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넷 열정 만렙의 큐시트 “위대한 배우란 인생을 잘 견뎌내는 배우” : 월간조선

50대 남자배우가 스무 살, 서른 살의 히어로와 나란히 주역이 되어 성공을 이끌어내는 건 흔치 않은 경우다. 그러나 열정 만렙 유준상은 이 힘겨운 밸런스를 완성해 내며 불가능이란 없음에 도전 중이다. 오래도록 쓰임이 있는 배우가 되려면 이보다 더 혹독한 게임도 얼마든 치러낼 태세다! 10주년을 맞는 뮤지컬 <그날들>의 대표 주역 유준상의 건강한 오늘을 살펴본다.

10주년 맞은 <그날들>을 위해 매순간 ‘일어나

배우 유준상은 지난 10년 동안 이어진 여섯 시즌의 공연에서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주인공 ‘차정학’을 연기했다. 차갑고 냉철하지만 지난 시절의 사랑과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는 속 깊은 사내의 다정함은 많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뮤지컬 <그날들>의 산 역사나 다름없는 배우 유준상에게 어떤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할지를 고심하던 찰나. 스튜디오 저쪽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유리창 밖 소나무 숲을 내다보며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게 아닌가.

‘조금씩 잊혀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떠나가는 젊음에 허무가 밀려들 때 부른다는 이 노래를 유심히 듣게 됐다. 마치 내 문제인 것 같아서 말이다. 그와 나의 나이는 젊은 날의 방황과 시정으로부터 벗어난 지 오래지만 그 노래가 흐르는 동안 다시 파란 청춘의 갈피 속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배우 유준상에게는 그런 매력이 있다. 쉰넷의 물리적 나이를 너끈히 서른 살로 조율하는 세찬 노련함과 스러지지 않는 젊음 말이다. 자신을 찾아온 취재진을 위해 가벼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긴장감과 멋쩍음을 내려놓게 함과 동시에 길어지는 촬영과 인터뷰의 피곤함을 달래는 배우적 됨됨이 또한 출중하다.

지난 10년 동안 이어진 여섯 시즌의 공연에서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주인공 ‘차정학’을 연기한 그에게 뮤지컬 <그날들>은 나이테와도 같은 존재다. <그날들>을 공연하면서 후반생의 나이를 먹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순정파 ‘방귀남’ 역으로 이미 스타 대열에 합류했으며, <그리스> <더 라이프> <잭 더 리퍼> <삼총사> <레베카> 등 견고한 뮤지컬 랜드 또한 보유하고 있지만 자신을 매료시킨 작품 1순위로 언제나 <그날들>을 꼽곤 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잊지 못할 추억과 아픈 응어리,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한 미련이 김광석의 아름다운 노래와 맞물려 전개되는 <그날들>의 스토리와 넘버는 배우 유준상에게도 많은 감동을 가져다주었다. 아무런 감흥 없이, 와닿는 것 없이 흘려보냈던 지난날들이 이 공연을 통해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극 중 ‘거리에서’를 부를 땐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의 감정이 떠올라 눈물이 솟구칠 때가 많다. 집 안에선 맨발조차 아무렇지 않게 바라봤던 당신을 집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왜 그리도 낯설고 애잔한지 그리운 아버지가 저 길 모퉁이를 돌아 나오실 것만 같아 마음이 뛰곤 한다. 처음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땐 외롭고 답답했던 1군야전사령부 시절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 10주년 공연에선 입대를 앞두고 있는 아들 ‘동우’를 격려하는 다감한 아비의 입장으로 바뀌게 됐다. 자라지 않을 것만 같던 아이가 어느새 스무 살이 돼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됐고 모든 게 달라졌지만 변함없이 자신을 감싸주는 한결같은 극장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게 된다. 그가 매일 공연일지에 그리는 나무의 이름은 향수였다.

- 동료이자 라이벌인 ‘강무영’ 역의 배우들과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난다. 어린 후배들과 공연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같이 춤추고 같이 노래하며 땀을 흘리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이 차이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틈날 때마다 김건우와 영재에게 ‘우린 이제 친구니까 날 편하게 대해’ 하며 다가가곤 한다. 사실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건 관객들이다. 다행인 건 1막이 지나면 대부분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 뮤지컬 <그날들>을 40대 초반에 시작해서 이제 50대 중반이 됐다. 어떤 변화가 있나.

“마흔일곱쯤 되면서 이야기와 멜로디에 푹 빠져 복받쳐 오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이 한 소절을 부르는 데도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곤 했으니까. 그래서 울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데 지장이 없도록 많은 훈련을 해야 했다. 이제 10년이나 됐으니까 그만 울겠지 싶었는데 눈물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주체가 되지 않는다. 죽은 강무영의 영혼에게 ‘나, 너 많이 미워했어’라는 대사를 던지면 강무영이 내게 ‘다 살려고 그랬겠지’라는 너그러운 우정을 들려주는데, 그 순간 삶의 응어리가 풀리며 눈물이 솟구쳐 ‘너 그대로구나’라는 다음 대사를 편안하게 하기가 어려워진다. 죽은 친구는 나이를 먹지 않고 꾸역꾸역 살아야 하느라 늙은 나를 친구가 얼마나 낯설어 할지를 생각하면 또 눈물이 흐른다. 어떤 날은 울지 않고 잘 넘어갈 때가 있는데 앞줄에 앉은 관객이 울면 따라서 울고 만다.”

- 10년을 해온 공연이지만 여전히 어려운 부분은 무언가.

“작품에 대한 이해, 집중력, 상대 배우에 대한 반응, 보컬과 댄스까지 해결이 안 되는 것은 없다. 허리와 무릎이 아프고 대본을 좀 떨어뜨려 놓고 봐야 하는 퇴행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열정은 더 충만해졌고 매 공연이 기쁘다 못해 절실해졌다. 그러나 난관은 매 순간 찾아 오기 마련이다. 연습이 좀 길어지면 참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들고 실수가 이어진 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나이 오십을 넘긴 지 오래인데 평정을 찾기는커녕 감정이 요동치는 날이 더 많으니 이를 어찌하나 싶지만 힘든 순간을 넘겨야 평온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덕에 다시 힘을 내곤 한다. 평온은 결코 고요에 있지 않다는 걸 나는 잘 안다.”

- 흘러간 배우, 잊힌 배우가 될까 봐 두려울 때가 있나.

“<그날들> 초연이 성공리에 끝났을 무렵 오늘의 10주년을 예견하며 꼭 10년만 더 해야지 하는 목표를 세웠다. 막상 그 지점에 도달하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됐다. 며칠 전 장유정 연출가께서 ‘선배님 65세까지는 하셔야죠?’ 하는데 ‘그래 10년 달려왔으니, 10년 더 달려야지’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걸 겨우 입을 막아 눌렀다. 좀 미욱한 소리일 수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좋은 역할을 맡겨주지 않는 것에 불평을 하기보단 더 이상 나를 써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게 됐다. 오십 세가 되면서 나의 위치, 분수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란 천부적 재질이 있는 배우가 아니라 잘 견뎌내는 배우란 걸 무대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버틴다는 게 시간만 보낸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지난날의 나의 업적만으로 계속 써주지는 않는다. 새로운 공연 스타일에 부합하는 배우가 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최고 시청률 45.3%라는 경이로운 스코어를 만들어냈던 2012년 국민 드라마 <넝쿨째 들어온 당신>을 촬영할 무렵의 모습. 지금도 ‘영’하지만 10여 년 전 마흔둘의 모습은 훨씬 더 앳되다.

- 댄스, 보컬, 신체단련, 즉흥 연기 등 그 많은 레슨을 소화하려면 매끼 충분한 식사를 해야겠다.

“무대에서는 진짜 20대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녀야 한다. 하루에 한 끼 반 정도의 식사량 이상은 금물이다. 농담을 곁들이면서 술까지 마신다면 지금 일은 포기해야 한다. 소식만으로 많은 레슨을 소화해 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대신 배움의 즐거움이 있지 않나. 안락함이 주는 만족감, 미식의 포만감보다는 정서적으로 와닿는 충만함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사랑, 그 순간의 멜로디

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 <그날들>이 드디어 10주년 스페셜 시즌을 맞는다. 한국적인 정서를 오롯이 담아낸 스테디셀러 창작 뮤지컬 <그날들>은 고故 김광석의 명곡을 중심으로 그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먼지가 되어’ ‘나의 노래’ 등 오래 기억될 김광석의 명곡 20여 곡이 2시간 35분 러닝타임 속에서 차례로 흐른다. 유준상은 냉철한 원칙주의자‘차정학’ 역을 열연한다. 경호부장이 된 정학에게 대통령의 딸과 수행 경호원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는 그들을 쫓는 과정에서 20년 전 사라진 친구 강무영과 의문의 여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극에서 정학은 20대와 40대의 모습을 넘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