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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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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 논술·면접 대비 '시사 키워드' 특강③

스푸트니크 모멘트, 웰다잉(well-dying), 메이데이, 유니콘 기업과 데카콘 기업, 바세나 협약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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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로 동반자란 뜻인 스푸트니크(Sputnik) 위성(1)

#32 스푸트니크 모멘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당시인 2011125일 국정연설에서 미국이 현재 처한 처지를 스푸트니크 모멘트(Sputnik moment·스푸트니크 순간)’”라고 정의했습니다.
스푸트니크는 1957104일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쏘아 올린 인류 최초의 위성이지요.
오바마 대통령은 반 세기 전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발사해 우리를 제압했을 때 우리는 달 탐사에서 어떻게 그들을 이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연구와 교육에 투자한 결과, 우리는 소련을 능가한 것은 물론 새로운 산업과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해 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뒤 지금 우리는 스푸트니크 순간에 직면했다고 규정하며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민주당-공화당 간 대권 경쟁이 아니라 나라 밖 경쟁자들과 일자리와 산업 발전을 위한 경쟁이라고 호소했어요. 다른 나라들보다 앞선 경쟁력을 갖지 못하면 또다시 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져들지 모른다는 우려였지요.
러시아어로 동반자란 뜻인 스푸트니크(Sputnik) 위성(1)은 지름 58cm 무게 83.6kg인 금속구()였지요. 이 금속구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에 소련에 대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강대국 간 우주 경쟁의 시발점이 됐어요.
 
스푸트니크 제2호는 1호 발사 한 달 뒤인 113라이카라는 개를 태우고 발사됐습니다. 우주를 나는 첫 생물체가 개라는 사실, 좀 아이러니합니다.
스푸트니크 제3호는 1958515일 발사됐는데 총무게가 1t(1327kg)이 넘었고, 다양한 대기관측 장비까지 갖춰 하늘을 나는 실험실이라 불렸습니다.
소련의 도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1961년 러시아 우주비행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일주했고 1963년에는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인인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를 타고 지구 주위를 48바퀴나 여행했지요.
소련의 라이벌인 미국으로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전까지 소련의 흐루쇼프는 "수소폭탄을 실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은 콧방귀를 꼈지요.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국민에게 위기감을 갖자고 호소했습니다.
미국은 그 뒤 10년간 교육과 우주개발 분야에 예산 배정의 최우선 순위를 매겼습니다. 특히 교육을 다 뜯어 고쳤어요. 20세기 초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사조는 진보주의(Progressivism)’였습니다.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경쟁보다는 협동을 중시하고 아동의 흥미와 욕구를 존중하는 교육, 실생활 중심의 교육을 강조했지요. 이런 분위기는 교육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1859~1952)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행복했지만 학업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느슨할 수밖에 없었지요.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백악관은 진보주의 교육에 실망한 나머지 학문중심 교육과정을 전면 도입하기 시작했지요. 기초교육위원회(The Council for Basic Education)가 결성돼 흥미와 경험보다는 훈련과 노력’ ‘자연과 실생활보다는 교과와 교재’ ‘아동보다는 교사에게 교육주도권을 강조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 교육이 부각되기 시작했지요.
그런 바탕에서 1958년 그 유명한 대통령 직속기구인 미항공우주국(NASA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이 창설됐어요.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5월 의회연설에서 인간이 달에 착륙한 뒤 무사히 귀환하는 계획을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겠다며 아폴로 계획을 선언했습니다.
NASA는 머큐리(1인승 인공위성 발사계획), 제미니(2인승 우주선 발사계획), 아폴로 계획(달에 인간을 착륙시키려는 계획)을 비롯한 많은 우주 탐사 계획을 차례로 진행시켰습니다.
결국 미국은 린든 존슨 대통령 때인 1969720일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켰고, 미국의 구겨진 자존심을 단번에 회복했지요. 이후 1970년대에는 스카이랩(우주정거장 설치계획)을 추진했고, 1980년대부터는 우주왕복선 계획을, 1990년대는 화성 등 행성탐사를 위한 무인 로봇탐사선들을 은하계로 보냈습니다.
 
#33 웰다잉(well-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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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치료 중단이 가능한 경우.
100세 시대, 어떻게 사느냐보다 요즘은 어떻게 죽느냐가 화두입니다. 웰다잉은 아름답고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하자는 말입니다. 웰다잉과 관련된 연명의료결정법은 3년간의 논의 끝에 내년 24일부터 전면 시행됩니다.
 
이에 앞서 지난 119일 보건복지부 산하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의료 현실이나 법의 기본 취지와 동떨어진 연명의료결정법 내용 일부를 수정하라고 의결했습니다.
 
기존 연명의료계획서는 치료해도 근원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말기·임종기 환자만 작성할 수 있도록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엔 환자가 의식이 없어 스스로 계획서를 쓸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죠. 이에 따라 위원회는 수개월 내에 임종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태의 환자도 계획서를 쓸 수 있어야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다며 법 개정을 권고했어요.
위원회는 또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의 대상이 되는 시술의 범위를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뿐 아니라, 범위를 하위 법령에 위임해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범위를 넓혔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안락사도 반대하며, 연명의료 법제화에 대해서도 반대해 왔습니다. 인간 생명이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받은 신성한 것이며, 그렇기에 더욱 책임감 있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해 왔어요.
 
또 법제화에 앞서 호스피스-완화의료 제도 확립과 시설 확충, 병원윤리위원회 활성화, 의료인의 의식교육,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개선, 임종기 환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등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요.
 
학생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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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의 ‘근로자의 날’ 홍보 문구.
#34 메이데이
매년 51일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니 이날은 성()스런 날입니다. 외국에서는 메이데이(May Day)’라고 불러요. 노동단체들은 노동절로 부르기도 하지만 정부 공식명칭은 근로자의 날입니다.
 
메이데이의 유래를 아세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래는 이렇지요.
 
<188651일 미국 시카고에서 하루 16시간 일하던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며 파업을 일으키자 경찰이 발포해 소녀 1명을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누군가 폭탄을 투척해 아수라장이 됐다. 법원은 그 책임을 물어 파업 지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나중에는 이 사건의 기획자가 자본가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그러나 이 일화는 거짓임이 판명 났어요. 특히 폭탄 투척의 실체가 자본가라는 사실은 전혀 진실과 다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1880년대 시카고는, 동부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건너온 노동자들로 북적대는 신생 공업도시였지요. 여기다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물동량(物動量)이 급증, 시카고의 기업가들은 큰 부()를 축적했지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시달렸어요.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은 시카고 북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생활여건이 매우 열악했었다고 해요. 당시 유럽에선 마르크스가 이끄는 공산주의 운동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즘 운동이 융성하던 시기로, 이들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그런 사상까지 흡수됐어요. 시카고는 산업화로 인한 계층 간 사회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이었지요.
앞서 1867년 일리노이주는 미국 최초로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주법(州法)을 제정했었지요. 참다못한 시카고 노동자들은 188551일을 기해 8시간 노동을 내걸고 시 전역에서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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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터진 ‘헤이 마켓’ 사건 당시의 모습. 출처=World Warrior of So Cal
54일 오후 730분쯤, 1500명의 군중이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 마켓이라고 부르는 농산물 장터에 모였습니다. 이날 집회는 전날 있었던 발포 사건(53일 시카고 매코믹 농기구 제작소파업을 진압하던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집회를 주도한 독일 태생의 사회주의자 오거스트 스파이스는 대중연설가로 잘 알려진 앨버트 파슨스를 소개했고, 파슨스는 한 시간 정도 연설을 했지요. 마지막으로 사무엘 필덴이 연단에 올라왔을 때에는 주변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파슨스는 신문 인쇄기술자였고, 스파이스는 독일 출신 노동자를 위해 독일어로 발행하는 아르바이터 차이퉁(노동자 신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필덴의 연설이 끝난 시각은 밤 1020. 청중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이때 176명으로 구성된 시카고 경찰 지대(支隊)가 헤이마켓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경찰 책임자는 해산을 명령했고 그 순간, 폭탄이 날아왔습니다. 놀란 경찰관들은 어둠 속에서 총을 발사했지요.
 
당시 시카고 트리뷴폭탄이 터지자 아나키스트들이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경찰이 응사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은 경찰이 쏜 총탄에 경찰관과 민간인이 맞았던 것이었어요. 총알과 탄피를 분석하면 누가 몇 발을 쏘았는지 알 수 있지요. 이 사건으로 경찰관 7명과 민간인 다수가 사망했습니다.
55일 자 시카고 트리뷴보도 이후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미국 전역의 신문이 가해자들을 처형하라는 사설을 연일 실었으니까요.
11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스파이스와 파슨스 등의 교수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됐습니다. 이에 앞서 독일의 사회당 당수이자, 칼 마르크스의 딸인 엘리노어를 비롯해 유럽의 사회주의 인사들이 앞다퉈 교도소를 찾아왔지요. 시카고의 노동자단체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스파이스는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絞殺)하는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강력해질 때가 올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스파이스, 파슨스는 처형됐고, 필덴은 종신형으로 감형된 뒤 나중 특별사면 됐지요.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추모했고, 1890년부터는 51일을 노동절로 정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뒤 그 사건으로 구속 또는 사형된 이들 모두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폭탄을 투척했을까요? 많은 사람은 폭탄을 투척한 범인이 사건 발생 후 사라져 버린 슈나우벨트나 자살한 다이어 럼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슈나우벨트는 사건이 일어난 그해 57일 체포됐다가 경찰이 실수로 풀어준 뒤 곧바로 도주, 캐나다와 영국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해 살았다고 합니다.
아나키스트였던 럼은 파슨스를 자주 면회했는데 1893년 갑자기 자살해 많은 의혹을 남겼습니다. 그는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지요. 세월이 흐른 뒤 한 학자가 이 사건을 추적한 뒤 폭탄 투척범이 럼이라고 단정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식민지로 있던 192251일 조선노동총연맹 주도로 첫 노동절 행사가 열렸습니다. 해방이 된 뒤에는 대한노총(1946년 창립),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등 좌우익 노동자단체가 발족돼 각각 따로 노동절 행사를 가졌지요. 194651일 노동절 행사는 대한노총 등 우익이 동대문운동장(당시 명칭은 서울운동장) 축구장에서, 전평 등 좌익은 야구장에서 기념식을 열었답니다.
 
정부 수립 후에도 메이데이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승만 정권시절인 1957년에 대한노총 창립일인 310일로 노동절이 바뀌었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1963년 무렵에는 명칭마저 근로자의 날로 고쳤지요.
그러다 1994년에 근로자의 날을 메이데이와 일치하는 51일로 변경했습니다.
기념일이 5131051일로, 명칭은 노동절근로자의 날로 바뀐 셈이지요.
메이데이 명칭을 노동절로 부를 것이냐, ‘근로자의 날로로 부를 것이냐는 여전히 민감한 현안입니다. 노동노동자라고 부르는 개념 속에는 자본가와 투쟁하는 일종의 계급의식이 내포돼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지요. 그래서 박정희 정권 시절, ‘근로자라는 말로 바꾸었지요.
물론, 노동운동계는 노동절이름을 돌려달라는 요청을 진작부터 하고 있습니다. 노동절이란 명칭을 회복시키자는 주장에는 개발독재와 노동운동 탄압의 산물을 청산하자는 속내를 깔고 있어요.
 
#35 유니콘 기업과 데카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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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뿔이 10개 달린 상상 속 동물을 데카콘이라고 부른다.
유니콘은 원뿔 달린 신화 속 동물을 싱장하는 말인데,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 원 이상인 비상장 신생 기업을 그렇게 부릅니다. 2013년 미국 여성 벤처 투자자인 에일린 리가 신생 기업 중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회사를 유니콘 클럽’이라 분류한 데서 비롯됐어요.
 
스타트업이 증권시장에 상장해 자금을 모으기도 전에 기업 가치가 약 1조 원 이상 되는 것은 마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에 따르면 2016년에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은 총 174곳이라고 합니다. 그중 우리나라 기업은 쿠팡옐로우 모바일등 두 회사라고 해요.
 
이제는 유니콘을 넘어 100억 달러 이상 기업 가치를 가진 스타트업을 지칭하는 데카콘(decacorn·머리에 뿔이 10개 달린 상상 속 동물) 기업이라 하는데, 8곳이나 등장했다고 합니다. 스타트업을 꿈꾸는 많은 청년창업가들이 유니콘을 넘어 데카콘 기업으로 성공하길 기원합니다.
 
#36 바세나 협약
바세나 협약은 첨예한 사회적 쟁점의 해결과정에 대한 중요한 선언을 담고 있어요. 이 협약을 이해하려면 네덜란드 병()’을 알아야 하고, 위기를 기회로 돌려놓은 정부와 기업,노동자의 노사정(勞使政) 협력도 이해해야 합니다.
네덜란드는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어요. 급기야 사회복지 혜택에 의존해 살아가는 노동 기피자가 늘면서 실업률이 8~9%대로 치솟고 경제는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에 시달렸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네덜란드를 보며 혼란스러웠어요. 네덜란드 하면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이룬 저력의 나라 아닙니까. 13세기 이래 전 국토의 20% 이상을 간척했던 전설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지요. 게다가 1960년대 어마어마한 천연가스가 발견돼 자원 부국이 됐어요.
그런 네덜란드가 경제난에 빠져 시들시들해져 버리게 됐습니다. 경제학자들은 네덜란드의 경제구조를 연구하면서, 나라의 자원이 산업 발전을 견인(牽引)하지만 때론 그 자원에 기대어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 재앙이 될 수 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네덜란드가 천연가스를 발견한 뒤 외형적인 성장을 이뤘으나 내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사회복지비로 펑펑 돈을 쓰면서 노동자들은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결국 정부재정은 고갈되고 실업률은 급증, 네덜란드 병을 앓게 된 것이죠.
 
이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 자원의 보고(寶庫)가 기회냐, 재앙이냐를 두고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재앙론을 대표하는 조지 소로스는 1960년대에서 90년대의 30년 동안 자원 빈국이 오히려 자원 부국보다 23배 정도 빠른 경제성장률을 보였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한국과 타이완, 싱가포르와 같은 아시아 국가의 경우 그야말로 자원 빈국이죠. 가진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맨주먹 하나로 선진국 문턱까지 올라갔어요.
반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기름값을 올리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많은 사람은 중동 산유국들이 떵떵거리며 잘살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패와 인권무시, 정치경제의 후진적 시스템이 중동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막대한 석유수입으로 안정화 기금을 만들고 국가 인프라와 교육 투자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경제난으로 다른 나라들이 1980년대 이후 국가의 복지예산을 줄일 때도 오히려 이를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노르웨이는 세계에서도 가장 풍요롭고 복지혜택이 좋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세나 협약의 유래를 다시 더듬어 봐요. 천연자원 덕분에 부국이 된 네덜란드는 과도한 사회보장 덕분에 노동기피 현상이 심화되기 시작했어요. 오일쇼크 이후 1981~8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실업자가 매달 1만 명씩 증가해 실업률이 12%로 올라갔고, 1981~83년 사이에 무료 30만 명이 해고되기도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덩달아 사회보장 지출은 급증했습니다. 나라와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지요.
 
네덜란드 노사정(勞使政근로자와 사용자 및 정부)1982년 헤이그 북쪽 바세나에 모여 머리를 맞댔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깎되 근로자를 해고 안 한다는 바세나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또 노조는 임금인상 억제를 받아들였고, 회사는 노동시간을 5% 줄여 고용을 늘리기로 했어요. 여기에 정부도 가세했어요. 네덜란드 정부는 임금인상을 1% 억제하면 10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노동시간을 2.5% 줄이면 24만 명을 추가 고용할 수 있다고 노사 양측을 설득했지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네덜란드는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4~9%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실업률도 낮아졌지요. 사회협약을 통해 실업률을 줄이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회복에 성공한 대표적인 나라로 손꼽히게 됐어요.
네덜란드 특유의 노사화합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입력 : 2017.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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