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박상봉 김건희 이종암 홍찬선 시인의 근작(近作)들 : 월간조선

시집 읽는 재미가 솔솔 났다. ‘천 개의 조각마다 천 개의 꿈이 있’다는 시를 읽었고 꽃과 총(塚, 무덤), 별에 대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 ‘꽃과 나무와 숲과 시’라는 부제가 달린 시편들을 달콤하게 외웠으며 문예지에 실린 한 중견 시인의 신작들이 머릿속에 붕붕 떠다녔다.

김건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렌지 낯선 별에 던져진다면》(상상인)은 꿈 퍼즐러의 조각 맞춤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밤에 꾸는 꿈이 달빛과 관련 있다고 가정한다면, 시인은 달빛조각사가 틀림이 없다. 퍼즐러는 달빛조각사다. 이 조각사는 꿈이 있을 법한 조각의 허벅지에 뒤꿈치를 끼워넣어 본다. 조각의 이음새가 딱 맞아떨어질 때까지 반복된 작업이 이어진다. 마치 오스트리아 화가 클림트가 <키스>를 완성할 때 황홀한 눈빛과 달콤한 입에 맞는 수천의 감정을 찾아 그렸듯이 말이다.

조각에 조각을 덧대어 결국 하나의 ‘이목구비 선명한 한 폭의 명화처럼’ 꿈이 완성되길 시인은 꿈꾼다.

김건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렌지 낯선 별에 던져진다면》(상상인)

천 개의 조각마다 천 개의 꿈이 있지

꿈이 있을 법한 조각의 허벅지에

뒤꿈치 끼워 맞추는 것은 모두 비밀

클림트가 키스를 완성할 때

황홀한 눈빛과 달콤한 입에 맞는

수천의 감정을 찾아 그렸듯

합일의 정점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나는 퍼즐러

쉽게 열 수 있는 문을 마주하려

언제 깨어날지 모를 퍼즐 하나가

모서리에 부딪히면 로봇청소기였다가

입김 불면 금세 성에 낀 유리창이 되지

주름 조각에 또 하나를 이어 붙이면

이목구비 선명한 한 폭의 명화처럼

오래전 애틋함도 돋아나겠지

-김건희 시인의 ‘나는 퍼즐러’ 전문.

무언가를 희망하고 꿈을 꾼다는 것은 ‘살아내야’ 하고 ‘살아봐야’ 하는 일이다. 사는 일이 결국 죽는 일과 연결된다고 해도 말이다. 사는 일이 난간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일처럼 보여도, 겉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꿈꾸는 자에게 난간은 번지 점프대다. 도약과 비상(飛上) 그 이후의 이야기는 잠시 잊어도 좋다. 분명한 것은 ‘살아내야’ 하고, ‘살아봐야’ 하는 것이다.

두 발 나란히 올린 난간은

어디나 번지 점프대

뛰어내리는 건 어떤 느낌일지

하루살이 잔칫상이 되고 말

아파트 화단의 목련은 안다

썩을 일만 남았다고 해도

푹푹 꺼지는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거야

살아봐야 하는 거지

-김건희 시인의 ‘뭉크에게 말 걸기’ 일부

이종암 시인의 4번째 시집 《꽃과 별과 총》(시와 반시)

등단 30년이 넘는 이종암 시인은 포항에서 국어교사로 31년을 근무하다 명예퇴직을 했다. 자유인이 되어 4번째 시집 《꽃과 별과 총》(시와 반시)을 펴냈다. 꽃과 별, 그리고 총(塚, 무덤) 이야기로 가득한데 마치 구름이 흘러가듯 형형색색의 경험들이 꽃과 별, 총으로 무리지어 있는 듯하다. 이하석 시인은 그를 ‘구름감별사’라고 칭했다.

시집을 펴 보면 시인의 고향 경북 청도와 포항의 구만리, 경남 사천, 단양 가곡, 동강과 서강을 누빈 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 길들이 닿은 곳은 ‘저마다의 꽃’인 사람들의 자리이고, ‘별을 따다 묵는’ 이들의 동네다. 때론 해원(解冤)과 영원성을 드러내는 주검의 자리[塚]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월 산길을 걷다가, 엉겁결에

한 소식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그

제각각인 것 모여, 사월 봄 숲은

그윽한 총림(叢林)이다

참나무너도밤나무개옻나무고로쇠나무단풍나무소나무오동나무산철쭉진달래산목련아까시나무때죽나무오리나무층층나무산벚나무싸리나무조팝나무서어나무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오롯이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이종암 시인의 ‘저마다, 꽃’ 전문

이종암 시인의 ‘건너가다’를 읽는다. 갑작스런 죽음 말고 오랜 ‘병사(病死)’를 경험한 이는 안다. 그 죽음이 가까운 피붙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죽음이 얼마나 비장하고 장엄한지, ‘호(呼)와 흡(吸)의 사이마저 다 지우고 적멸로 가는’ 일이 저녁 노을보다 짙은지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에 대한 명제가 그 한순간에 담겨 있다.

포항의료원 중환자실 심장과 폐, 신장 몸 다 망가진 채 건너가려고 며칠 째 저리 사투를 벌인다 넉 달 전, 마누라 먼 곳 떠나보내고 눈물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다 이젠 기어이 먼 길 건너가려 한다 육신의 고통 극에 달하는지 여든 다섯 노인이 아이처럼 엄마, 엄마를 부르다 정신을 놓고 다시 봉순아! 마누라 이름 부르며 꺼억, 꺽꺽, 숨넘어가는 우리 장인 볼 수도 없고 울지도 못한다 나는, 가능만 하다면 어서 건네주고 싶다 몇 시간 후, 고요히 입적에 든다 제 혼자서 산소마스크 심장박동기 내던지고 호(呼)와 흡(吸)의 사이마저 다 지우고 적멸로 가는, 저 일대사(一大事), 노을보다도 장엄하다

-이종암 시인의 ‘건너가다’ 전문

홍찬선 시인의 18번째 시집 《생명과 사랑》(인문학사)

홍찬선 시인이 벌써 18번째 시집을 펴냈다. 《생명과 사랑》. 부제가 ‘꽃과 나무와 숲과 시’이다. 사실 꽃과 나무와 숲은 영원한 시인의 시재(詩材)다. 시인은 ‘꽃’을 ‘꿈’이라고 말한다. ‘나무’는 ‘힘’, 그리고 ‘숲’은 ‘생명’이라고 명명한다. 이 꽃과 나무와 숲을 ‘시’로 노래하는데 ‘꽃의 꿈과 나무의 힘과 숲의 생명을/ 몸과 몸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펼치는 가락’이 바로 시다.

꽃이 피어 꿈이 크고

나무가 살아 사랑이 열리고

숲이 푸르러 사람이 생명을 얻고

시가 꿈과 사랑과 생명으로 솟아납니다

-홍찬선 시인의 ‘꽃과 나무와 숲과 시’ 일부

봄꽃으로 가장 친근한 꽃 중에 냉이와 민들레가 있다.

냉이는 봄맛을 안기는 자연의 선물이다. 언 땅 마른 풀 섶 헤집으며 싹을 틔우는 봄의 전령사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냉이는 보릿고개를 살아남기 위한 먹거리였다. 그래서 냉이는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배고픈 밥상을 봄의 향기로 채’운다.

민들레는 늦가을부터 봄까지는 잎과 꽃을,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뿌리를 채취해 조리해 먹는다. 민들레는 할미꽃처럼 꽃대가 올라오기 전까지는 잎이 땅에 붙어있는 것처럼 낮은 자세로 있다가 꽃대가 올라오면서부터는 더 높이 자라려고 힘쓴다. 그 이유는 바람을 더 잘 받아 씨앗을 효과적으로 분산시켜 “목숨 바쳐 어짊 이루려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 때문이다. 이처럼 “홑씨 되어” “훨훨 짧은 삶 마감”하는 민들레 “연두색 톱니 잎엔 새별의 희망을”, “두툼한 노란 꽃엔 가운데 신념을”, “새하얀 떨기 홀씨엔 서방 정토를”, “새카만 상처 진액엔 북녘 생명”을, 각각 성찰하는 시인의 시적 상상력과 안목이 대단하다. (허형만, 목포대 명예교수)

냉이는 아픔이었다

응달보다 먼저 달려온

봄 맞이 양짓녘을

마른 풀섶 헤집으며

겨우 돋아난 싹을 찾아

뿌리째 뽑아내던 폭력은

보릿고개를 살아 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의식이었다

냉이는 사랑이었다

가진 것 모두를 아낌없이 주는

봄색시 꽉 찬 마음을

잎과 줄기와 뿌리를 송두리째

배고픈 밥상을 봄의 향기로 채워

온몸으로 베풀었다

하늘과 땅과 그 사람의 뜻을

-홍찬선 시인의 ‘냉이 봄색시 사랑’ 전문

에는 추위 견디기 너무 지쳐서더라

모진 눈보라 이겨내고 새봄 연

민들레가 홀씨 되어 먼저 가는 건

목숨 바쳐 어짊 이루려는 사생취의(捨生取義)더라

꽁꽁 언 마음 녹여 온몸 가볍게

훨훨 짧은 삶 마감하는 건

연두색 톱니 잎엔 샛별의 희망을

두툼한 노란꽃엔 가운데 신념을

새하얀 떨기 홀씨엔 서방정토를

새카만 상처 진액엔 북녘 생명을

가득 품고도

홀로 왔다 왔던 길 되짚어 돌아가는 건

참음과 외로움 깨우치려 했던 것

가냘픈 꽃대에 흔들리는 삶 얹어

짐짓 헛기침했던 건

함께 아파하며 모든 짐 지려는 사랑이더라

-홍찬선 시인의 ‘사랑의 신탁 민들레’ 전문

《시에》 2024년 여름호

시력(詩歷)이 40년이 넘는 시인 박상봉의 시 5편이 문예지 《시에》 2024년 여름호에 실렸다. 그의 시를 읽으면 정감이 가득한 정적(靜的)인 다큐를 보는 것 같다. 부드럽고 단아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새겨진다.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무르며 시인이 보는 따스한 눈길로 그렇게 세상을 살고 싶게 한다.

의자가 앉아있다

아파트 쓰레기장 헌옷수거함 곁에

시트가 떨어져 나간 의자가

오래된 주화처럼 녹슬고 있다

다리 한쪽이 기울어진 채 버려진 다른 의자는

누군가 앉았다간 궁둥이의 온기를

낮잠 자는 고양이와 나누는 중이다

몸통이 떨어져 말갛게 산화된 오토바이 안장

흐늘흐늘 부러질 듯한 철사 팔뚝과 칠이 벗겨진 선풍기 머리는

완벽하게 조립된 금속 재질의 고양이 같다

아파트 쓰레기장엔 빈 깡통들도 북적 북적댄다

납작해진 것,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은

버려진 일도 서러운데 구둣발에 짓밟힌 모양새다

얼떨결에 손목이 낚아채 끌려 나온

속옷 따위는 녹슨 철제 수거함에 몸을 숨겼다

쓰레기 분리수거장 바깥에 유모차 한 대가

시동 끄고 색이 바래고 있다

쿠션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듯

운전석에 용케 올라앉은 고양이 한 마리

생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졸고 있다

더는 쓸모없는 폐품이지만

한가한 낮에 오수 즐기러 나온 고양이는

시방 고급 침대 이상의 호사 누리는 중

유모차에 올라탄 고양이가 갑자기 액셀 밟고

부릉 부르릉 초록 봄 길을 향해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안전띠도 매지 않은 채 지그시 눈감고

니야옹 야옹

젖이 마른 엄마를 필사적으로 빨아댄다

뾰족한 입술 햇볕 한 뼘 더

-박상봉 시인의 ‘고양이 의자’ 전문

시 ‘봉지 날다’는 ‘고양이 의자’의 연장선에 있다. ‘고양이 의자’에 등장한 여러 생활 폐기물들과 봉지의 가치 체계와 동일한 연장선에 놓여 있다.

‘봉지’는 여러 통과 의례를 거치면서 존재론적 변이를 시도한다. ‘공중에서 물장구’를 치기도 하지만, ‘건물 창유리와 가로수 이파리 쪽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비바람에 송두리째 흔들리는 나무에 등 기대고 머’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봉지’는 자동적 삶을 상실한 채, 그저 이타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인 존재성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봉지도 시인의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서정의 샘 속으로 삼투압된 이후에는 전혀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 적극적 매개로 기능하는 것이 ‘바람’이다. ‘저 멀리서 부르는 바람’에 의해 ‘봉지’는 “기억 속 절망 딛고/길고 긴 하늘 자락 붙들고 일어서는”, “꿈틀꿈틀 솟아오르는 봉지는/팔뚝보다 질긴 근육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다. (송기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