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②] 재미있고 가슴 뭉클한… 자연의 순리처럼… : 월간조선

시조시인 이종문이 귀한 시집을 펴냈다. 시집 뒷장 표사부터 읽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고 가슴 뭉클한 시집을 내는 것이

나의 오래된 꿈이었다.

분수를 모르는 허황한 꿈인 줄

모르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꿈도 내 맘대로 못 꾸나 뭐.>

그리고 처음부터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갔다. 시인의 바람대로 재미있고 뭉클한 시들이 성찬을 이루고 있었다. 현란한 수사가 보이지 않았다. 짐짓 훈계하는 공리(公理)도 일부러 보이지 않았다. 심각하게 깨우치는 자통(刺痛)의 아픔이 없었다. 율격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3.4조 4음보 시조의 정형화된 틀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종문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저녁밥 찾는 소리》《봄날도 환한 봄날》 등 6권과 시선집 《웃지 말라니까 글쎄》, 산문집 《나무의 주인》을 냈다. 한국시조작품상,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 이영도 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고, 성주 가천의 가야산 농막에서 칠불봉 쳐다보며 지내고 있단다.

참 놀라운 일이구나, 이 호박씨 하나 속에

새파란 떡잎 두 장 고이 엎드리고 있다

각질을 우지끈 깨고 두 팔을 딱, 벌리다니

어안이 벙벙하구나, 바로 그 떡잎 속에

담장을 온통 덮을 긴긴 문장 품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풀어 자서전을 쓴다는 게

기적이 따로 없구나, 그 문맥 젖줄 물고

누렇게 익은 호박 그 소박한 씨앗마다

새파란 떡잎 두 장이 고이 숨어 있다는 게

-이종문의 시 ‘호박씨 하나 속에’ 전문

호박씨가 떡잎 두 장으로 변신하는 순간을 3.4조 4음보의 율격 안에 담았다. 씨를 뚫고 발아하는 순간을 ‘각질을 우지끈 깨고 두 팔을 딱, 벌리다니’로 재미있게 묘사한다. 하나의 초성이 한 음절이 되고 한 단어가 되며, 짧은 문장이 되어 한 문단을 이루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하듯, ‘소박한 씨앗’이 ‘새파란 떡잎’으로 발아해 ‘담장을 온통 덮을’ 넝쿨로 점점 자라 종국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이 되는 자연의 순리를 한편의 자서전처럼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나면 ‘새파란 떡잎 두 장’이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그리고 새싹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된다.

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보며’도 닮은꼴의 시다. 걸음마 배우는 아기의 두 발은 호박씨의 떡잎 두 장과 다르지 않다. 이 ‘두 발’이 점점 자라 세상을 다 가진 듯 쿵쾅쿵쾅 뛰어다니며 ‘무슨 무슨 일을 하고’, 자신만이 아니라 ‘처자식 먹여 살’리고 남[우리]을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걸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요 귀여운

두 발로다

어디 어디

다니면서

고사리

두 손으로

무슨 무슨

일을 하여

처자식

먹여 살릴까?

제 입에도

밥을 넣고

-이종문의 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보며’ 전문

이종문 시인

시 ‘내 비로소 철이 들어’도 감동적이다. 인생과 자연의 순리가 깊이 배어 있는 시다. 어린 시절, 바닷물이 강물에 물을 조금씩 나눠준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마저 다 빼앗아 간다고 분노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바닷물이 강물들을 죄다 수탈해 가는데도 강물이 여전한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알게 되었다. 바닷물이 구름과 비가 되어 강물에 물을 조금씩 나눠주는 것이라고…. 자연의 순리는 마치 인생의 경험과 같이 세월이 흘러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때가 떠오른다 저 광활한 바닷물이 강물에 물을 조금씩 나눠준다 착각했던 일곱 살 여덟 살 무렵 철이 조금 덜 들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세상에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마저 다 빼앗아 가는 것에 뜨겁게 분노하면서 머리띠를 둘렀던,

그때가 떠오른다 놀랍게도 바닷물이 조그만 강물들을 죄수탈해 가는데도 강물이 여전한 것을 의아하게 여겼던,

이제 좀 알 것 같다 내 비로소 철이 들어 저 광활한 바닷물이 구름 되고 비가 되어 강물에 물을 조금씩 나눠주고 있다는 걸

-이종문의 시 ‘내 비로소 철이 들어’ 전문

그러나 시인은 ‘뭉클한’ 감동과 더불어 재미를 주는 시를 쓰고 싶다. ‘능청스레 폭소를 불러일으켜 잔치의 풍경을 꿈꾼다. 시가 이런 식으로 일상의 생활 속에서 소비될 때, 해학의 언어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 된다.’(문학평론가 오민석).

비 온 뒤 골목길에 두꺼비가 앉아 있다

그냥 하도 심심해서 발로 툭, 툭, 건드리니

슬며시 몸을 비틀어 왼쪽으로 냅다 뛴다

일마가 제법이네, 앞을 가로 막고 서자

다시 몸을 왼쪽으로 비트는 척하다가는

도리어 오른쪽으로 죽을 둥 살 둥 뛴다

헐레벌떡 앞질러 가 바로 앞에 딱 버티니

한참을 심호흡하며 두 눈 부릅뜨더니만

날 향후 후닥닥 뛴다, 아이쿠나 식겁이야!

-이종문의 시 ‘아이쿠나 식겁이야’ 전문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던가? 시인은 두꺼비에게 괜히 심술을 부린다. ‘심심해서 발로 툭, 툭, 건드리’고 두꺼비의 도망치는 방향에 따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막아서니 ‘죽을 둥 살 둥 뛴다’. 도망치는 놈을 앞질러 ‘딱 버티니’ 두꺼비는 ‘두 눈 부릅뜨더니만’ 시인을 향해 달려든다. 놀란 시인의 탄성. ‘아이쿠나 식겁이야!’.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뭘 배울 수 있을까. 약자를 괴롭히지 말라?

사람과 두꺼비는 저마다 삶의 영역이 다르다. 다른 영역을 함부로 침범해선 곤란하다. 그것은 자연질서를 깨는 일이다.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을 깰 수 없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두꺼비가 꿈속에서 뛰어다닐지 모른다. 그러니 괴롭혀선 안 된다.

조그만 상을 탔다, 고향에서 주는 상을

수상 꽃다발을 엄마 품에 폭 안겼다

기저귀 차고 누우신 아흔네 살 얼라 품에

어디에 그런 힘이 아직 남아 있었는지

들입다 일어나서 큰 박수를 냅다 치고

꽃다발 굽어보시다… 폭 쓰러져 주무셨다

히죽이죽 웃으시며 콜콜 잠든 엄마 보며

내 잠시 기도했다. 벼락 맞고 남을 기도

그토록 행복하신 잠 그마 깨지 마이소

-이종문의 시 ‘그마 깨지 마이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