. 이 α는 0일 수도 있고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을 같이 놓으면 마이너스, 즉 負(부)가 될 수도 있다. 대개는 사람은 둘이 힘을 합하면 두 사람분보다 몇 배나 큰 일을 해내는 것이다. 이 α는 무한히 클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행동원리를 기초로 새마을운동은, 첫째 잘살기 운동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고살 수 있어야 문화생활도 할 수 있다. 소득증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둘째, 새마을운동은 참여 농어민이 스스로 하는 운동이다. 정부는 앞에서 끌지 말고 뒤에서 농어민이 필요하다고 할 때 뒷받침만 해 주면 된다.
 
  셋째, 지도자를 잘 선출해야 한다. 솔선수범하고 의지가 강한 젊은 지도자를 마을사람들이 직접 선출해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농민 정신무장운동
 
  새마을운동을 농어민 등 전 국민에게 傳播(전파)하기 위해서는 교육자가 필요했다. 정부에서는 가나안농군학교의 金容基(김용기) 교장에게 새마을 지도자교육을 담당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막사이사이賞(상)을 수상한 저명한 농민운동가인 김용기 교장은 “정부가 앞장서서 지도하는 농민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면서 거부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농림부에서 천거한 金準(김준)씨였다. 농협대 교수를 지낸 그는 제자들이 졸업 후 농촌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서울에서 취직자리만 찾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교수를 그만둔 후 개척농장을 개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농장에서 소기의 성과가 나지 않자 농협에 취직, 그무렵 郡(군)조합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준씨를 면접한 후, 바로 농협대학 연수원에 독농가연수원(후일 새마을연수원)을 개설해 새마을교육을 시작하게 했다. 박 대통령은 교육이 잘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연수원을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다 들은 후,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여러 가지 지시를 했다. 그는 새마을연수원의 실질적인 교장이었다.
 
  김준 원장의 농어민 교육철학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했다.
 
  1973년 내가 청와대 경제담당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당직을 하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당직실에 들렀다. 박 대통령은 “고 비서관이 오늘 당직인가. 요즘 우리나라 농촌이 좀 움직이는 것 같소?”라고 물었다.
 
  당시 나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나를 보자 농촌개발이 생각난 것 같았다. 나는 “예. 농특사업지구를 중심으로 농촌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다시 “다른 나라도 이와 같은 농촌운동을 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이스라엘의 모샤브·키부츠운동, 덴마크의 그룬트비히, 일본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 운동’ 등에 대해 말씀 드렸다. 박 대통령은 “그게 새마을 만들기 운동 아니냐?”라고 말씀하신 후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약 1개월 후 박 대통령은 光州(광주)에서 ‘새마을운동 선포식’을 대대적으로 가진 후, 새마을 정신교육장소를 수원의 새 건물로 옮겨 지도급 인사들부터 1주일씩 합숙훈련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농촌에서 불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도시로, 학교로, 직장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0월유신이 나온 이유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시찰 중 시골 아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판자들 가운데는 “새마을운동이 유신체제의 기반을 강화하고 확산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 이전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농촌사랑을 지켜봐 온 나는 새마을운동이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늘 생각하고 공부하고 연구해 온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충정의 산물임을 자신 있게 증언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북한의 對南(대남)도발은 극에 달했다.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닉슨 美(미) 대통령은 소위 ‘닉슨 독트린’을 발표, “미국은 이제 越南戰(월남전)과 같은 아시아 지역의 국지전에 개입하지 않겠다. 自國(자국)의 국방은 자국이 책임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닉슨은 1971년 중공을 방문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1년 8월 남북 적십자회담이 시작됐고, 이듬해에는 7·4 공동성명이 나왔다. 당시 서울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수첩에 적어 온 말만 한번 읽을 뿐 일절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완전히 경직된 자세였다. 그런데 이 회담에 참가한 남한 대표들은 서로 즐거운 표정으로 잡담을 하며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했다.
 
  언론에서는 남북회담은 너무 성급하다느니, 회담 자체가 헌법 위반이라느니 중구난방이었다. 남북회담을 앞에 두고 한쪽은 일사불란한데 이쪽은 중구난방이라, 이런 회의나 협상은 백전백패를 예언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우리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재검토가 필요했다. 대통령 선거제도를 비롯한 헌정질서에 대한 반성도 제기됐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하에서 대통령 후보는 발언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무슨 공약이라도 할 수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金大中(김대중) 후보는 북한과 대등한 입장의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한편,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했다. 훈련에 나와야 하는 예비군들은 우선 좋다고 지지표를 던질지 모르지만, 남침 기회만 노리고 있는 敵(적) 앞에서 무장해제를 하자는 것이나 다름 없는 주장이었다.
 
  1972년 단행된 10월 유신은 남북대화에 대비하는 한편,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고뇌의 산물이었다.
 
  유신을 단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1981년까지 ‘1000달러 국민소득(1인당)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1971년의 국민 1인당 소득은 437달러, 수출액은 11억3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1981년까지 수출은 10배, 국민소득은 두 배 이상 늘리겠다는 목표에 대해 무리한 목표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100억 달러 수출은 목표보다 4년 빠른 1977년에,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는 목표보다 3년 빠른 1978년에 달성했다.
 
 
  1978년부터 下野 준비
 
  이와 함께 종래 경공업 위주의 경제구조가 중화학공업 위주로 탈바꿈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고 있는 전자·철강·자동차·造船(조선)·화학공업의 기틀은 이때 마련된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런 목소리를 마냥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金吉弘(김길홍) 전 의원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중반 유신 반대 세력의 反(반)정부 투쟁이 한창일 때, 사석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야당과 재야의 주장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난들 왜 서구 민주국가처럼 자유와 민주를 구가하는 대한민국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자유와 민주도 먹고살 만한 수준의 국민과 국력을 갖추어야 가능하지요. 나도 나중에 우리 한국을 멋진 민주주의 국가로 키울 꿈을 가진 사람입니다.’”
 
  실제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유신 2기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김정렴 비서실장과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에게 임기 중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생각을 피력한 적이 있다.
 
  “나는 임기 전에 대통령직을 퇴임할 생각이다. 金鍾泌(김종필) 전 총리를 다시 총리로 부른 다음 대통령 임기 1년 전에 사표를 내겠다. 헌법상 잔여임기 1년 내에는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하지 않고 현직 국무총리가 계승하게 되어 있으니 그때 김종필 총리가 맡아서 정국을 개편하면 될 것이다.”
 
  당시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으로 있던 南悳祐(남덕우) 전 국무총리도 최근 펴낸 회고록에서 비슷한 증언을 했다.
 
  “어느 날 대통령과 특보들이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이런 증언들에 비추어볼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통해 終身(종신)집권을 획책했다는 일각의 비난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유신은 남북대화를 앞두고 국론통일을 기하고, 국정의 발목을 잡는 세력을 잠재우고, 능률 제1주의로 경제건설에 매진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한 기간이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G20국가에 진입하고 10대 경제대국, 10대 수출대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입력 : 20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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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몸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2017-11-17)   

    이 한몸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박정희대통령은 우리역사에서 이순신에 버금가는 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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