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길 시인의 시·산문집 《석남사 도토리》(브로콜리숲 간)가 나왔다.

1939년생인 시인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수료한 뒤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리미》, 《날은 저물고》, 《헛간》, 《보리곡식을 걷을 때의 슬픔》, 《복개천》등 16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펴냈다.

노시인은 시·산문집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원님 덕에 나팔 불다》라고 하고 싶었다. 시끄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평생 나팔을 불었으니 나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다행히 나의 원님은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다. 평생을 쳐다보아도 아무 말도 소리도 없는 그 하늘을 보고 나는 나팔을 불었다”

 이문길 시인의 시산문집 《석남사 도토리》(브로콜리숲 간)

시인의 목소리에는 삶의 통찰이 담겨 있다. 잔잔하지만 진지한 그만의 인생이 글 속에 문장에 담겨 있다. 문학이 무엇인지, 시가 무엇인지 그의 작품을 통해 알 것만 같다. 세속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의 눈은 세속을 넘어 ‘하늘’을 향해 있다. 그의 시선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듯하다. 달관이란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을 몇 편 소개할 수 있어 행복하다.

<석남사 도토리>

  타향이라 아는 사람도 없고 혹시 글 쓰는 사람 있을까 찾아보아도 없어 혼자 가까운 수락산 석남사에 자주 갔는데 그곳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다. 석남사 안에서 도토리를 줍다가 늙은 여승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석남사에는 가지 않는다.

  석남사는 수락산 북쪽 골짝에 있다. 시멘트로 지은 커다란 절인데 언제나 인적이 드문 텅 빈 절이다. 어쩌다 한두 번 목탁소리가 나고 염불 소리가 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사람 없는 그 절이 좋아 그 절에 갈 때마다 절 뒤안을 한 번 둘러보고 작은 부처가 머리에 가득 붙어있는 불상을 돌아 누가 있는가 산을 한 번 살핀 후 산신각 처마 밑에 앉아 가지고 간 시작 노트를 꺼내어 보았다. 그날도 늦가을 바람에 낙엽 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 속에 어디선가 투닥투닥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자세히 보니 산신각 주변에 커다란 도토리 나무들이 있어 살찐 도토리가 가득 떨어져 있었다.

  이튿날 나는 비닐봉지 한 개를 가져가 떨어진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도토리는 아무도 줍지 않아서인지 산비탈 철조망 아래까지 떨어져 있었다. 내가 거기까지 갔을 때였다. 담 밖 개울에서 갑자기 큰소리로 여자의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그 절에 있는 늙은 여승이었다.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절밖에도 도토리가 많은데 왜 절 안에서 도토리를 줍느냐면서 꾸중을 했다. 알고 보니 그 늙은 여승은 절 안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는 절의 것이라 그냥 두고 우선 절 밖에 있는 도토리부터 줍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산에 있는 도토리라 그냥 주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절 안의 것은 아무나 주우면 안 되는 줄 비로소 알았다. 그 여승은 내가 도토리를 주우러 담을 넘고 들어온 도둑처럼 여겼다. 자꾸 어디로 들어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문으로 들어왔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여승이 빨리 나가라고 자꾸 고함을 쳐 주운 도토리를 버릴까 망설이다 괘씸한 생각이 들어 조금 주운 도토리 봉지를 들고 산에서 내려오다 길에서 엄마와 함께 도토리를 줍고 있는 아기에게 주었다.

  엄마는 고맙다고 자꾸 인사를 했다.

  나는 그날 도둑 신세가 되어 도망치듯 그 절을 내려오고 말았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석남사에 가지 않는다. 석남사 오르는 길에 토종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살구가 익을 무렵이면 거기까지 가보고 싶었으나 가지 않았다. 혹시 그 무서운 늙은 여승을 만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도토리를 줍던 날로부터 10여 년이 지났으니 그 욕심 많은 늙은 여승이 죽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절에는 가지 않았다.

  한 해가 저물어 가을바람이 불면 산골짝에는 도토리, 산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산밤을 줍는다고 아내와 둘이서 앞산을 넘어 고산 신숙주 묘 앞까지 갔던 일도 옛일이 되었다.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어디 가면 도토리나무가 있고 어디 가면 밤나무가 있는지 알고 있다. 주워와 반으로 쪼개어 길에서 말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레가 많아 보관할 수 없었다. 우리 아파트 뒤안 뒷문 밖 근린공원에도 도토리는 있다. 언젠가 도토리를 주워 주머니에 넣어 와 삶아 베란다에 널어 말렸더니 푸른 곰팡이가 피어 모두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산에서 도토리나 밤을 다 주우면 산 짐승들이 굶어 죽는다고 하며 주운 것을 다시 산에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아파트 앞은 길 건너면 부용산이라 아카시아꽃이 피면 그 향기를 맡느라 밤에 창문을 열어두고 자고 아카시아꽃이 지고 산밤꽃이 피면 비릿한 냄새가 나서 문을 닫고 잤다. 근래에는 산에 도토리나 산밤을 줍는 사람이 없어졌다. 나도 벌레 먹은 산밤을 줍기 싫어 시장에서 밤을 사 먹는다. 이따금 석남사에 그 늙은 여승이 죽고 없는지 가보고 싶지만 이제 운전하기 어려워 가지 않는다.

  가을에 근린공원 벤치에 앉아 도토리가 투닥투닥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도 줍지 않는다. 떨어져 굴러가는 것을 보아도 줍지 않는다.

이문길 시인 

<칙칙폭폭>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 새벽 두10시 잠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아파트가 객차 같다. 대부분 불 꺼져 있으나 밤새도록 불 켜진 집도 있다. 참으로 먼 길을 모두 객차 타고 온 것 같다. 불 꺼진 집은 손님을 내려 주고 온 빈 객차 같다. 어디에서 환승하고 온 사람들 모두 고단한 것 같다.

  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빈집 같은 집에 혼자 서성이며 살고 있다. 어디론지 떠나지 못하고 기차가 갈 때까지 기다리며 살고 있다. 옛날 칙칙폭폭 칙칙폭폭 증기기관 완행열차가 가다가 쉬고 있는 시골 정거장 그 객실 나무 의자에 앉아 기차 떠나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한밤중에 어디로 가는지 꽤액 소리 지르며 급행열차가 지나가고 나면 가려고 기다리는 시골 정거장에 있는 완행열차, 졸다 깨어 내다보는 아파트는 캄캄한 산중에 쉬고 있는 객차 같다.

  어저께도 이삿짐 차가 와서 사다리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이사를 갔다. 누가 갔는가 문 열려 있는 빈 집안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스산하다. 쓰레기장에 혹시 쓸만한 것이 있는가 가보니 농짝도 있고 의자도 있고 매트리스, 빈 화분도 있다. 떠날 때마다 버리는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나는 우리 집 앞에 누가 사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아이들 소리가 나더니 조용해지고 새사람이 살러 오는 것 같더니 한 해 지나지 않아 또 어디로 가는지 이사를 했다. 누가 사는지 모르니 엘리베이터 안에 마주 서 있지만 인사도 안 한다.

  우리 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앞산에도 무엇인가 왔다 가는 것 같다. 겨울이면 커다란 노루가 양지쪽에 와서 자고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순환도로가 생기면서 굴이 뚫리고 복토해 놓은 곳에 꽃들이 와서 살다가 간다. 애기똥풀이 피어있더니 어디론지 가고 기생초가와서 살고 있더니 가고 지금은 노오란 금계국이 가득 피어 가지 않고 살고 있다. 금계국은 북미 텍사스에 살던 꽃인데 안 가는 것을 보면 자리잡아 살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원예사였지만 달마다 무슨 꽃이 피는지 잘 모른다. 나는 모를 때는 아내가 좋아하는 화투를 생각한다. 1월은 한겨울이라 꽃이 없고 2월은 매화, 3월은 벚꽃, 4월은 흑싸리, 5월은 난초, 6월은 목단, 7월은 홍사리, 8월은 공산이고 9월은 국화, 10월은 단풍, 11월은 모르겠고 12월은 오동나무 똥통이다. 겨울이 될 무렵 꽃 같지 않은 꽃양배추가 있지만 나는 꽃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 아파트는 여인숙 같다. 경기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그리고 멀리 제주도가 고향인 여인이 손주를 돌봐준다고 와서 살고 있다. 새벽 3시, 아직 불 끄지 않고 켜둔 집이 있다. 환승하려고 짐 싸는 집인지 모르겠다. 언제 떠나려나 캄캄한 산속에 서 있는 객차 같은 아파트. 새벽 4시쯤 흰 연기를 뿜으며 꽤액 소리를 지르고 떠나려나 창밖을 내다본다.

일러스트=조선DB

<아파트>

위층에 사는 아기 발소리가 듣기 좋아

아기 어머니에게 마음대로 뛰고 놀게 하라고 했는데

해가 갈수록 조용해지더니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기가 다 커 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몇 년 전 이사 간 남자는

어른이 자꾸 쿵쿵대며 걸어

속이 상해 올라가 얘기했더니

밉다고 더 쿵쿵대다 이사를 했다

이제 그 발소리 듣고 싶다

죽으면 없는 소리 떠나면 없는 소리

아내 떠나고 혼자 사니

사람 소리 듣고 싶다

아기 우는 소리

쿵쿵대며 뛰는 사람 발소리

<섬>

  물이 없으면 섬도 없다는 것을 나는 세상 살다가 알았다.

  나는 어릴 적 배가 물 위에 뜨는 것이 이상했다.

  사람이 배를 타고 오고 가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물속에 있는 땅과 물 위에 있는 땅이 다른 줄 알았다.

  나는 내가 물 위에서 숨 쉬며 살고 있는데 물속에 사는 것은 어떻게 물속에서 숨 안 쉬고 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늦게야 알았다, 물 위에서 사는 것은 물속에 못 살고 물속에서 사는 것은 물 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물속에서 놀다가 물속에는 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물 위에도 세월이 흘러가고 물속에서도 세월이 흘러간다는 것을 알고 세상이 허무했다.

  나는 세상 어디에도 숨어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속에서 흘린 눈물은 물 때문에 안 보이고 물 밖에서 흘린 눈물은 바람 때문에 안 보인다는 것을.

  나는 어릴 때 물고기들이 걸어 나와 허덕이다 죽는 것을 보고 내가 물 위에 사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왜 물 위에 살고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은 섬이 아니고, 왜 물 위에 남아 있는 것이 섬이 되는지. 그리고 왜 섬이 배처럼 떠다니면 안 되는지.

사진=조선DB

<금달래>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 집에 자주 오는 단골무당이 있었다. 큰길 건너 이웃 동네에 혼자 살았는데 엄마는 그 무당이 잘 맞힌다고 하여 그 무당과 친하게 지냈다. 나는 그때 엄마가 무엇을 묻고 그 무당이 무엇을 맞췄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때 아버지가 죽고 빈집 같은 커다란 기와집에 일하는 누나와 셋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 식구는 그 무당이 오면 모두 반가워했다.

  엄마는 그 무당이 오면 밥을 잘 차려주었고 우리들 모르게 용돈도 주었다. 엄마는 무엇인가 답답한 일이 있으면 누나에게 그 무당을 불러오게 했다.

  그 무당은 우리 동네에서는 모두가 잘 아는 무당으로 ‘금달래’ 라고 부르며 천히 여겼다. 나는 그때 그 여인을 왜 금달래라고 불렀는지 지금도 모른다. 아마 동네를 별 하릴없이 돌아다닌다고 그런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나 생각될 뿐이다. 금달래는 다른 무당처럼 화장도 하지 않고 굿도 하지 않았다. 옷도 무당 옷을 입지 않고 부엌일 하는 누나같이 때 묻은 현 치마를 입고 다녔다. 나는 그 무당이 오면 무엇인지 좋은 소식을 알려줄 것 같아 반가웠다. 그 무당의 눈이 약간 이상하여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나는 때 묻은 옷에서 누나와 같은 냄새가 나서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금달래가 우리 집에 왔는데 나를 보더니 예수 귀신이 붙었다고 하며 나를 보는 눈이 이상했다. 나는 너무 놀랐다. 왜냐하면 그 금달래가 나의 행적을 알아 맞췄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우리 동네 아이들과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오자 하나밖에 없는 동네 교회에 모여갔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오면 반가워하며 사탕도 주고 떡도 주었다. 그뿐 아니다. 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도 불렀다. 연극도 했다. 나는 그때 교회에서 주는 사탕이나 떡 같은 것은 정말 하나님이 주는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선물을 받을 때마다 모두 좋아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물이 마을 가난한 사람들의 헌금으로 마련됐다는 것을 알고 선물이 싫었고 먹어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지나 교회에서 먹을 것을 주지 않자 교회에 가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교회 살림을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어 교회에 가기 싫었다.

  엄마와 금달래는 오랫동안 잘 지냈는데 엄마는 어느 날부터 그 금달래를 못 오게 했다. 엄마가 궁금하여 물어본 것을 하나도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 자꾸 하였기 때문이다. 동네에서는 금달래를 따라다니던 신이 떠났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금달래를 더이상 부르지 않았고 그 무당이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내게 예수 귀신이 붙었다고 하던 그 무당이 보고 싶었다. 나는 그 무당을 보면 이제 예수 귀신이 떠났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달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고 했다. 그가 죽은 지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거두어주지 않고 냉대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씩 어릴 적 일이 생각나면 그 점 못치던 불쌍한 금달래가 생각나고 보고 싶어진다. 내 몸 어디에선가 자꾸만 그 금달래 냄새가 나는 것같아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