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거리를 차분히 내다보며, 문자는 장갑을 한쪽 또 한쪽 끼었다.

  빨 때마다 오그라들고 털이 뭉쳐 작아질 대로 작아졌기 때문에 그녀는 장갑 낀 손가락 새새를 꼭꼭 눌러주어야 했다. 몇 년 전 이미 한 차례 유행이 지나간 알록달록한 털장갑을 여태 끼고 다니는 사람은 그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장갑만 구식인 건 아니었다. 소매 끝이 날깃날깃 닳아빠진 외투며, 여름도 겨울도 없이 신어온 쫄쫄이식 단화, 통은 넓고 기장은 짧아 발목이 껑뚱해 보이는 쥐똥색 바지, 보푸라기 가 한켜나 앉은 투박한 양말, 서랍에서 꺼내어 얼찐거릴 때마다 반찬 내를 물씬 풍기는 가방 등, 몸에 걸치고 지닌 것마다 구멍만 뚫리지 않았다 뿐이었다.

  문자의 이런 차림새는 사십 고개를 바라보도록 노처녀로 알려진 그 녀의 입장을 더한층 측은해 보이게 했다.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사에서 문자는 영업부 편집부 통틀어 최고참이었다. 입사 이래 현 재까지 그녀는 줄곧 교정일만 보아왔다.

  편집부 정원은 부장을 포함해서 일곱이었다. 그사이 문자만제외하고 자리마다 얼굴이 수없이 바뀌었다. 대학을 갓졸업한 축을수록 반년도 못 채우고 떠나갔다. 출근 첫날부터 의자가 갸우뚱거린다, 화장실이 더럽다, 층계가 가파르다, 등등의 불만이 하나씩 쌓여가다가 나중엔 말끝마다 “이놈의 데 얼른 떠나야지, 더러워서 못해 먹겠어”하고 군시렁거렸다 하면 견뎌야 한두 달이 고작이었다.

  문자는 그런 나이 어린 동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받았다. 그네들로서는, 가리마에 새치가 희끗희끗 하도록 무엇 하나 이룩해논 것 없이, 한평생 있어봐야 별볼일 없는 출판사에, 그것도 말석에서만 십년을 보낸 노처녀 동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中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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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矯正일을 하는 문자는 꾸밀지를 모른다. 화장도 하지 않고, 모양도 내지 않으며, 집안에 값나가는 물건을 사놓으려 하지도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욕망이란 그녀에게 없다. 안으로 삭히며 스스로를 채찍 할 뿐이다.

  문자는 유부남인 한수와 불륜관계를 맺지만 인색한 한수에게 희생만 강요당한다. 그러나 문자는 한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요구하는 법이 없다. 주인집에서 방값을 올리자 그녀는 자기 힘으로 구해보다가 끝내는 방을 옮길 뿐이다. 그녀는 늘어난 집세 때문에 버스를 두 번 타는 대신 한 번만 타고 나머지는 걸어 다닌다. 점심은 그냥 라면으로 때운다.

  반대로 한수는 그녀에게 무엇을 주기 시작하면, 혹시나 끝없이 요구의 손길을 뻗쳐오지 않을까 겁이나 사과 하나, 귤 한쪽도 건네지 않았다. 문자는 순간순간 그의 모질고 이기적인 성격을 엿볼 때마다 마음속으론 울고, 입술로는 웃었다.

  문자는 한수의 아이를 낳지만 한수의 본처가 빼앗아 간다. 본처는 문자의 세간을 부수기 위해 찾아오지만, 그녀의 방에는 그 흔한 화장품도, 경대도 없었다.

  한수가 광산업에 실패한 뒤 문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문자는 월급을 다 털고, 빚까지 내어 그에게 준다. 5부 이자를 조건으로 이모에게 돈을 빌린 문자가 가방에서 돈을 꺼내 한수에게 내밀자 그는 얼른 받고선 담배를 신문지 귀퉁이에 눌러 끄고 휑하니 가버린다. 문자가 “저녁 먹고 가라”고 애원했지만 한수는 “지금 몇 신데 저녁 타령이야. 다 늦게 들어와 가지구”라며 면박만 준다. 문자에게 한수는 이미 한 남자라기보다, 그녀에게 더 한층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그곳에 도달하고픈 열렬한 갈망으로 온몸이 갈기처럼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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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자는 낙타를 기르고 있다. 낙타의 지칠 줄 모르는 다리로 사막을 걷는다. 사막 속의 인간이 熱死와 凍死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것은 오직 자신의 살갗뿐이다. 그 살갗으로 왜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을 걸을까. 아랍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는 사막의 땅 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푸른 물길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이 길을 神의 길이라고 부른다. 문자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한수의 본처에게 빼앗기자 이렇게 되 뇌인다.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너의 삶을 안락한 강변도 잇는데 굳이 고통의 늪가에다 던져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줄거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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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은 「먼 그대」로 1983년 제7회 李想 문학상을 수상했다. 「먼 그대」는 1983년 《韓國文學》5월호에 실렸다. 당시 문자 신드롬이 일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의 고통스런 삶에 함께 눈물을 닦은 독자들이 많았다. 「먼 그대」는 KBS의 TV 문학관으로 방영돼 화제를 모았다. 지난 93년 숨진 탤런트 안옥희씨가 문자役으로 扮했다.

  서영은은 지난 6월20일 독일 튀빙겐에서 열린 ‘한국 문학의 밤’ 행사에 참석, 먼 그대를 공개 낭독한 뒤 ““「먼 그대」에서 강한 인내심을 간직한 여자 주인공이 한국의 전통 여성상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그녀를 통해 진지하게 삶을 살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어요. ‘그녀가 상처받고도 쾌감을 느끼는 여성 마조히스트가 아니냐’고 말한다면 나는 그녀처럼 어이없이 빙긋 웃을 뿐입니다”

  소설가 金采原(사진 왼쪽)은 친구 서영은을 이렇게 評했다. “그녀(서영은)는 자기 스스로는 가지고 싶은 게 그다지 많지 않으면서 남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사주었다. 누군가에게 코트감을 떠주겠다고 하여 어두워지는 동대문시장 거리를 함께 해맨적도 있다. ‘애, 내가 남자라면 여자한테 뭔가 사주고 싶어서 기둥뿌리가 뽑아질꺼야’ 이런 말을 하며 웃기도 했다. 그런데 늦도록 헤맨 뒤 찾은 그 코트감을 본인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그녀는 너무도 선선히 그것을 자기가 해입고 다시 새로운 것을 사드렸다. "

  「먼 그대」가 실린 작품집 『황금깃털(나남刊)』은 84년에 초판을 찍었다. 『황금깃털』이 출간된 뒤 그녀는 ‘내 마음이 가장 헐벗었던 시기 직후에 얻어지는 결실이어서, 그 어떤 책 보다 감사하게 여겨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를렌느가 몽스 감옥에서 쓴 詩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지붕 위로 하늘은 너무 푸르고 조용하구나.” ‘이 한 구절의 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2년 동안 갇혀 지낸 혹독한 어둠 때문’이라고 떠올렸다. 당시의 그 절절함이 문자를 만든 셈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무엇이 그녀를 테네시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지붕>같게 만들고, 安部公房의 <모래의 집>, 카뮈의 <소금과 태양뿐인 마을>같게 한 것일까.

  “당시 내가 거둬야할 가족은 어머니와 여덟살짜리 조카였다. 내게 수입이 거의 없었던 지난 2년 동안, 우리 세 식구는 먹는 것만 굶지 않았달 뿐 한겨울에도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한 채 냉방에서 지냈다. 아주 작은 수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中略)···그러던 중 미국에 있는 오빠로부터 어머니와 자기의 딸을 데려가고 싶다는 편지가 왔다. 어머니가 다급하여 수속하러 다니셔도 나는 궂이 말리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떠나간 빈 자리를 어떻게 매울 지 속으로는 심히 난감하기만 했다. 거기다 공개할 수 없는 私的인 일들 하나하나가 다 내가 선 자리를 뜨거운 양철지붕化했다.···(『황금깃털』作家序文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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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은의 문자는 서영은 자신의 낙타가 아니다.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낙타다. 낙타의 길이 목적지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낙타의 발굽이 모든 길로 통할 뿐이다. 낙타는 그저 사막 속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며 그 땀이 현실적인 가치로 환산되길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原罪의 짐을 지기 마련이다. 서영은은 이렇게 말한다. ‘「먼 그대」의 문자의 가슴속에 살고 있는 낙타가 生의 중심에 이를 때까지 그의 족적을 뒤좇는 작업도 계속하겠다’ 문자는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어려움을 따스한 <긍정(사랑)>으로 鍊金시킨다. 문자의 긍정은 우리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부질없는 삶이라 해도 희망을 갖게 만든다. 희망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마치 낙타가 갈증이 가장 심해질 때 등의 혹(굳기름 덩어리)을 물로 바꾸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