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이 길다.

‘럭키와 베토벤이 사라진 권총의 바닷가’.

궁금증을 유발한다. 시집을 열자마자 ‘시인의 말’이 나오는데 무슨 암호 같다.

‘백오십여덟 개의 길고 긴 흰 천

지구의 그림자는 피투성이 보름달’

암호를 풀지 못한 채 시집 속으로 들어간다. 아니, 들어가기 전에 시집 표사에 적힌 시인들의 평(評)을 쓱 훑어본다.

<‘럭키와 베토벤이 사라진 권총의 바닷가’를 읽는데 킥킥 웃음이 난다. 참회록이란 제목의 연작시를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송진 시인은 어류에서 인류로, 인류에서 의류로 변모하는 상상력으로 우리를 자꾸 간지럽힌다. (중략)

시집 곳곳에 선 “참외 씨앗이 허공으로 터져 나”온다. 주운 씨앗을 주머니에 넣고 송진이 그려내는 세상을 따라 걸었을 뿐인데 “죽은 사람이 잠시 살아나고, 말하는 순간 귀 옆에 단풍잎이 돋아나고, 개들이 금으로 된 무덤으로 뛰어드는” 장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임지은 시인)>

<그녀는 “검은 숲”의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각혈 쏟아지는 숲을” “시로” 써내기 위해 두려움을 걷어내고, 아픔을 억누르며 걸음을 옮겨놓는다. “슬픔들의 조합이 무기수처럼 징역을 사”는 곳, “물질세계는 타락했고 비물질 세계는 오염되어” 구원이 거의 불가능한 곳, 그녀는 기꺼이 죄수가 되어 그곳에 갇힌다.

시는 그녀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다. 하지만 그녀는 족쇄를 원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원래 “짓밟히고 일어서”는 “존재”라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발목에 흘러내리는 ‘고름’으로 글자를 적어간다. (길상호 시인)>

알듯말듯한 말인데, 평이 무척이나 시적(詩的)이다.

시들을 읽어 본다.

내 몸 안에는 거칠어지려는 나와 부드러워지려는 나가 있다 거칠산역 새벽에 가면 거칠어진 나가 도착해있다 왼손에는 길 든 가죽가방을 들고 오른손은 저탄소 사과를 먹고 있다 새벽의 바다는 안개 속에 휘감겨있고 거칠산역 기차는 수평선을 거침없이 달린다 거칠어진 나의 손바닥에는 저탄소 사과의 앙상한 뼈다귀가 놓여있다 움켜쥐어도 한 방울의 즙조차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저탄소 사과의 젖꼭지를 바다를 향해 던진다 투수가 된 거칠산역은 부드러운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런가 진정 그런가 그렇다 그렇다고 하자 (하략) 지금은 실제 기후 상황이다. 수척해진 북극곰이 빙하에 불어터진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

-시 <내 몸 안에는 저탄소 사과가 자란다> 부분

죽은 혼령들이 연주를 한다 검은 미사복을 입고 무릎을 꿇고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옷장 속에 숨어 울던 어린 아이가 신부의 손에 이끌려나온다 신부는 아이의 눈물을 혀로 핥아준다 성부와 성자의……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의…… 시냇가의 나무를 심던 도끼는 어디 갔는가 검고 어두운 동굴에 예수는 오래 앉아있다 예수의 몸을 먹은 나는 예수의 피를 먹은 나는 해 골이 되는 꿈을 꾸었다 두 명의 날개 없는 어린 천사가 건네준 부활절 달걀에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죽은 내가 가시 돋친 전기고문 의자 위에 나신으로 앉아있다 피가 흐르고 흘러 죽은 동생 부기의 얼굴을 홍수처럼 뒤덮었다 압록강에 잠긴 느릅나무 죽으면 이름이 사라지는 자를 기억하고 있다 죽은 혼령들이 리코더를 분다 없는 무릎을 질질 끌며 마룻바닥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금으로 된 무덤을 본 추위에 떨던 개들이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금빛개가 되는 건 아니다는 걸 세상 사람들은 알고 죽은 나는 모른다

-시 <혼령들> 전문

장폴 벨몽도가 2021년 9월 6일 죽었다 그의 네 멋대로 해라 추모 영화를 본다 (중략) 죽은 자에 대한 비대면 중간고사를 치고 있다 설거지는 슬금슬금 바닥을 기웃거린다 버려야 할 마스크는 천장에 빼곡하다 마음대로 총으로 쏴 죽이고 마음대로 차와 돈을 빼앗고 마음대로 연애만은 되지 않는 미셸의 분장을 한 고인 주검 영화를 주섬주섬 주워 먹던 나는 왜 갑자기 두 손을 모우고 북쪽을 향해 참회 기도를 하는가 고인의 입안에 있던 참외 씨앗이 허공으로 터져 나온다 벨몽도가 말한다 나 잠시 살아날 게 놀라지마 쓰윽 먼 지처럼 일어나더니 커다란 두 손으로 살아남은 자의 항문을 목화솜으로 틀어막는다 이제 곧 꽃이 필거야 왜 인생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나

-시 <참회록20> 일부

미래의 일이 떠나고 있다 미륵의 귓불을 하얀 나비처럼 스치며 침을 뱉는다 밤마다 밥에 뜨거운 물을 세 번 붓는다 스스로 죄를 고한다 스스로 죄를 사한다 주체는 객체를 주체화한다 옷 장마다 옷이 사라지고 삼신각 옆의 소각장의 불은 거세어지다 고개 숙인다 약사여래불 화단에 묻어준 하얀 나비의 영혼이 우주를 맴돌다 툭, 미궁의 자궁으로 떨어진다 별은 혹한의 창가 에 매달려있다 굶주린 외계인들이 사는 곳에 움막을 짓는다

뜨거운 밥 세 숟가락

뜨거운 물 세 번

세 겁의 불의 골목 돌아나오는 영하의 여름

이제 영영 서럽지 않다

다만, 옷장 속의 탈취제가 두통의 근원일 뿐

- 시 <참회록 52> 전문

낯설다. 실험적이라 할 만큼 주술(主述) 구조가 주술(呪術)같다. 불안하다. 초조한 느낌의 산문시가 주류를 이룬다. 의미의 무의미화. 권력이 가하는 검열을 거부하듯 문명이 새겨진 말뭉치를 해체하듯 형식의 파괴, 현대시의 틀을 무시한다. 인상주의 화풍처럼 이미지가 시시각각으로 움직인다. 어쩌면 시가 회화적이란 생각이 든다. 언어의 붓으로 서로 다른 색채, 색조, 질감을 완성한다. 이미지가 현란한데 그런 상상력이 괴기스럽고 주지주의(主知主義)적이지만 자꾸 읽다보면 ‘재미’있어진다. 재미는 말장난과 같은, 낯선 이미지의 조합 같은 것들이다. 이미지들의 재생산(再生産)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엔 연결성이나 깊이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가 새로운 이미지의 조합으로 의미를 재생산한다. 분명 허구를 이야기하지만 이미지는 아주 냉혹한 현실을 그리는 역설을 보여준다.

알몸으로 달리던 택시가 시간과 정면충돌하였다 이화도화와 모녀포차를 지날 때쯤이었다 길에는 노란 낙엽이 대장간 호미처럼 무성했다

-시 <참회록 26> 부분

어두운 세기의 무대에 대역을 서기만 해도 공황장애 자격증이 손쉽게 주어졌다

-시 <참회록 27> 부분

성철 스님 이만 관에 들어가시지요 이민국에서 불법사찰 나왔습니다 급한 검문은 금물입니다.

-시 <참회록 31> 부분

나의 개떼들이여 염증은 곧 가라 앉지 않을 듯 하네요 666일 약을 처방 받았어요

-시 <참회록 39> 부분

물고기가 금반지를 뱉었다 중지를 잘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시 <참회록 81> 부분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정말 고생 끝에 낙이 왔습니다 생 나뭇가지가 끊임없이 새를 토하고 있습니다

-시 <참회록 82> 부분

산문적이지만 음악성이 강하다. 내면의 목소리를 자동기술적으로 쏟아내는데, 뭔가 산만하지 않다. 일관적이다. 비이성적인 말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성적이다. 굉장히 이성적이다. 미친 척하는 몽상가처럼, 광기에 사로 잡혀 있는 것처럼 글을 쓰지만 광기를 조종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덜 비극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비극적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뒤집어 보면 인간적인 뭔가가 숨어 있다. 통제 가능할 수도 있는….

그의 시를 어떤 이가 사랑할까. 시인은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얼마나 독자의 진심을 갈망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