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BBC가 다음 달부터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 단파 라디오 방송 서비스를 개시한다. 사진=BBC Radio World Service 홈페이지 캡처
역사상 라디오로 가장 재미를 많이 본 사람은 2차 대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 일 것이다. 영국은 1939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는 독일에 맞서기로 했지만 체임벌린 내각의 속셈은 전쟁을 피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할 때마다 양보하고 또 양보해 협상안이 누더기가 됐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처칠이 나타났다.
1940년 처칠은 “내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노고뿐이라면서 맞서 싸우는 것이 자신의 정책이고 목표는 승리”라는 연설을 통해 내각 수장(首長) 자리에 오른다.
그해 9월 11일 독일 공군기가 처음으로 런던을 공습하자 처칠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국이 대단히 불리하며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는 한편 우리의 의무를 상기하고 분발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연설했다.
이 연설을 숨죽여 듣고 있는 영국민들은 이후 9개월 간 독일의 대공습을 의연하게 버텨냈다. 하루에도 수백발의 미사일이 런던 시내에 떨어지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처칠은 라디오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민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마라”는 연설을 통해 국민대통합을 이루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발판을 마련했다.
영국 BBC가 다음 달부터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단파 라디오 방송에 들어간다고 한다. 런던 소재 북한대사관이 BBC에 ‘애원 반 협박 반’으로 라디오방송 반대 입장을 전했으나 프란체스카 언스워스 BBC 월드서비스 국장은 “우리는 반체제 목소리가 아니며 정부 편에 있지도 않다”며 “우리는 주민들의 편에 있으며 그게 원래 우리 소관”이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라디오는 사실 요즘처럼 첨단 미디어가 즐비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다. 그러나 거기에는 추억이 있다. 사람들은 라디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날의 소식을 듣고 이웃에 전파하곤 했다. 지금처럼 순식간에 지구촌으로 퍼지는 게 아니라 입과 귀를 통해 소곤소곤 전달됐다. 이렇게 전달되는 정보는 SNS 같은 첨단미디어보다 호소력이 강하고 진정성이 두드러진다.
BBC 언스워스 국장은 “북한 주민들이 매일 밤 북한 방송에 나오는 한 여자를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다는 게 끔찍하지 않으냐”며 “매일 30분 동안 한밤중에 전파될 대북방송을 북한 주민들이 이불 속에서 몰래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막힌 레토릭이다. 김정은이 움찔 했지 싶다. 북한처럼 폐쇄된 나라에서는 ‘이불 속에서 몰래 듣는’ 라디오 같은 아날로그식(式) 정보전달이 오히려 더 유용할 지 모른다. 아무쪼록 BBC 대북방송이 북한 주민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한 ‘자유와 진실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주장환 월간조선 뉴스룸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