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007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의 뒷이야기 : 월간조선

‘초대(初代) 007’ 숀 코너리가 10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007 살인번호’ ‘007 위기일발’ ‘007 골드핑거’ ‘007 썬더볼’ ‘007 두번 산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007 네버세이 네버어게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노년에도 ‘더 록’ 등의 작품에 출연, 열연했다.

스코틀랜드의 노동자 집안 태생인 숀 코너리는 젊은 시절 우유 배달부, 영국 해군 수병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미스터 유니버스 중량급에서 3위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한때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활동, 맨체스터 유나이티드FC(맨유) 감독이던 맷 머스비의 눈에 들어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23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선수 생활을 길게 하기 어려운 나이여서 그냥 배우의 길을 걸었다.

단역 배우를 전전하던 시절 그가 출연했던 작품 중 하나가 ‘지상 최대의 작전’(1962)이다. 이 영화를 본 분들 중에는 ‘숀 코너리가 그 영화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숀 코너리는 이 영화에서 영국군 자동소총 사수 플래니건 일병역을 맡았다. 발연기와 189㎝에 달하는 큰 덩치 때문에 ‘007'시리즈의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은 숀 코너리가 007역을 맡게 되자 “고릴라 같다” 고 혹평했다고 한다.

손 코너리.jpg — '지상 최대의 작전'에서 숀 코너리는 영국군 병사 플래니건 일병(앞에 자동소총을 든 병사) 역을 맡았다.

숀 코너리는 1962년 ‘007살인번호’ 이후 잇달아 007 시리즈의 주연을 맡으면서 인기 배우가 됐지만, 스스로 ‘007’이미지에 고착되는 걸 피하기 위해 1971년 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다시는 007역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1983년 그는 다시 한번 ‘007’을 찍었다. 그것이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이다. "다시는 (제임스 본드)안 하겠다고 말하지 말아요 (Never Say Never Again)“에서 나온 제목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 기존 제작사(EON) 및 배급사(MGM/UA) 작품이 아닌 워너브라더스사 작품이어서 ‘비공식’ 007물로 취급받는다.

007살인번호.jpg — 숀 코너리의 출세작 '007 살인번호'의 포스터.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이후 숀 코너리가 연기 변신을 위해 도전한 작품이 ‘자도즈’ 라는 C급 컬트 SF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숀 코너리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를 가리기 위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이후 수염은 그의 상징처럼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자 그 역시 다른 대머리들처럼 가발을 쓰거나 머리를 심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숀 코너리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 출연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가 제안 받은 역은 바로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 당시 영화사는 그에게 영화 수입의 10~15%를 출연료로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숀 코너리를 원작 소설과 스크립트를 읽어본 후 이 제안을 걷어차 버렸다.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1년 반을 뉴질랜드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와 함께 숀 코너리는 한국돈으로 4050억 원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

은퇴작은 2003년 ‘젠틀맨 리그’였다. 이 작품을 찍은 후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감독과의 갈등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노인 조연(助演)’역만 들어오는데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로맨스 연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다나?

은퇴 선언 후에도 숀 코너리는 ‘007 제임스 본드’로 복귀한 적이 있다. 영화는 아니고 게임으로. 2005년 그가 가장 좋아했던 007영화 ‘007 위기일발’이 게임물로 나왔을 때, 성우로 출연한 것이다.

영국 왕실은 그의 업적을 기려 2000년 숀 코너리에게 기사(Knight Bachelor) 작위를 내렸다. 하지만 영국은 ‘대영제국 기사’ 숀 코너리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 당시, 그가 스코틀랜드 독립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때 숀 코너리는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9월 ‘예스’(yes) 투표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며 “새로운 국가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창조적인 행위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위한 투표를 함으로써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시키도록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코틀랜드인이자 스코틀랜드와 그 문화를 평생동안 사랑해온 한 사람으로써 이번 독립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 추진단체인 ‘예스 스코틀랜드(Yes Scotland)’에 기부하기도 했다.

현실에서 숀 코너리는 영화에서 보여준 멋쟁이 신사 내지 중후한 노년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바람에 여러 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007영화에는 늘 ‘본드 걸’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등장하고, 제임스 본드는 이 여성들을 영국 신사다운 매너로 매혹시킨다. 하지만 숀 코너리는 1965년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여자를 때리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를 때리는 방식으로 때리는 것은 권장하지 않겠다”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1993년 인터뷰에서는 여자가 남자와 언쟁하는 것을 두고 “맞고 싶은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의 전처인 다이앤 클리엔토가 수기에서 코너리가 그녀를 정신적‧육체적으로 학대했다고 폭로하는 바람에 스타일을 구기기도 했다.

2003년 뉴욕 방문시 숀 코너리는 8시간 동안 택시를 타고 시내관광을 한 후 운전기사에게 팁으로 5달러를 줬다. 화가 난 기사는 이를 거절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숀 코너리는 “스코틀랜드인답다”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구미(歐美)에서 스코틀랜드인은 ‘구두쇠’ ‘짠돌이’의 상징인데 ‘스카치 테이프(Scotch Tape)’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숀 코너리는 말년에 아내와 함께 바하마 제도에 거주하면서 스스로를 ‘망명자’라고 칭했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소리도 했다. 사실 그는 '정치적 망명자'가 아니라 고율의 세금을 내기 싫어 영국을 떠난 ‘조세(租稅)망명자’였다.

숀 코너리는 2004년 미국 뉴욕 맨하탄의 이웃으로부터 3000만 달러(약 30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숀 코너리가 소유한 아파트의 아래층에 거주하던 안과의사 버튼 술탄은 코너리가 아파트 개조공사를 하면서 엄청난 소음과 연기, 새는 물로 자신의 생활과 재산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코너리가 하루종일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 이웃을 괴롭혔고 제 때에 청소하지 않아 아파트 단지에 쥐가 들끓게 했다”면서 코너리가 이 아파트에서 자기가족을 쫓아낸 뒤 싼 값에 차지하려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영화 속의 깔끔하고 멋진 스파이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고 무례하고 뚱뚱한 늙은이만 있었다”면서 “코너리는 실제 생활은 품위 없고 이웃의 규범도 무시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괴팍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코너리의 대변인은 “미국은 아무 이유로나 소송을 걸 수 있는 나라”라면서 “코너리는 뉴욕에 거의 거주하지도 않고 주장들이 웃기는 것이어서 소송의 실익은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문득 1996년에 나온 영화 ‘더 록’에서 숀 코너리가 맡았던 영국 첩보요원 존 패트릭 메이슨이 생각난다. 상황이 종료된 후 함께 고생했던 FBI요원 스탠리 굿펠로우 (니콜라스 케이지 분)가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무너진 벽 옆에 있던 메이슨은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숀 코너리도 그렇게 갔다. 그는 갔어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자기 소개를 하던 007, ‘붉은 10월’의 라미우스 함장, ‘더 록’의 메이슨 대위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