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양현 시인의 《푸른 문신》 : 월간조선

시집 《푸른 문신》을 읽었다. 한 권의 시집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진지하고 진지하고 또 진지한 시들이었다. 시어들이 향기 나는 입김처럼 오래 머릿속에 머물렀다. 시인은 속삭이듯 말한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걱정하는 말투 뿐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감정의 과잉자들이다. 김소월 시인의 시 <천리만리>에서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처럼 온 세상을 색깔 있는 감정으로 흠뻑 물들인다. 그러나 양현 시인은 내면을 혹사시킬 만큼 감정이 다듬어져 있다. 그 혹사와 절삭(切削)은 시인만이 감당해야 할 고된 작업이며 아름다운 임무다. 기다림의 오랜 시간 없인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장에서, 시어에서 다른 시인들과 다른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난다. 독자는 더 귀를 세운다. 낮은 소리가 말하는, 섬세한 비유가 가리키는 시의 정령(精靈)들에 집중한다. 그 정령들이 수 놓은 성찬 앞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시집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의 말’을 읽어 본다.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지평선 너머

시의 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아직은 너무 먼 길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작은 마침표로 순간을 절연한다

긴 여행이 될 것 같다

양현 시인이 앞으로 몇 권의 시를 더 낼까. 흥미롭다. ‘긴 여행자’가 되리라.

월간조선 독자들을 위해 몇 편의 시를 소개한다.

모깃불 연기 속으로 여름밤이 날아간다

저녁상에 쌓이는 어둠을 쓸어내다가

보름달이 기우는 밤

휘어진 숟가락 끝으로

보리밥 한 그릇에

별을 타서 마시던 밤

멍석 위에서 별과 함께 뒹굴다가

보름달을 품에 안고 잠이 들면

개복숭아 같은 비릿한 꿈 하나

꿈 하나씩, 봉숭아 꽃잎 속에서

까맣게 홀씨로 익어가던 여름밤

집 떠난 둘째 언니는 소식을 끊고

감자꽃만 하얗게 이랑위로 흔들린다

기린처럼 키가 커진 시간 밖에선

달빛 아래 숨죽인 꽃망울들이

화르르 쏟아지던 여름밤

-시 <여름밤의 비몽(悲夢)> 전문

<여름밤의 비몽>에 고운 표현들이, 밑줄을 치고 싶은 표현들이 많다. ‘보름달이 기우는 밤/ 휘어진 숟가락 끝으로/ 별을 타서 마시던 밤’이란 표현이 압권이다. ‘달빛 아래 숨죽인 꽃망울들이/화르르 쏟아지던 여름밤’에서 보듯 ‘와르르’가 아니라 ‘화(花)르르’로 쓴 시인의 조어(造語) 능력도 인상적이다.

혈관마다 기억된 슬픔의 문장들이

올 풀린 날실처럼 흘러내린다

초승달과 보름달을 번갈아 갈아치우며

이십사절기를 꿀꺽 삼킨 채로

변신을 거듭하는 계절이 찾아올 때마다

시큼하게 삭은 문장들 토막난 채 뒹군다

혈관 속 기억들은 모두

핏덩이로 엉겨 자취를 감추고

초록이 구름처럼 일어서던 날들

분말로 날리던 유골함의 온기를

영원히 가슴에 묻을 거라고

슬픔을 빗줄기처럼 세고 다녔다

웃자란 감정들이 토닥여지고

나는 구름 속에 가볍게 안착했다

피딱지 떨어진 붉은 상처에는

죽순 같은 뽀얀 새살 돋아나고

기억은 종말처럼 아득함으로

시간의 종탑 위에 어제를 세워두었다

-시 <기억의 종말> 전문

<기억의 종말>에서 ‘나는 구름 속에 가볍게 안착했다’는 문장에 머무르게 된다. 신(神)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만의 고통을 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망각이라는 지혜도 선물하셨다. ‘시큼하게 삭은 문장들’을 사랑하는 시인은 사라지기 직전의 ‘어제’를 문장으로 세기는 조각가다.

어둠의 심장이 불룩해지는 저녁

발걸음이 심장을 쓸고 간다

카센터 앞을 지나가는데

하루의 노동을 밀어내듯이

다 닳은 폐타이어가

한쪽 구석에 쌓여 있다

한때는 탄력으로 공처럼 튀어 오르던 그의 여름

고속도로를 바람처럼 달려가고

매일 매일이 탄성으로 부풀어 오르던 시간

손금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몸

그 몸 위로 어둠이 는개로 내린다

폐타이어가 된 아버지 요양병원에 모시고

뻘밭 속 같은 밤길을 걸어가던 밤

택시 타고 네 엄마한테 가자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천 개의 이명으로 내 귀에서 바람소리로 운다

나무껍질 같은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시던

그 밤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득 뒤돌아보는 아득한 어지럼증 그 너머로

아버지의 저문 시간이

내 발뒤꿈치를 잡아끈다

폐타이어처럼 방치된 아버지의 시간

그 시간이 가슴에 병풍처럼 서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아득한 그 길의 북극성

-시 <폐타이어> 전문

이 문장, ‘택시 타고 네 엄마한테 가자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이/ 천 개의 이명으로 내 귀에서 바람소리로 운다’는 이 문장이, 어지럼증처럼 울림을 준다.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누구나 머릿속에 ‘북극성’ 같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려 보리라. 그리고 <요양병원 407호>호도 읽는다.

매달린 수액 사이로

그의 시간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걸어온 들판을 버리는 일

발자국도 지워지는데

간호사의 호출에

햇살이 가늘게 파르르 떤다

목울대 너머 불룩하던 시간도 잠잠하다

고양이 낮잠처럼

고요를 물고 누웠다

-시 <요양병원 407호> 부분

어슴푸레한 저녁이 곳곳마다 달집을 짓는다

별이 뿜어내는 숨소리들이 자욱한 안개로 일고

일터의 난간을 휘어잡고 오른팔로 견디는 사람들

저녁의 두꺼워진 등을 밀고 밀림 속을 걸어간다

물젖은 신발 끈을 단단히 묶어두고도

시린 것들은 언제나 또 다른 해양의 닻을 떠올린다

짙을수록 환해지는 아이러니의 터널 같은

산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의 통로를 건너 가는 일

덤블링처럼 덤벼드는 넝쿨식물의 본성 같은 세상이라는 파도

아직 짓지 못한 나만의 성을 위하여

촘촘한 어둠 속에서 길을 내며 간다

저녁은 빛바랜 시간을 어제처럼 걸어나오고

희미한 초승달 너머의 둥근 세상을 꿈꾸며

아직도 희망적이라는 명제를 걸어본다

-시 <저녁의 명제> 전문

이 <저녁의 명제>를 읽고 ‘일터의 난간을 휘어잡’은 노동자들은 혹시나 너무 위안이 되어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까. 우리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모두 ‘오른팔로’ 물구나무를 선 노동자들이 아닌가. 한술 밥을 위해 물구나무를 선다. 이 시를 읽고 한바탕 울고 나서 ‘물젖은 신발 끈을 단단히 묶어두고’서, 마음속에 ‘나만의 성을 위하여’ ‘희망적이라는 명제’를 갖게 될지 모르겠다.

소래포구 꽃게. 사진=조선DB

지금은 꽃게 철

시장 바닥에 꽃게가 탑처럼 쌓여

한 바구니 만 원, 만원

밤송이 같은 하루가

시장 바닥에 엎드려 있다

내 손님일까 아닐까

흥정을 놓고 벌이는 고수들

날선 눈동자에 불꽃이 튄다

손님의 꼬투리 어깃장에도

흔들림 없는 고수들

밀고 당기는 한 판승(勝)이다

곶감같은 얼굴에 웃음기 돌아오고

하루가 또 산을 넘어 간다

굴비 속처럼 엮인 하루의 노을 속으로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바람에 넘어 간다

-시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바람에 넘어간다> 전문

시의 화자가 ‘꽃게’인지 관찰자인 ‘나’인지 헷갈리지만, ‘시장 바닥에 엎드’린 꽃게의 이미지에 불탑(佛塔) 같은 종교적 색채가 드리워져 있다. 식탁 위에 오를 꽃게를 생각해 본다. 다라니경 한 페이지가 그릇 위에 올려져 있다고, 밥 상위에 불탑이 세워져 있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꽃게가 ‘나’라고 생각해 본다. (기자는 불교도는 아니지만) ‘꽃게’가 누구의 뱃속을 위해 기꺼이 죽는다면(이타적이라면) 분명 다음 생은 꽃게로 태어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