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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보

안에서 싸우다 망한 중국 왕조(王朝)들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본다 ④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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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당의 집권과 분열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재위 1085~1100년)이 즉위했다. 열 살밖에 안 된 철종을 대신해 할머니 고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고태후는 구법당의 영수인 사마광을 재상으로 등용했다.
 
사마광은 불후(不朽)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저자로 유명하다. 《자치통감》에서 사마광은 지도자는 열린 가슴으로 싫은 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하지만 사마광 자신은 정권을 잡자 독선과 아집을 드러냈다.
 
신법당 인사들은 숙청되고 왕안석의 개혁정책들은 모두 폐기됐다. 사마광은 일부 구법당 인사들조차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청묘법’도 폐기하려 했다. 같은 구법당인 소식(소동파)이 반대했다. 사마광은 크게 화를 냈다. 소식은 탄식했다.
 
“전에는 늘 누군가가 그 사람의 면전에서 바른 소리를 하면 그를 칭찬하면서 역성을 들더니, 재상이 되고 나서는 다른 사람이 입을 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소통’을 강조하더니 청와대 자유게시판조차 폐쇄하고, 조금만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 비난을 가하는 요즘의 행태와 비슷하다.
 
1086년 사마광이 세상을 떠났다. 영수가 사라진 구법당은 지연(地緣)에 따라 갈라졌다. 성리학자 정이의 낙당(洛黨), 소식의 촉당(蜀黨), 유지의 삭당(朔黨)이 그것이다. 정권을 잡은 후 영수의 집이 있는 곳을 따라 동인·서인·남인·북인 등으로 갈라졌던 조선 사림들의 경우와 흡사하다.
 
 
‘영혼 없는 관료’ 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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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적 관료의 전형이었던 채경.
1089년 고태후는 왕안석 등 신법당 인사 30여 명을 간당(奸黨)으로 규정, 전국에 그 이름을 공고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과거사 청산’ 놀음의 시작이었다.
 
1093년 구법당을 뒤에서 받쳐주던 고태후가 사망했다. 철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자 신당의 장돈을 등용했다. 장돈은 신법당 인사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구법당 인사들의 관작(官爵)을 삭탈했다. 구법당 인사들을 기리는 각종 비석 등도 파괴했다.
 
1100년 철종이 젊은 나이로 죽고 휘종(徽宗·재위 1100~1125년)이 즉위했다. 철종의 황후인 향태후가 후원하는 구법당의 한충언이 집권했다. 구법당은 다시 한 번 신법을 폐기하고 신법당 인사들을 숙청하는 한편, 구법당 인사들을 복권시켰다.
 
휘종이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향태후가 죽었다. 1102년 휘종은 한충언을 추방하고 신법당 출신인 채경을 재상으로 앉혔다.
 
채경은 카멜레온 같은 인간이었다. 그는 원래 신법당 소속으로 왕안석 시절에 수도 개봉의 시장(지사)을 지냈다. 구법당의 사마광이 집권한 후 5일 내에 면역법을 폐기하라고 전국에 지시했다. 대부분의 지방관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법을 폐기하는 데는 수개월은 걸린다”며 말미를 요청했다.
 
하지만 채경은 닷새 만에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을 복구했다. 사마광은 “전국의 장관들이 모두 채경과 같다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겠다”고 감탄했다. 이후 채경은 구법당 집권 기간 중 눈총을 받으면서도 벼슬자리를 지켰다.
 
1093년 장돈이 집권하자 채경은 다시 중앙 무대로 복귀했다. 장돈은 면역법을 부활시키기로 하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려 했다. 하지만 채경은 “논의는 무슨 논의, 그냥 왕안석 때 하던 대로 하면 된다”면서 면역법의 즉각 부활을 밀어붙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영혼 없는 관료’의 전형이었다.
 
 
송나라판 ‘블랙리스트’ 원우당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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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적폐청산 블랙리스트’ 원우당적비.
정권을 잡은 채경은 ‘적폐(積弊) 청산’에 나섰다. 먼저 사마광·소식·문언박·정이·황정견(화가·시인) 등 구법당의 요인들은 물론, 채경과 척진 일부 신법당계 인사 339명의 이름을 올린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들을 ‘원우당적인(元祐黨籍人)’이라고 했다(‘원우’는 구법당을 지지하는 고태후가 수렴청정하던 시절의 연호이다).
 
그 이름을 비석에 새겨 궁성 남쪽 정문인 단례문 앞과 전국 지방관청, 공자묘(孔子廟)에 세우게 했다. 이 ‘원우당적비’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중 살아 있는 자는 변방으로 영구히 유배를 보내고 그 자손들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언론부역자 리스트’ 등이 횡행하는 요즘의 한국과 비슷하다고 할까?
 
채경은 빈자리를 자기 말을 잘 듣는 능리(能吏) 스타일의 관료들로 채웠다. 이들은 실무 능력은 그럭저럭 있지만, 큰 정책을 기획하고 추진할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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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박의 두령 송강.
신법당이 정권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왕안석 시절 의기에 넘치던 개혁 세력이 아니었다. 구법당을 몰아낸 후 자기들끼리 부귀와 권세를 추구하는 추잡한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한때 ‘개혁’과 ‘진보’를 주장하던 386세대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은 후 온갖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이름을 더럽힌 것처럼 말이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휘종은 국정은 팽개쳐 두고 그림과 골동품, 도교(道敎)에만 관심을 쏟았다. 채경은 휘종이 좋아하는 서화와 골동품, 진귀한 동식물과 기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구해다 바쳤다. 휘종은 이렇게 모아들인 꽃나무와 돌을 가지고 궁성 한쪽에 높이 30m, 둘레 5km에 달하는 만세산(萬歲山)을 조성했다.
 
채경 일파가 ‘과거사 청산’에 몰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이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이들은 유민이나 도적이 됐다. 《수호지》는 이 시절 산동 일대에서 출몰했던 송강의 무리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계속)

입력 : 201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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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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