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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보훈차관 된 ‘연평 영웅’ 이희완, 스물여섯에 北포탄 맞아 다리 잃던 그 순간... 북의 악마적 본질 경험!

“찢어지는 듯한 포성, 엄청난 양의 벌건 피... 저놈들 또다시 도발할 거라고 얘기했죠”

백승구  前 월간조선 기자·現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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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완 신임 국가보훈부 차관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벌어진 제2연평해전을 승전으로 이끈 ‘연평 영웅’이다. 해상 전투 당시 적(敵)의 포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통째로 잃었고, 왼쪽 다리에 8cm 크기의 뼈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매년 현충일이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전우(戰友)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희완(李熙玩·47) 현역 해군 대령이 신임 국가보훈부 차관에 발탁됐다. ‘영웅이 대우 받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이 반영된 인사다. 


이 신임 차관은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벌어진 제2연평해전을 승전으로 이끈 ‘연평 영웅’이다. 해상 전투 당시 적(敵)의 포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왼쪽 다리에 8cm 크기의 뼈 관통상을 입었다. 아홉 차례의 대수술 끝에 왼쪽 다리를 살렸지만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채워야 했다.


올해 마흔 일곱인 그는 2000년 해군사관학교 54기로 졸업하고, 그해 해군 항해소위로 임관했다. 2002년 연평해전 때 참수리 357호 부정장(부장)으로 참전했다. 해당 교전으로 윤영하 정장(함장·당시 대위)을 비롯해 6명 장병이 전사했다.


그 당시, 해당 도발에 나선 북측 경비정 ‘등산곶 684호’는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 때 아군(我軍)의 공격을 받고 반파(半破)된 북측 경비정이었다. 수리 후 다시 실전배치돼 기회를 엿보다 보복에 나섰던 것이다. 그 경비정은 2004년에도 NLL을 넘어와 우리 해군의 경고사격을 받고 되돌아간 적이 있다. 등산곶 684호는 도발 전담 적함(敵艦)이었다.


교전 현장에서 참수리 357호 정장·부정장을 맡았던 윤영하·이희완 두 젊은 장교가 쓰러질 무렵, 아군 358호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을 향해 격파사격에 들어갔다. 곧바로 다른 편대까지 가세해 북한 경비정은 기동력과 화력을 잃고 주춤했다. 몇 분 후 북한 경비정은 다른 적함(敵艦)에 예인돼 북방한계선(NLL) 북쪽으로 도망쳤다. 교전에서 북은 사망 13명, 부상 25명 등 38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2002년 6월 29일, 그날은 ‘2002 한일(韓日)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당시 우리 축구대표팀은 4강까지 진출해,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북측은 이를 역이용했다. 그날 오전 10시25분, NLL 남쪽 3마일 해상. 참수리 357호 윤영하 정장과 이희완 부정장은 우리 해역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등산곶 684호)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예감했다. 북한 경비정의 함수(艦首·뱃머리)에 달린 85mm포와 함미(艦尾)에 있던 37mm포가 참수리 357호를 직접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참수리 357호와 같은 편대였던 참수리 358호(편대장 金燦)가 북한 경비정의 선수(船首)를 먼저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357호가 북한경비정을 향해 시위기동을 할 참이었다. 357호가 25노트 속력으로 북한 경비정에 왼쪽 측면을 노출시킨 채 지나가는 순간, 북한 경비정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포성이 들렸다. 적의 포탄은 357호의 조타실을 명중했고 곧이어 화염이 솟구쳤다. 조타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격을 받은 357호 대원들은 조건반사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40mm함포와 20mm포, M-60 기관총, K-2 소총 사수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북한 경비정의 공격은 집요했다. 357호의 조타실, 기관실, 갑판 등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치밀히 계산된 의도적 도발이었다. 조타장비가 고장난 357호는 방향을 제대로 못 잡아 오른쪽으로 빙빙 돌았고 기관실 피격으로 동력(動力)까지 끊겼다. 대원들은 기관포를 수동 모드로 전환해 응사했다.


이희완 차관은 2012년 ‘제2연평해전 10주년’을 맞아 진행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교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습니다. 곧바로 배가 흔들렸고 비가 오듯 적탄(敵彈)이 357호에 박혔어요. 통신 헬멧을 통해 대원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도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포와 기관총, 소총으로 대응사격에 들어갔죠. 그 순간 또다시 적의 포탄이 357호를 강타했습니다. ‘쿵’ 하는 소리에 옆을 보니 윤영하 정장님이 쓰러졌습니다. ‘괜찮습니까’라며 물어볼 틈도 없었어요. 적의 공격은 계속됐고 대응사격도 계속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적의 포탄(37mm)이 또 날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제 오른쪽 다리를 날렸어요. 곧이어 왼쪽 다리 뼈를 총알이 뚫고 지나갔습니다. 다리는 휘어졌고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대로 넘어졌어요.”

 

이 차관은 포탄을 맞는 순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총알이 날아오고 포가 날아오는데 아플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함교(전투를 지휘하는 갑판 중 가장 높은 곳) 바닥에 나뒹군 저는 먼저 쓰러져 있던 윤 정장님을 쳐다봤어요. 눈만 깜박깜박거리더니 얼마 후 더 이상 눈을 뜨지 못하더군요. 윤 정장님의 등쪽에서 벌건 피가, 그 엄청난 양의 피가... 그때 대원이 정장님과 저를 구하러 함교 쪽으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적의 표적이 된다. 총알 날아온다. 나는 괜찮으니 정장님 먼저 살펴라’고 했습니다.”


그는 2002년 6월 29일 교전을 앞두고 북의 도발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도발 징조가 뚜렷했습니다. 하루 전날인 6월 28일에는 NLL을 침범하며 기동 연습까지 하더군요. 뭔가 행동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요. 그런데 전투 당일에는 NLL 남쪽으로 3마일까지 내려오더군요. 작정하고 내려온 겁니다.”

 

교전 당시 북측은 수세에 몰리자 우리 해군 함정을 향해 미사일 공격까지 하려 했다.


“지원에 나선 아군 함정이 북한 경비정을 공격하는 동안 기습공격을 당한 357호를 예인할 때였습니다. 저놈들은 자신들의 함정과 병력의 피해가 심각하자 우리를 향해 대함(對艦) 미사일을 쏠 준비를 했지요. 우리측 초계함이 북측 해안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 레이더 전파를 포착했습니다. 우리 함정은 채프(레이더 전자파 교란용 금속물질)를 발사한 후 신속히 이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를 예인하던 홋줄을 끊고 아군 함정은 연평도 기지로 복귀했지요. 저놈들은 자신들이 미사일 전파를 발사하면 우리가 확전을 피하기 위해 공격을 멈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물론 반파(半破) 상태였던 북한 경비정이 자력(自力)으로 복귀하지 못하자 구출을 위한 시간 벌기용으로 미사일 레이더 전파를 쏜 측면도 있습니다.”

 

북의 미사일 공격 우려로 예인 중이던 참수리 357호는 서해 바다에 홀로 남게 됐고 그날 오전 11시59분경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53일 후 인양된 참수리 357호는 현재 평택 해군 2함대사령부에 안보교육용으로 전시돼 있다.

 

제2연평해전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권 때까지 서해교전으로 불렸다. 공식 행사는 해군 2함대사령부가 주관하는 정도였다. 당시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전사자나 부상자들은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2008년 이명박(李明博) 정부 출범 이후 승리한 전투로 재평가받아 제2연평해전으로 명칭이 변경됐고 국가보훈부가 주관하는 정부 기념행사로 격상됐다.


이 차관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게 군인”이라며 “당시 국군통수권자가 햇볕정책을 추진했고 남북한은 화해 무드에 놓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큰 정책이 있는 상황에서, 월드컵 축제 분위기 때 전투가 벌어졌다. 햇볕정책을 열심히 추진했는데도 결국 우리 해군이 공격을 당했고 아까운 생명까지 잃었다”고 했다.

 

이희완은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행태와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했다.


“교전 후 군병원에서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으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TV와 일부 신문을 중심으로 이상한 보도가 나왔습니다. 기사의 제목이 ‘의도적 vs. 우발적’이었어요. 피가 거꾸로 솟았습니다.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어요. 직접 취재해 보도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나쁜 의도를 갖고 관련 자료를 제공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도를 하면 국민들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저놈들이 치밀히 계획하고 연습까지 한 후 내려와 기습공격까지 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우발적이라니.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잠을 못 잤어요. 심지어 우리측 어선이 NLL을 왔다 갔다 하니까 북한이 열 받아서 공격했다는 보도도 있었어요. 참으로 말도 안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업통제선은 NLL보다 한참 아래쪽에 있어요. 우리 어선은 어업통제선 이남에서 조업을 해요. NLL까지 올라갈 일이 없었습니다. 전투에 참가해 다리를 잃고 불구가 된 군인의 입장에서 말할 수 없는 좌절을 느꼈습니다. 제가 주변 분들에게 그랬어요. ‘기자들 다 데려오라. 직접 설명하겠다. 왜 의도적 공격이었는지를 구체적인 증거까지 대며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제2연평해전이 ‘우발적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한 보도는 교전 이후 계속됐다. 2년 뒤 2004년에는 MBC의 한 프로그램이 ‘우발적인 교전’이라는 제목으로 NLL 이남의 해역이 우리의 영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방송을 내보낸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인 이희완’은 ‘전역(轉役)’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 전혀요. 원수를 갚아야죠. 저놈들 때려잡으려면 군에 남아 있어야죠. 첫 수술 하고 난 다음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어릴 적부터 꿈이 군인이었어요. 장교가 되어 군생활을 시작하던 참이었는데 다리를 잃어 군인의 길을 접는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지요. 그러던 중 희망적인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루는 큰형님이 중환자실에 있던 저에게 관보를 들고 와 ‘희완아, 기뻐해라. 군 인사법이 개정됐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도 심사를 거쳐 현역으로 근무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이전에는 부상자는 당연히 전역을 해야 했죠.”


이런 희망적인 소식을 접한 이희완은 이후 병원생활 1년 동안 치료와 재활훈련에 적극 임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계속하게 된 이희완 차관은 군부대를 비롯해 공공기관, 중고등학교에서 ‘확고한 안보관이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주제로 안보강연을 많이 했다. 그는 “북은 언제든지 우리 영토·영해를 침입해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는 실존하는 세력”이라며 “우리가 피땀 흘려 이뤄 놓은 역사와 발전상을 하루아침에 까뭉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북한 정권”이라고 했다. 그는 중고등학교 학생 대상 강연에서도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또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제2연평해전 이후 그와 같은 기습도발이 또 다시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 예상을 안 했다면 군인이 아닐 겁니다. 직접 전투경험을 해 봐서인지 북의 도발의도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999년 제1연평해전 이후 3년 만에 제2연평해전이 터졌죠. 2004~ 2006년에 또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 시절 연평해전과 같은 굵직한 전투는 없었지만, 크고 작은 무력도발은 계속됐어요. 저는 ‘저놈들 또다시 도발할 것’이라고 주위 동료들에게 계속 얘기했습니다. 특히 수중이나 해안포 공격을 예상했지요. 결국 2009년 서해에서 또다시 교전(대청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희완은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9시 넘어 군 연락망을 통해 소식을 접했죠. ‘지금 해군 초계함(PCC)이 피격돼 가라앉고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해군 2함대 벙커에 전화했더니 난리가 났더군요. 해상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한순간에 ‘펑’ 하는 폭음만 있고 함정이 두 동강 났다고 하더군요. 순간 ‘이 새끼들 드디어 밑으로 왔구나’고 직감했죠. 연평해전 이후 동기들, 선후배들 만나면 항상 하는 얘기가 ‘저놈들 위로 오든 밑으로 오든 분명히 다른 형태로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수함 장교들도 마찬가지였어요. 한번은 천안함 폭침이 있기 전 동료 잠수함 장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잠수함으로 오는 것 아냐. 저놈들 서해에 잠수함 수십 척 갖다놓고 훈련하잖아. 돈도 없고 기름도 없는데 왜 할까. 저걸로 우리 공격할 것 같지 않아?’라고 했더니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 저 새끼들 수상전으로는 안될 것 같으니까 다음에는 밑으로 올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바다 특성상 수중공격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수중으로 오면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어요. 어쨌든 저놈들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우리 내부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더군요. 그 무렵 국방 담당 기자가 제게 전화를 걸어 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더군요. 하도 어이가 없기에 제가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되물었어요. ‘북한이 했겠죠?’라고 말하길래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일부 국민들이 천안함 폭침을 북한 소행으로 믿지 않는데 정말 슬픕니다.”


이희완 차관은 대한민국 동시대, 보통의 군인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는 20대(代) 젊은 나이에 북의 실체를 경험한 엘리트 군인 출신이다. 6·25 분단 이후 화해·대결이라는 이중적 구조 속에 숨어있는 북의 악마적 본질을 경험한 것이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채운 그의 다리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매년 현충일이면 국립대전현충원을 찾는다.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명의 전우(戰友)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보훈부 차관으로서 전우들을 제대로 대우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지난 1일 대령으로 진급해 해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해왔다. 6일 오늘, 보훈부 차관 내정 발표에 따라 곧바로 전역 절차를 밟는다. 또 다른 군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글=백승구 前 월간조선 기자·現 디지틀조선TV 기획위원


입력 :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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