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왼쪽부터 폴란드의 민족영웅 피우수트츠키, 정율성. 홍범도, 김원봉.
“우리는 오랫동안 사회주의라는 열차를 함께 타고 왔었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
폴란드의 국부(國父)라고 할 수 있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년)의 말이다. 피우수트스키는 1892년 폴란드사회당(PPS)에 참여한 이래 주로 테러와 무력투쟁을 통해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원봉 비슷한 캐릭터라고 할까?
독일의 압력에 맞서면서 ‘민족영웅’으로 떠올라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피우수트츠키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지원 아래 독자적인 폴란드인 무장부대를 만들려고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8세기 말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한 후 이 땅을 120여년간 지배해온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인 부대 창설에 소극적이었다. 1916년 7월 오스트리아군에 소속되어 있던 폴란드인으로 어렵게 2개 사단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폴란드군 무장부대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긴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이 부대들을 지원부대로 격하시켜버렸다. 피우수트츠키는 이에 항의해 이 부대의 사령관직을 던져버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후 폴란드인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전후(戰後)에 폴란드를 입헌군주국으로 독립시켜주겠다고 유혹했다. 하지만 향후 폴란드의 국경선 등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은 없는, 립 서비스에 불과했다. 피우수트츠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독자적인 폴란드군 부대 창설을 계속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17년 1월 독일-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인들을 전쟁에 동원하려고 자기들이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령 폴란드에 임시국무위원회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피우수트츠키는 이 정부의 군사위원(국방장관)이 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도 “폴란드 정부 없이는 폴란드 군대도 있을 수 없다”면서 폴란드 독립에 대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약속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끈질기게 요구했다. 이 요구가 거부당하자 피우수트츠키는 군사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시국무위원회 역시 독일-오스트리아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다. 독일군에 징집된 폴란드군의 2/3도 독일황제에 대한 충성선서를 거부했다.
이런 사태의 배후에 피우수트츠키가 있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그를 마그데부르크성에 구금했다. 이런 조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피우수트츠키를 폴란드의 민족영웅으로 부각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다 할 민족지도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폴란드인들은 일신의 안녕을 희생하면서까지 강대국의 괴뢰이기를 거부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낸 피우수트츠키에게 열광했다.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폴란드의 독립이 가까워오자 폴란드의 모든 정파와 무장조직들은 피우수트츠키를 임시국가원수로 옹립했다. 그만이 신생 국가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소련의 침략을 격퇴하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던 피우수트츠키는 이 시기에 폴란드 민족주의자-국가주의자로 완전히 변신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나는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는 말도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사실 그는 폴란드사회당 시절에도 폴란드사회당-우파(右派)의 지도자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계급혁명을 우선시하는 폴란드사회당-좌파(左派)와 대립했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러시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피우수트츠키는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입장을 입증했다. 당시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이 ‘조국’으로 떠받들던 소련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이에 감연히 맞서 싸운 것이다. 당시 소련군 사령관은 당대 최고의 전략가 중 하나인 27세의 청년장군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고, 정치위원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의 시체 위에서 세계혁명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며 적군(赤軍)을 독려했지만, 1920년 8월 폴란드군은 바르샤바 외곽에서 침략자들을 격퇴했다. 이를 ‘비스와강의 기적’이라고 하는데, 전사가(戰史家) 중에는 이 전투를 ‘세계 역사상 18번째로 중요한 전투’로 꼽는 이도 있다.
정율성·김원봉, 그들은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나?
‘정율성 논란’에 이어 ‘홍범도 논란’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뜬금없는 ‘이념논쟁’을 야기한 것처럼 비난하고 있다. ‘매카시즘’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는 일제 하 사회주의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혹자는 일제 하 사회주의 운동은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이었다면서 그들을 ‘냉전의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는 피우수트츠키의 말은 이 논란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한다. ‘독립’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렸느냐 여부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1945년 '해방', 혹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정거장’에서 붉은 열차에서 내려 대한민국이라는 열차에 올라탔으면, 일제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대열에 섰더라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해방과 건국이라는 ‘정거장’에서 내리기를 거부하고 계속 ‘붉은 열차’에 머물렀다면, 이는 문제다.
정율성은 해방 전에 이미 중국공산당원이었고, 해방 후에도 중국공산당원이었다. 6·25 전쟁 중에는 북한군 및 중공군과 함께 행동하면서 국군과 미군을 저주하고 북한군-중공군을 고무하는 군가를 작곡했다. 그는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붉은 열차’의 열성적인 승무원이었다.
문재인이 그렇게 떠받들었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 역시 마찬가지다. 의열단은 항일투쟁사에 혁혁한 업적을 세웠지만, 김원봉은 해방 이후 월북, 북한정권의 국가검열상-노동상 등을 역임했다. 그가 후일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고 해서 ‘붉은 열차’를 몰고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한 원죄(原罪)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 해방이 되기 전에 사망한 이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해방 후까지 공산당 활동을 한 자들과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행적을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소련군이 동료 독립군들을 학살할 때 소련군 편에 서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레닌으로부터 권총과 금화를 하사받고, 소련공산당원으로 또 소련시민으로 충직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면, 해방 후에도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공산당에 굴종하면서 살았던 그의 행적은 독일-오스트리아에 맞서 폴란드인의 자주성을 지켰던 피우수트츠키와 대조적이다)
남로당 수괴 박헌영의 아내, 김일성의 일가붙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해방 이후까지 살았더라면,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남로당 수괴 박헌영, 빨치산 두령 이현상 등의 경우에서 보듯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대부분이 ‘해방’ 이후에도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조봉암(초대 농림부 장관)이나 김준연(제헌의원, 전 법무부 장관)처럼 일제하에서 공산당 활동 전력(前歷)이 현저하다고 하더라도, 해방 이후 공산당과 결별하고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참여한 분들은 ‘붉은 열차’에서 내린 이들이다.
혹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남로당 이력’을 거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형의 죽음에 격분하여 잠시 ‘붉은 열차’에 오르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에서 내렸다. 이후 그는 군인으로,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면서 “단순히 빼앗긴 국권을 되찾거나 과거의 왕정국가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는 공산전체주의 국가가 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는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기려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기도 할 것이다.
586, ‘민주화’ 이후에도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아
이러한 기준은 오늘날 586세대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민주화' 혹은 1989년대말 1990년대 초 소련-동구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시점에, 혹은 그 이후에라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돌아보고 ‘붉은 열차’에서 내렸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이 포용할 수 있고, 포용해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김영호 통일부 장관의 경우 1980년대에 쟁쟁한 운동권 투사 중 하나였지만 6·29 선언 이후 좌파와 깨끗하게 결별하게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학자로 분명한 입장을 취해왔다. 김영호 장관 외에도 그런 이들이 여럿 있다. 반면에 586출신 야당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붉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다. 북한 김씨정권의 독재와 인권 유린, 핵무기 개발에 한사코 눈을 감으면서, 정율성 같은 자를 기념하는 데 열심인 것이 그 증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