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지방 출장을 왔다. 구름이 산맥처럼 두터운데 갑자기 빗줄기를 쏟아낸다. 휴게소에 들러 쓴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가방에서 시집을 꺼내 읽어 본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읽는데 재미있다. 빵 터지는 웃음 코드가 시집 어디에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읽는 즐거움을 준다. 시인이 시를 쓸 때도 독자의 마음처럼 즐거울까.

시집을 읽다가 잠시 덮고서 소설을 읽는다. 이 소설은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지난 4월에 출간되었다. 다음은 소설의 한 대목.

<“기도실 문짝 부서진 거랑 성당 장궤틀 조각을 취사용 나무로 썼다는군요.”

하이가 더듬거렸다.

“안개 때문에 나무가 다 젖어서요…. 우물 뒤에 있는 창고 속에서 나무 조각들을 좀 주어다 땠습니다.”>

소설집을 닫고 다시 시집을 편다. 노란색 커버의 시집이 달덩이처럼 부풀어 오름을 느낀다.

사랑해본 적 없던 주전자에게도 파도가 생겼다

 -시 <유자차를 타는 시간> 중에서

나는 너를 사랑했으므로

오늘도 물은 준다 자라나는 만큼 자라지 않는 것들에게

-시 <나의 정원> 중에서

다음 행을 알 수 없는 시가 안부를 닮아서

오지 않을 사람은 악보를 그린다는데

무너진 벽에 내린 비가 햇빛보다 강할 수 있을까

 -시 <첫 줄> 중에서

다가가는 계절이 분주해서 혼잣말이 많아진 저녁 (…)

낮에 뜨는 달에게 밤은 낮을 기다리는 소멸 어디쯤

 -시 <고요한 외로움> 중에서

시를 읽을수록 즐거움이 느껴진다. 이 시집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산문의 차가운 정신으로 읽으면 비문(非文)처럼 생경하게 느껴지지만, 운문의 마음으로 읽으면 말랑말랑하고 경쾌한 시인의 감성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언어를 잘 조각할 줄 안다. 숙련된 조련사가 안내하는 미로를 따라 독자는 행간(行間)의 숲길로 빠져든다. 내 안에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자라나는 만큼 자라지 않는 것들’에게 왠지 마음이 쓰인다.

창밖을 보다가 우리는

다른 나무 위를 걸었다

꼭 잠들기 전까지만

 -시 <하품까지만 사랑해> 중에서

사랑하지 않도록 더 깊은 곳으로 가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의 약속에게 기대하자

(…)

벽에 기댄 화분에게도

그림자가 생기는 날처럼

 -시 <벽에 기댄 화분> 중에서

햇빛에도 웃는다는 민들레가 외로움을 느낀 어느 날에

옷장에서 겨울 외투를 꺼내 덮어준 적이 있었다

 -시 <우리의 바다> 중에서

고단한 우리들이 가여운 서로를 거슬러 올라갈 때

혼자이길 바라는 마음이 혼자가 되지 못할 때

가여워라, 가든한 모두를 위한 축제를 열자

더 가볍게 끌어안을 혼자가 되어 만나자

 -시 <빈 소녀에게> 중에서

시어는 평범하지만, 행과 연으로 엮은 이미지의 행간은 평범하지 않다. 시에 사용된 언어가 쉬워 보인다고 쉬운 시는 아니며 어려운 말들이 쓰이고 있다고 해서 어려운 시는 아니다.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항시 새롭게 변모시켜야 한다.

시집 《일종의 마음》은 논리시나 회화시가 아니다. 경험시도 아니고 설명시도 아니다. 화자의 사고 흐름이나 감정의 흐름을 잘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 미로의 시다.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미로에 빠지게 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긴 여운을 준다. 미로에서 만나는 시적 목소리(voice)와 어조(tone)는 친근하고 다정하면서도 풍자적이고 시니컬하다.

아무도 울지 않은 의자가 있다는데

열두 번을 돌아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

슬픔이 덧댈수록 슬퍼지지 않는다는 말

이것은 어쩌면 아주 흔한 이야기

덧대어본 울음이 울지 않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어떤 슬픔으로 웃으며 만날 수 있겠지

어쩌면 나에게만 슬픔일 수 있는 이야기

 -시 <보편적인 슬픔> 중에서

시 <보편적인 슬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가 어떤 미적 세계인지 독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시인 역시 설명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미로와 같은 감정, 설명할 수 없는 행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시는 진술(statement)의 차원을 넘어선다. 수용미학에서 말하는 독자의 참여를 자연스레 이끄는데, 화자는 (독자의) 자의적(恣意的) 심리투사를 열어놓으며 미로를 걷는 착각에 빠뜨린다.

열두 번을 돌아간 의자 아래에 꽃이 뭉게뭉게 피어날 때쯤

보편적인 의자에 사람들이 앉는다,

열세 번째 슬픔을 준비하는 슬픔 없는 사람 뒤로

 -시 <보편적인 슬픔>의 마지막 연

열두 번을 돌아간 의자, 보편적인 의자, 열세 번째의 슬픔, 슬픔 없는 사람…. 도저히 이런 표현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순 없다. 그렇지만 논리적이지 않기에 애매성(ambiguity)과 다의성(多意性)의 숲속 미로와 만나는 것이다.

시인은 은유법, 의인법 같은 수사학적 기교에 능숙하지만, 시 전체를 하나의 알레고리(allegory)처럼 엮어내는 재주를 지녔다. 아니, 시집 전체가 총체적인 은유법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가, 시어가, 시적 상상력이 화려하면서도 담백하고, 툭툭 내뱉는 일상어 같으면서도 선이 굵은 추상화처럼 독특한 색감과 색채를 지니고 있다.

물로 그림을 그리는 날이 있다

하늘색은 하늘의 색이 아니라는데

사랑을 했었지, 마음이 했었던 날들이었지

며칠간 신비로울 만큼 많은 햇빛이 쏟아졌다

우리의 색은 나와 맞지 않아, 네가 그랬다

햇빛에 바랜 나는 흑백으로 변해가고

복잡한 퍼즐 조각을 맞춰가던 아이처럼 나는 헤맸다

물로 그림을 그리는데 더 선명해지는 것들 사이에서

가장 희미해지고 싶던 날이 있다

 -시 <무늬의 색> 전문

일러스트=조선DB

어제 깎다 만 사과를 다시 깎는 아침이다

남겨둔 것에는 그만한 밤이 있는데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야생화의 침묵 같았다

더 달콤하기 위한 담담한 흐름 사이에는

돌아가지 못할 늦은 안부들이 피어나는데

사과를 깎으며 얼마나 더 계절에 닮을 수 있을까

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껍질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익어가는 밤들 위로

아직 익어갈 수 없는 밤들이 부르고 있었다

 -시 <설익은 밤> 전문

이제야 시인은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2년 《애지》로 등단했으며 지금껏 4편의 산문집을 펴낼 만큼 자기만의 이야기, 자신만의 서사(敍事)가 탄탄한 시인이다. 시집 《일종의 마음》은 첫 시집이다. 지난 5월, 세상에 나왔다.

이 시집의 표제시 <일종의 마음>을 끝으로 소개한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 앉아 창문을 만들어 바라보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자라나는 마음에는 그림자가 없어서 거두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질 때쯤

아무도 아무것도 누구도 누구에게도 건넬 수 없는 그만큼의 내가 있었고

나만이 견디고 이겨내는 정도의 일종의 마음 같은 것

너와 내가 있던 방에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잠잠한 하루의 일이었는데

바다는 끝이 없어서 보고 싶은 만큼의 바다를 만들 수 있지

하늘에게 견딜 만큼의 볕을 만든다는 구름의 다짐처럼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이 생겼다

작은 나의 작은 세상에 곁을 두는 것들에게

감당할 만큼의 마음에 두고 가는 슬픔 외로움 같은 흔적이라고

머무르는 방에 노래를 불러준 노란 달이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도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 시 <일종의 마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