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집에 침입한 도둑이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내주었다고 해서 뺏긴 것이 아니라 도둑에게 선물 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저항은 피해자의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이 간단한 상식이 우리나라 성범죄 피해자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현실이다. 지난 20년 동안 1000건이 넘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등의 사건 변론을 해온 김재련 변호사가 최근 자신이 맡은 사건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맞부딪친 편견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젊은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의대생이 어쩌다가…”

대학교수, 국회의원, 목사, 유명 연예인, 대기업 직원, 고위 공무원, 의사 등 이미 숱한 가해자들을 본 김 변호사에게 가해자의 직업이나 신분으로 예단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이 편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하다. 김 변호사가 맡은 ‘의대생 성추행 사건’은 특히 더 큰 공분이 일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신분이나 소속에 따라 사건의 반향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끊임없이 지적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으레 들이대는 “왜 소리 지르지 않았어?”, “그런 일이 있고 클럽에 가서 놀아?” 같은 물음들을 김 변호사가 생생히 증언한다.

수사 당국에도 김 변호사는 당부의 말을 전한다. 그는 “사건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고 한다. 취업 면접을 본 여성이 합격 직후 ‘술을 사주겠다’는 대표를 따라갔다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도 당시 정신을 잃었던 피해자는 임신을 하고서야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됐다. 사건 장소가 모텔이었다는 것 외엔 당연히 그곳이 어딘지를 기억할 수 없었다. 김 변호사는 한겨울에 서울 강남에서 해당 모텔을 찾아 헤맸고, 끝내 찾아냈다. 모텔로 가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피해자 스스로 들어와 합의된 성관계를 했다는 가해자의 주장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피해자를 가해자가 끌다시피 데리고 올라갔다’는 모텔 아주머니의 증언으로 뒤집힐 수 있었다.

우리 수사 당국은 피해자의 진술을 들은 뒤 피의자를 불러 ‘피해자가 이렇게 얘기하는데, 맞냐 아니냐’를 확인한다. 그럼 피의자는 피해자가 말한 정보를 듣고 조사를 받고 나와 증거를 인멸할 수 있다. 모 대학 교수가 대학원생을 성폭행한 사건 현장 검증에서도 범죄 현장인 교수의 연구실은 ‘성관계가 이뤄지기 어려운 구조’라는 가해자의 주장과 함께 바뀌어 있었다.

최초 신고부터 현장 검증, 재판까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시간이다. 하지만 자책은 가해자의 몫이어야 한다. 교통사고 피해를 입었다고 다시 운전대를 못 잡는 건 아니잖나.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자들에게 전한다. 그래도 멋지게 살아내야 한다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연애도 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