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29일 오전 서울의 한 대학교 병원에서 환자들이 TV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브리핑을 시청하고 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것은 의사소통 기술에 관한 얘기다. 메시지의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게 아니다. 안세영 선수와 윤석열 대통령 얘기다. 최근 본 중 가장 안타까운 두명이다.
안세영(22)은 한국 배드민턴계에서 보자면 영웅이다. 영웅이 됐어야 했다. 한국에 28년 만에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안겼다. 배드민턴 여자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낭만의 도시 파리를 배경으로 가장 빛났어야 할 순간, 안세영은 깜짝 발언으로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발언의 내용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타이밍과 방법이 잘못됐다. 철저히 안세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금메달이라고 해도 어차피 환희와 축하의 순간은 오래 가지도 않는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기간이 아닐 때 취침을 미뤄가며 배드민턴 경기를 챙겨 볼 일반 국민이 얼마나 될까. 동호인 외에 말이다. 하필, 오래 가지도 않을 영광의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그 순간에 스스로 초를 친 거다. 자신의 성취와 매력을 전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날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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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7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부실한 시스템 문제를 지적한 배드민턴 국가대표 안세영 선수가 귀국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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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도 문제다. 왜 선수가 직접 나서나. 얼마든지 다른 이가 대신 말하게 할 수 있었다. 에이전트나 매니저가 있는게 다 그 때문이다. 하다못해 지인이나 부모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기자가 직접 겪은 일화를 들어볼까. 기자는 언론계에 들어오기 전 스포츠 마케터로 일했다.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 유럽의 최정상 선수들, 스포츠 마케터, 언론인들을 지켜봤다. 미국의 피겨스케이터 미쉘 콴(Michelle Kwan)이 그 중 한 명이다. 콴은 미 스포츠계의 전설이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미국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정상 자리를 지켰다. 넉넉지 않은 경제 사정 때문에 온 가족이 딸들(미쉘 콴과 언니)의 피겨스케이팅 교육 때문에 희생했던 이야기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선 5번이나 1위를 했지만, 올림픽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던 커리어까지 겹쳐져 드라마틱한 아우라를 가진 선수였다. 세계적으로 꺼져가던 피겨스케이팅의 인기를 되살렸다.
기자는 콴의 에이전트 쉡 골드버그와 콴의 아이스쇼 출연 때문에 처음 접촉했다. 협상 과정에서 골드버그는 별의 별 요구를 들이밀었다. 비행기표 좌석 지정은 물론이고, 쇼의 프로그램을 두고도 일일이 지적을 했다. 에이전트와 밀고 당기며 진땀을 뺐는데, 정작 현장에 나타난 미쉘 콴은 환한 얼굴로 아이스쇼에 초대해 줘 고맙다며 감사 편지를 건넸다. 악역은 에이전트가 하고 선수는 좋은 이미지만 보여준 거다. 콴이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 데에도 이런 이미지 관리가 큰 몫을 했을 터다.
안세영도 이렇게 할 수 있었다. 방법은 여러가지다. 이를테면, 소속사나 주변의 다른 이들을 통해 언론에 상황을 알리는 방식도 가능하겠다. 논란은 배드민턴협회 쪽으로 밀어두며 선수는 진흙탕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터다. 그랬다면 지금쯤 안세영 옆에는 ‘세계 최정상’이라는 수식어만이 있었을 거다. 최악의 타이밍과 방법으로 불만을 제기한 결과 안세영의 이름 옆엔 ‘폭탄 발언’이란 단어가 따라다니고 있다.
이후 대응도 마뜩치 않다. 지금 전남 목포실내체육관에서는 코리아오픈이 한참 열리고 있다. 8월 27일 개막해 9월 1일 폐막한다. 세계배드민턴연맹(BWF) 월드투어 슈퍼 500 등급 대회다. 안세영은 부상 치료와 재활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는다. 물론 안 나갈 수 있다. 올림픽을 마친 선수가 뒤이어 열리는 경기에 출전 안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좀 다르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다. 더구나 논란을 감안하면 출전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협회든 뭐든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안방에서 안세영의 세계 수준 경기를 보고 싶었을 한국 배드민턴 팬들을 위해서, 그들 덕분에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는 안세영을 위해 말이다. 몸 상태 때문에 경기 내용이 좋지 않았더라도, 혹은 중도에 포기했더라도 팬들은 안세영의 애정과 의지를 높이 평가했을 터다. 그랬다면 안 선수를 바라보는 일부 국민들의 의구심 어린 시선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안세영의 소식은 배드민턴 코트가 아니라 국회에서 들려왔다. 민주당 문체위원들들과 비공개로 만나 배드민턴협회 및 배드민턴 국가대표팀의 문제점과 처우 등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국민의힘 정연욱 의원을 만나서는 “혹시라도 (협회 측과) 조율이 된다면 또다시 대표팀을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대표팀 활동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왜 또 선수의 입으로 이런 말들이 나오나, 안타까웠다. 정치인을 만나며 언제까지 대화 내용이 비공개로 남을 줄 알았나. 입을 열면 열수록 모순으로 비칠 수 있다. 대중에게는 대표팀 은퇴를 시사했다가 다시 대표팀을 나가고 싶다고 부연하는 걸로 들릴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더 심한 경우다. 어제(8월 29일) 대국민 브리핑을 했다. 직후인 8월 30일 발표된 지지율은 23%(한국갤럽).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66%로 올라갔다. 국민 10명이 모여 정치얘기를 하면 2명은 옹호하고 예닐곱명은 욕한다는 얘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취임 이전으로 돌아간다.
윤 대통령은 2022년 3월 20일, 당선인 신분으로 브리핑을 했다.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직접 역설했다. 지켜보며 무척 의아했다. 당선인 옆에 제대로 된 홍보 전문가가 있기나 한가 의구심이 들었다.
당선인 기간은 국민과의 ‘허니문 기간’이다. 신혼 부부 시절에 쌓은 정과 신뢰는 이후의 갈등과 권태기를 이겨내는 재료가 된다. 국정 운영도 마찬가지다. 당선자 기간에 이미지를 잘 구축해놓아야 이후 국민들의 권태기 시작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심지어 지지층 내에서도 논란이 된 대통령실 이전을 당선인이 직접 설명했다. 정치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선 이때부터 이미 비극이 시작된 거다.
취임 이후로도 대통령은 계속 직접 나섰다. 도어스테핑이라며 출근 길 약식 기자회견을 했다(그건 다행히 그만뒀다).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두고 국무회의에서 직접 발언했고(“뭐가 옳은지 냉정하게 보자” 발언), 지난 6월 3일 동해 심해 석유·가스전에 대한 탐사 시추 계획 승인을 직접 발표했다. 하나같이 도대체 이걸 왜 대통령이 직접 설명하고 있나, 의아스러운 상황이었다.
비극의 정점은 ‘의료개혁’ 논쟁이다. 지난 4월 1일 대국민담화 '의대 증원·의료 개혁,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 이어 어제(8월 29일)도 대국민 브리핑을 했다.
모든 대통령의 말과 행적은 기록되고 두고두고 재평가된다. 기록에 약한 한국이지만 역시 피해갈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의료 개혁 관련 담화는 윤 대통령의 레거시(유산)에 상당히 악영향을 미칠 것 같다. 의대 증원에 대한 찬반을 떠나 논란이 되는 사안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게 문제다. 의료 현장 상황에 대한 설명 등 논란이 될만한 대목들이 많았다. 이런 식의 담화라면 총리나 해당 부처 장관이 나서는게 맞았다.
윤 대통령 책상 위 명패에는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쓰여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주고 간 선물이다. 그 말은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뜻이지, 대통령이 제일 앞에 나와서 설명하라는 게 아니다.
대통령실이 뭔가 오해하고 있나본데, 대통령은 갈등 국면에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학술 연구도 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대통령은 우선 수사적으로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과 이해관계자의 어려움에 이해와 동감을 표현하는데, 이를 상징적 반응성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당면 문제에 관심을 표시하는 행위만으로도 여론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반응성은 대통령의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신현기·우창빈,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나’, <한국사회와 행정 연구>, 2018)
대통령이 들어주는 척만 해도 국민들은 안심한다는 얘기다. 대통령은 어느 한 세력의 대표가 아니다. 이해 세력 모두를 감싸안으면서도 옳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 어려운 자리다. 대통령실 수석이나 관료는 하자고 들면 매달 경질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아니다. 임기 중에도, 임기를 마치고도 한 시대의 대통령은 대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권위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아껴야 한다. 소모해서는 안된다.
안세영의 파리 깜짝 발언을 부추긴 이가 있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자신은 안 나서고 안세영이 대신 나서게 했다는 것이다. 과연 안세영을 위해 그랬을까. 윤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실도 과연 이번 담화가 대통령과 나라에 도움이 됐다고 보는 걸까.
글=하주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