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김일형, 이동순, 이구락, 서종남의 신작 시집 : 월간조선

1. 김일형 시인의 시집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

김일형 시인의 첫시집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문화발전소 간)의 첫 장 ‘시인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심장이 떨고 있다. 필시 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쓰러져야 하는지 두려운 것이다.>

이 문장이, 배경을 알 수 없는 이 문장이 눈길을 끈다. 시집을 관통하는 의미가 궁금하다. 시집 전체를 읽어야 의문이 풀릴 것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시를 쓰는 자세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문화발전소 간)

표제시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를 읽어 보았다.

눈발 날린다

양들이여

굳세게 옆구리를 맞대고 얼굴을 바짝 들이거라

메붙이는 이 바람 파고들어도

겨울 오면 풀씨도 따라올 것이다

풀씨들의 눈가에 함박미소 속살거릴 것이다

바람이 오고 양 떼가 오고

사람이 사람들이 뒤따라올 것이다

양들아, 풀씨를 뿌리자

눈발 날린다

-김일형의 ‘눈발 날린다 풀씨를 뿌리자’ 전문

눈이 쏟아지는 한겨울, 얼굴을 바짝 든 양떼를 관찰하며 봄노래를 부르고 있다. 눈발을 보고 양떼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메붙이는 바람’ 속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양떼를 끄는 어린 양치기가 태초의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상상을 해본다.

눈발과 풀씨를 연결시키는 시인의 시선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시 ‘새의 지문’도 단단하다. 손안에 누인 새를 보면서 새 발가락 마디의 옹이를 보면서 새의 일생을 시로 완성한다.

어둠에 흔들리지 않았겠다

수수 줄기같이

속이 텅 빈 다리만 남기고

어디 가고 없다

햇살에 비친 붉은

실핏줄 하나가

아침을 물고 있었을 것이다

길게 휘어진

사마귀 발톱도

매의 날 선 부리도 무섭지 않았겠다

발가락 마디 옹이 지문이

굴참나무 껍질을 닮아서

나무가 내어준

가지를 억세게 움켜쥘 수 있었겠다

손안에 누인 후에야 너를 본다

-김일형의 ‘새의 지문’ 전문

시 ‘결’, ‘까치눈’, ‘달항아리’를 음미하며 읽었다. ‘누운 주목의 하얀 뼈를 하얗게 덮는다’는 시 ‘눈꽃’도 여운을 준다. 시인 김일형은 《월간 시》의 윤동주 신인상 제1회 수상자다. 그는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모습과 현상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아내는 휴머니스트”(유자효 시인)다.

2. 이동순 시인의 시집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가요평론가인 영남대 이동순 명예교수가 등단 50주년을 기념한 시선집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신선사 간)을 펴냈다. 그는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 《개밥풀》《물의 노래》《지금 그리운 사람은》《철조망 조국》《그 바보들은 더욱 바보가 되어간다》 등 21권을 펴냈다.

눈 쌓인 산길

그 등성이 나무숲 사이에서

나는 보았다

하얀 눈 위에 찍혀서

어디론가 길게 이어져 있는

산짐승의 발자국을

적막한 밤

혼자 지향 없이 해매 다니던 쓸쓸한 시간들이

고달픈 자신의 온몸으로

이 지상에 찍어 놓은 무수한 도장을 그 애련의 흔적을

-이동순의 ‘발자국’ 전문

시인은 시선집에 담긴 시들을 ‘애련(哀憐)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50년 동안 쓴 시들에게 가엾고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예전 산을 즐겨 다닐 때 이른 아침 눈 쌓인 산길, 그 등성이 나무숲 사이에서 나는 보았다. 하얀 눈 위에 찍혀 어디론가 길게 이어져 있는 산짐승의 외로운 발자국을 분명히 토끼나 고라니의 발자국이었으리라.

나의 시 ‘발자국’의 한 대목처럼 그것은 적막한 밤, 녀석들이 혼자 지향 없이 산중을 헤매 다니며 땅 위에 찍어 놓은 무수한 도장이다. 그 애련(哀憐)의 흔적이다.

그간 펴낸 21권의 시집을 다시 더듬노라니 내가 지상에 찍어 놓은 애련의 발자국은 왜 이렇게도 많고도 번잡한가.

등단 50주년, 그 발자국을 더듬다가 창밖을 보니 이미 가을이 깊다. 지치고 힘들지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인의 길을 또 걸어갈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신나는 꿈》(신선사 간)

첫 시집의 표제시인 ‘개밥풀’은 지금 읽어도 명작이다. 개밥풀은 ‘개구리밥’이라는 여린 식물을 말한다. 개밥풀은 김수영의 ‘풀’, 이성부의 ‘벼’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숨죽이며 울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봄의 번성을 꿈꾸는 우리의 삶, 민중의 함성을 보는 듯하다.

아닌 밤중에 일어나

실눈을 뜨고 논귀에서 킁킁거리며

맴도는 개밥풀

떠도는 발끝을 물밑에 닿으려 하나

미풍에도 저희끼리 밀고 밀리며

논귀에서 맴도는 개밥풀

방게 물장군들이 지나가도

결코 스크램을 푸는 일 없이

오히려 그들의 등을 타고 앉아

휘파람 불며 불며 저어가노나

볏짚 사이로 빠지는 열기

음력 사월 무논의 개밥풀의 함성

논의 수확을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함부로 버리며

우리의 자유를 소중히 간직하더니

어느 날 큰비는 우리를 뿔뿔이 흩어 놓았다

개밥풀은 이리저리 전복되어

도처에서 그의 잎파랑이를 햇살에 널리우고

더러는 장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어디서나 휘몰리고 부딪치며 부서지는

개발풀 개밥풀 장마 끝에 개밥풀

자욱한 볏짚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고 사이

논바닥을 파헤쳐도 우리에겐 그림자가 없다

추풍이 우는 달밤이면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옷깃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귀뚜라미 방울새의 비비는 바람

그 속에서 우리는 숨죽이고 운다

씨앗이 굵어도 개밥풀은 개밥풀

너희들 봄의 번성을 위하여

우리는 겨울 논바닥에 말라붙는다

-이동순의 ‘개밥풀’ 전문

이동순의 ‘물의 노래1’도 명작이다.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수몰민의 사연을 담은 많은 작품 중 이 시만큼 절절한 노래가 또 있을까.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는 2행에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고, 8행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 꿈에 가위눌리니’를 읽고 가위눌림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을 읊조려 본다. ‘나 또한 한 많은 물방울 되어 세상 길 흘러 흘러/ 돌아가 고향 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

죽어 물이나 되어서 천천히 돌아가리

돌아가 고향 하늘에 맺힌 물되어 흐르며

예 섰던 우물가 대추나무에도 휘감기리

살던 집 문고리도 온몸으로 흔들어보리

살아생전 영영 돌아가지 못함이라

오늘도 물가에서 잠긴 언덕 바라보고

밤마다 꿈을 덮치는 물 꿈에 가위눌리니

세상사람 우릴 보고 수몰민이라 한다

옮겨간 낯선 곳에 눈물 뿌려 기심 매고

거친 땅에 솟은 자갈돌 먼 곳으로 던져가며

다시 살아보려 버둥거리는 깨진 무릎으로

구석에 서성이던 우리 노래도 물속에 묻혔으니

두 눈 부릅뜨고 소리쳐 불러 보아도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만 나루터에 쌓여갈 뿐

나는 수몰민 뿌리째 뽑혀 던져진 사람

마을아 억센 풀아 무너진 흙담들아

언젠가 돌아가리라 너희들 물 틈으로

나 또한 한 많은 물방울 되어 세상 길 흘러 흘러

돌아가 고향 하늘에 홀로 글썽이리

-이동순의 ‘물의 노래1’ 전문

‘아버님의 일기장’은 노년의 외로움을 담은 시다. 아버지가 떠나고 집은 빈집이 되었다. 어느 날 빈집에 갔다가 아버지가 쓰신 일기장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本家’ 뿐이다. 팔할이 넘는 일기가 ‘종일 본가’다. 시인은 해도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 끼시고 어둔 방에서 날마다 ‘종일 본가’를 또박또박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시인이 ‘아버지’라고 쓰지 않고 ‘아버님’이라고 쓴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남기신 일기장 한 권을 들고 왔다

모년 모일 ‘終日本家’

‘종일 본가’란

하루 온종일 집에만 계셨다는 이야기다

이 ‘종일 본가’가

전체의 팔 할이 훨씬 넘는 일기장을 뒤적이며

해도 저문 저녁

침침한 눈으로 돋보기 끼시고

어둔 방에서 날마다 ‘종일 본가’를 또박또박 쓰셨을

아버님의 고독한 노년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일부러 ‘종일 본가’를 해보며

일기장의 빈칸에 이런 글귀 채워 넣던

아버님의 그 말할 수 없이 적적하던 심정을

혼자 곰곰이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동순의 ‘아버님의 일기장’ 전문

3. 이구락 시인의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

이구락의 시집 《이구락의 오행시편》(문학의전당 간)은 장르적 도전을 선언한 용기, 배포가 느껴진다. 첫 시도부터 자그마치 20년의 결실을 담았다. 5행시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데 하고 싶은 말을 다 담는다. “그의 5행시에의 고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내공은 또 얼마나 탄탄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손진은 시인)

가파른 언덕배기마다 우우우 몰려나와 아우성치던 매화

눈 덮인 지리산 흰 머리채 잡아당기더니

냅다 시린 강물에 패대기치며, 제 힘에 겨워 함께 뒹구는

이월의 마지막 날 대낮이렷다

부르르 몸 떨며, 어질어질 멀미 하는, 저 섬진강

-이구락의 ‘매화꽃 멀미’ 전문

매화가 피는 봄의 생명력을 ‘아우성치던’ ‘잡아당기더니’ ‘ 패대기치며’ ‘어질어질 멀미 하는’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매화찬가도 매력적이다. 매화가 핀 모습을 ‘불 밝힌다’고 쓰면서 영각(影閣) 안 부처님이 ‘매향 공양 받으며 홀로 미간 붉히신다’며 탐미적으로 묘사한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면서 단순한 이미지즘을 넘어 “우주적 비의”(손진은 시인) 같은 무형의 진실을 포착하는 듯하다.

영축산 통도사 영각 앞, 자장대사 닮은 한 그루 고매(枯梅)

한 해를 기다려 오늘 아침 환하게 불 밝혔다

새벽부터 찾아온 이들이 저마다 서둘러 카메라에 담아간다

그들이 간밤에 지은 죄의 무게만큼 마음 내려놓고 간 뒤

비로소 영각 안 부처님도 매향공양 받으며 홀로 미간 붉히신다

-이구락의 ‘통도사 자장매 ㅡ 탐매시(探梅詩)1’

《이구락의 오행시편》(문학의전당 간)

‘탐매시3’도 아름다운 시다. 시인은 갓 핀 홍매를 두고 동안거, 선승, 두려운 화두 빛, 갠 눈, 머금은 눈물, 친견 등등 다양한 비유를 쏟아낸다. 자연을 노래하지만 자연 너머의 질서, 혹은 생명의 경배가 느껴진다.

갓 핀 홍매 한 송이와 그 옆의 꽃망울 두엇

동안거 마치고 막 세상으로 걸어 나온 선승 같다

긴 어둠 모진 추위 부둥켜안았던, 두려운 화두 빛이다

갠 눈 갓 녹아 눈물 머금은 듯 새로워라*던

납월홍매(臘月紅梅), 오늘은 마침내 나도 친견한다

-이구락의 ‘금둔사 납월홍매 ― 탐매시3’

*청설초소숙루신(晴雪初消宿淚新): 신라 시인 최광유가 금둔사의 매화를 읊은 시 ‘납월매’의 한 구절.

20년 전에 쓴 첫 5행시의 작품이 ‘달빛 경전’이다. 1행은 기, 2~3행은 승, 행은 전, 행이 결에 해당한다. 그에게 자연과 우주는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 덩어리다. 생명을 불어넣는 조물주의 손길로 노래한다. 시인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오행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겨울 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

겨울 산에 눈 내리면 밤이 길다

긴 겨울밤 눈에 갇혀 산사(山寺)는 열반에 들고

풍경 홀로 얼지 않고 밤새도록 염불 왼다

달빛이 눈 위에다 그걸 받아쓰고 있다

-이구락의 ‘달빛 경전’ 전문

ps... 이구락 시인은 시집 첫 머리 ‘시인의 말’을 오행시로 표현했다. ‘홀로 반짝이다’ ‘이슬처럼’ 사라지더라도, 시의 꽃을 밝히는 ‘좋은 거름’이 되리라는 기대와 설렘을 담았다.

나의 오행시는 오랫동안 서랍 속에 쌓여 홀로 낡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으로 흘려보내 자유롭게 떠돌게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떠돌다 어느 언덕 가시덤불에 걸려 다시 일어나지 못하더라도,

홀로 반짝이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처럼 별처럼

그곳에 잠들어 좋은 거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4. 서종남 시인의 시집 《알곤킨의 칠면조》

서종남 시인의 시집 《알곤킨의 칠면조》(한국힐링문학 간)를 읽는다. 알곤킨은 캐나다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온타리오 주에 있는 주립공원이다. 공원 안의 크고 작은 호수만 2000개가 넘고 공원 면적이 서울시의 10배나 된다고 한다. 서식하는 동식물만 1000여종이고 운이 좋으면 곰을 만날 수도 있다.

시인은 ‘무아의 밀림’ ‘오솔길도 없는 풀밭을 따라’ 걸으며 숲속의 비밀, 대자연의 축복에 감탄한다. 오직 시인만이 ‘작은 풀벌레 소리’를 ‘숲의 신비한 숨은 이야기’로 들을 줄 안다. 시인도 대자연의 일부가 되어 ‘아름드리 측백나무 상수리나무들과 한 몸 토양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