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나이 좀 드신 분들은 1999년 시청률 64.8%를 기록한 드라마 ‘허준’을 보았을 것입니다. 배우 전광렬 씨가 주인공으로 나왔습니다. 이 드라마는 당시 많은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켰는데 그 중 하나가 IMF 이후 상승곡선을 그리던 한의대 입학을 더욱 치열하게 만든 것입니다. 드라마 속 ‘허준’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동(動)하게 만들었지요. 일반 의대(醫大) 수석합격자가 한의대에 동시 합격해 최종 선택을 ‘한의대’로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전에 비해 열기가 식기는 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한의대는 인기입니다. 

드라마 '허준'에서 기억에 남는 모습을 골라본다면, 과거를 보러 가다가 들른 시골마을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바람에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한 허준의 모습(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心醫가 되기 위해 검증받는 과정), 스승 유의태의 시체를 해부하는 모습(스승이 가장 아낀 제자로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 실력을 쌓아가는 과정), 내의원 내의 정치싸움에서도 굳건히 원칙을 지키며 성장해나가는 모습(진정한 심의가 되어 경쟁자들도 감동시키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정도(正道)를 걸으며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허준을 보며 사람들은 가슴깊이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그대로 이어 받은 수험생들이 의대든 한의대든 진정한 ‘(한)의사’가 되기 위해 입시 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한의대의 경우, 의대와 약대처럼 입학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나이든 사람들이 많이 입학합니다. 수능으로 입학하는 경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학생들과 10살 정도만 차이가 나도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지만, 편입으로 입학한 분들은 훨씬 더 많이 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십 혹은 오십이 넘어 처자식을 부양하다가 다시 공부해 한의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결연한 의지를 생각하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근래도 당시처럼 과열한 상황은 아니지만, 타과에 비해 여전히 나이 든 분들이 한의대를 편입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이와 상관없이 한의대를 가겠다는 마음을 내게 했을까요. 이유는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대체로 돈도 잘 벌면서,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정년 따로 없이 일할 수 있고, 타인들에게 멋져 보이는 등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자기 발전을 유발하는 강력한 동기부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해서 갑옷을 만드는 사람보다 더 불인(不仁)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화살 만드는 사람은 그 화살로 사람을 상(傷)하게 못할까봐 걱정하고, 반대로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이 상할까봐 걱정을 한다. 무당(의사의 기원이 무당임)과 관 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무당은 사람을 살려야 살고 관 짜는 이는 사람이 죽어야 산다. 그러므로 인간이 직업이나 기술을 선택하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사회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지만, 수없이 많은 직업 중에서 본인의 업으로서 활인(活人)의 업을 택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개인적 욕망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욕망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기부여가 될 만한 다른 좋은 직업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의대에 입학한 이들 중 상당수는 허준이 보여준 인술(仁術)을 보면서 자기 안에 내재된 어떤 ‘인간애’에 감응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본인의 카르마인지 아니면 지속적인 노출로 주입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동기부여가 또 하나의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사회적 경제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에 더해 아픈 사람을 치료해주고 싶다는 순수한 측은지심(惻隱之心) 같은 마음 말입니다. 아울러 타고난 자기만의 소명(召命·Calling)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허준의 인술을 꿈꾸며 입학한 한의대생은 진정 ‘허준’이 될 수 있을까요. 순수한 이상을 꿈꾸었던 그들은 아마도 그 순수한 이상만으로 세상은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치료라는 관점에서 볼 때 드라마 속 허준처럼 모든 병을 치료하지도 못하며, 제도적으로도 반쪽짜리 의사로서 500년 전의 박제된 의술만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2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가슴이 없고 40대에 사회주의자면 바보”라는 말처럼 생활인으로서 본인들이 당면한 현실은 항상 변한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의료의 공공성과 의료인의 사명감에만 의존하는 의료시스템이 현실의 자본주의에서는 이상일 뿐이라는 사실도 실감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있다”라는 말처럼 본인이 선한 의도로 인술을 펼치고 싶어도 악의적인 환자들에게 몇 번 시달리고 나면, 매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경험도 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치열한 의료시장 내의 자영업자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의 삶의 무게 또한 상당한 중압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견디고 극복하게 해주는 ‘그 순간’이 저를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허준처럼 인술을 펼치는 한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던 순수했던 그 순간 말입니다. 자신의 마음 판에 깊이 새긴 ‘서약’을 잊지 않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각오’를 기억하며 환자를 대한다면, 현실은 지금보다 훨씬 밝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필자 / 최성운

연세대 법학과 및 동신대 한의학과 졸업. 연변중의대·카톨릭의대해부학교실·고려대응용해부학교실 침도실습교육, 全캐나다 중의사시험통과(Pan-Canadian Written and Clinical Case-study Examination TCM Practitioner),  미국내과의근골격계초음파시험통과(Alliance for Physician Certification & Advancemet RMSK). 연부조직한의학회 교육위원, 現 해달한방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