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시(純粹詩)의 미학과 자존을 지키다’…〈시인수첩〉 시인선의 출항 : 월간조선

한국시단(韓國詩壇)에 새로운 ‘활력(活力)’이 등장했다. 동명영화(同名映畫)로 세계 판타지 시장을 제패했던 조앤 롤링의 원작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간하며 출판계에 인지도를 높인 문학수첩이 ‘시인수첩 시인선’ 간행을 시작, 한국문단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당초 출판사 문학수첩은 지난 2003년부터 동명의 종합 계간문예지를 간행하다 2009년 겨울호(통권 28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돌입했다. 이후 2011년 김종철 시인(문학수첩 대표 및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2014년 타계)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 전문지’를 표방하며 사재 20억 원을 쾌척하며 시(詩)전문 계간문예지 〈시인수첩〉을 출범,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다.

고(故) 김종철 시인, 문학수첩 대표. 사진=조선DB

〈시인수첩〉은 2011년 여름 창간호 당시 “시인들만의 시 전문지가 아닌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시 전문지를 표방하고자 한다"고 창간 취지를 밝혔다. 독자 중심의 참신한 읽을거리와 다양한 볼거리를 통해 사람들 모두가 시문학을 어렵게 느끼지 않고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도록 ‘시의 대중화(大衆化)’에 앞장서온 것이다.

시전문 계간 문예지〈시인수첩〉.

올 6월 30일 간행 시작을 알린 ‘시인수첩 시인선(詩人選) 시리즈’ 역시 이처럼 작가와 독자 모두를 배려하는 〈시인수첩〉의 섬세한 문학정신(文學精神)과 접목돼있다. 2014년 문학수첩 대표인 김종철 시인이 타계한 이후 김 시인의 부인이자 공동대표였던 강봉자 여사는 평소 “한국문학에서 받은 은혜가 많다”고 했던 고인의 꿈을 새롭게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시인수첩〉의 종간(終刊)을 유지(遺旨)로 남긴 고인의 ‘더 깊은 뜻’을 잇고자 계간문예지를 계속 발행하기에 나섰고, 마침내 올해 들어서는 한국 시문학의 정체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시인선’까지 기획하게 된 것이다.

수년 동안 창작 시집 판매가 저조한 출판계의 풍토 속에서 주요 문학 관련 출판사가 시집 발간을 축소하거나 늦추는 가운데, 문학수첩은 시인선을 통해 올해 모두 10권의 시집을 엮어내는 의욕적 행보를 시작했다. 고운기 한양대학교 교수를 첫 번째 주인공으로 한 시인수첩 시인선은 유종인, 김병호, 임동확, 황수아, 이지호, 고재종 시인 등 세대와 계열을 초월한 작가들의 문학적 터전을 만들어줬다. 시인수첩은 대형 매체로부터 비롯된 섹트주의, 패거리주의를 거부하고자 하는 순수문학정신을 기초로, 현재 정체된 문학판에 창작의 전율과 기회의 장(場)을 열어젖혔다.

현재까지 출간된 시인수첩 시인선 시리즈.

최근 시인수첩 시인선에서 세 번째로 선보인 시집 〈백핸드 발리〉는 ‘직유(直喩)와 사랑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김병호 교수의 저술(著述)이다. 또래의 시인들이 미래파의 세례 속에서 주목을 받고 모더니즘의 경계에서 확장을 추구할 때 그는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의 경지를 개척했다. 저자는 본 시집 속에 고답적인 전통주의의 허울을 쇄신하고 감각적인 자아 성찰과 도저한 내면의 상상력으로 밀도 높은 ‘문학적 긴장’을 불어넣었다.

김병호 시인은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同)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이후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를 출간했으며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시인수첩〉 편집주간으로도 활동하며 시단(詩壇)과 교단(敎壇) 모두에서 활약 중이다.

일곱 번째로 출간된 김재홍 시인의 시집 〈주름, 펼치는〉 역시 주목할 만한 시인수첩 시인선의 대표주자다. 저자는 본 시집에서 깊이 있는 미학적(美學的) 인식과 대상의 내면을 통찰하는 힘을 보여줬다. 이는 대상의 근원 혹은 본질이 함축한 은폐된 슬픔과 고독, 암흑의 상처를 관통해내는 빛의 정신과 상통한다. 근대철학자 하이데거가 중요시했던 ‘세계의 떨림과 소리’를 경청하며, 저자만의 기민하고 날렵한 시적 상상력을 여러 편의 시세계 속에 구현한 것이다. 이를 일러 평단(評壇)은 ‘삼라만상의 태동, 그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시간의 분절(分節)과 주름의 시학’이라 명명한다.

김재홍 시인은 1968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성장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同) 대학원에서 문학이론을 전공했다. 200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이래 시집 〈메히아〉와 〈다큐멘터리의 눈〉을 상재(上梓)했다.

김재홍 시인.

《월간조선》은 한국시단의 새로운 희망과 활기를 불어넣은 시인수첩 시인선에 대해 계간문예지 〈시인수첩〉 편집주간인 김병호 교수의 얘기를 들어봤다. 이하는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어떤 계기로 시인수첩 시인선을 기획하게 됐나?

“문학수첩의 시집 시리즈가 기존에 있었다. 김남조, 오탁번 선생님 같은 원로시인들이 출간하시는 시인선이 따로 있었다. 그러던 차 이번에 아예 새롭게 해서, 기존의 것은 그대로 가고 투 트랙(Two Track)으로 ‘시인수첩 시인선’이라고 해서 따로 만든 것이다.”

‘투 트랙 전략’으로 시작한, 시인수첩 시인선의 중심과 방향은 무엇인가?

“문단을 보면 어떤 잡지는 젊은 시인들 중심으로 가고, 어느 잡지는 또 중견 이상 원로 시인들 중심으로 가더라.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 건 가운데 있는, 이른바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40~50대 시인들에 주목했다. 우리 시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서정시(抒情詩) 중심으로 가고자 한다. 문단에는 ‘문지(문학과지성사)’, ‘창비(창작과비평)’, ‘문동(문학동네)’ 말고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시인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런 시인들에게 적극적인 기회를 줬으면 한다.”

시인수첩 편집주간 겸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김병호 시인. 사진=월간조선

〈시인수첩〉 잡지에다 시인선까지 기획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실 시 잡지는 문단에 많지 않은가. 그런데 제대로 된 시집을 낼 수 있는 곳은 훨씬 적다. 그래서 시 잡지를 운영해 시인들에게 발표 기회를 주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만, 함께 좋은 시를 발굴해서 시집을 내는 일이 시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 하에 새롭게 출범하게 됐다.”

본인도 3번째 시인수첩 시인선으로 새 시집을 출간했다. 소회는 어떤가?

“교직으로 오기 전에 문학수첩 편집장으로 3, 4년 근무를 하며 계속 고(故) 김종철 선생님 옆에 있었다. 마치 고향집에서 시집을 낸 기분이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이번 시집을 준비하면서 나의 시세계도 변모하고 혁신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올해까지 시인수첩 시인선 10권을 출간한다던데, 내년에도 꾸준히 간행되나?

“현재까지 9권이 나왔고 다음달에 10권 째가 출간된다. 내년에도 두 분 정도 시집을 내기로 계약했다. 중견시인 한 분도 계약을 마친 상태다. 내년에도 한 10권 정도로 해서 매년 10권씩 출간할 계획이다.”

시집 출간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힘든 게 현실인데 시인선을 기획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같다.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문학수첩이 해리포터로 돈을 많이 벌었으니 시집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겠는가’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출간 비용 부담은 어느 출판사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강봉자 대표께서 가지고 계시는 ‘시에 대한 열정’이 나날이 커가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께서도 어느 정도 (비용 부담의) 일정 부분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만일 문예지나 시인선 발간 비용이 회사에 부담이 된다면, 대표께서 직접 사비를 지원해서라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말씀하실 만큼 시문학 발전에 대한 애정과 의지가 각별하시다.”

시인수첩 시인선의 문학적 지향성과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우리 시의 편향된 부분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우리 시의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할 수 있는 ‘긍정적인 힘’이 되고자 한다. 마치 독립군처럼 예술가들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튼튼한 운동장’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그래서 시인선 출간에 있어 시나 시인에 대한 특정한 방향성을 정해놓고 있지는 않다. 순수 서정시를 중심으로 하되, 모든 시인에게 기회를 골고루 마련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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