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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이준석, 이대로 침몰? 勢 반전?

서봉대  정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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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은 1990년 6월 15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가진 창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이기택 총재(가운데)가 박찬종(왼쪽) 김광일 의원과 함께 손을 들어 대의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박찬종은 3김 시대(김대중·김영삼·김종필)를 이을 정치 지도자들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특히 1987년 대선 때 김대중(DJ)과 김영삼(YS)이 창당했던 통일민주당에서 40대 중반의 3선 의원이었던 그는 두 사람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삭발 단식,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단일화가 끝내 무산되자 탈당했고 그후 총선에선 당적없이 출마하는 조직적 열세에도 불구, 높은 인지도 덕에 두 차례나 잇따라 당선되는 등 상승세를 탔다.

 

1992년 대선에선 신당을 창당한 뒤 직접 출마해 6.37%를 득표, YS·DJ·정주영에 이어 4위를 기록하면서 또 다시 이목을 끌었다. YSDJ의 지지기반이 막강했던 데다 정주영도 현대그룹의 자금력과 조직력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선전했던 셈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 낙선 후 정치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력화가 뒷받침 되지 않은 그의 정치 행보가 결국 한계에 직면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조직력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초반 여론조사에선 40%대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대세론을 등에 업은 듯 했으나 정계복귀를 준비 중이던 DJ의 조직력이 조순 후보를 지원하면서 역전패했던 것. 1992년 대선 때 야권 후보단일화를 촉구하며 DJ에 맞섰던 게 그의 발목을 잡았을 수 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는 YS의 영입 제의로 야권을 떠나 집권당인 신한국당에 전격 입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으나 떨어지는 등 총선에서 세 차례나 연거푸 낙선하자 정계를 은퇴해 버렸다.

 

이기택도 박찬종과 비슷한 길을 걸어야 했다.

 

1970-80년대 DJ, YS와 함께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으며 차세대 정치 지도자로 꼽혔으나 그것 때문에 양김으로부터 견제를 받았고 결국 정치적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YS19903당합당으로 야권을 떠났고 DJ1992년 대선 패배후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그는 민주당 총재를 맡아 야당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DJ가 다시 정치권으로 복귀, 창당(새정치국민회의)에 나서자 동교동계(DJ 정치계보)의 집단탈당이 이어지는 등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됐던 것.

 

당내 잔존 세력을 추스려 통합민주당을 창당했으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들조차 또 다시 DJ의 새정치국민회의와 YS의 신한국당으로 흩어지게 됐다.

 

# 이기택, 박찬종이 이처럼 정치적으로 떠밀릴 수밖에 없었던 배경으론 양김에 맞설 독자적인 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양김의 정치적 기반이 그만큼 막강했던 것이다. 때문에 차세대 리더로 꼽히기는 했으나 정치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안철수도 정치 세력화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때가 있었다.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로 뜨거웠던 젊은층 지지에 힘입어 2012년 대선 때 무소속 출마, 새정치를 기치로 기성 정치권에 도전했으나 조직력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중도하차 해 버렸을 때였다. 유력 후보였던 박근혜, 문재인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누르기도 했으나 그 같은 기세는 거대 양당의 조직력에 밀려 오래가지 못했던 것. 대선 이후 그가 신당 창당 등을 통해 정치세력화에 본격 나섰던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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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 25일 40대 기수론의 젊은 정치인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사람이 유진산 당수 자택을 방문해 고흥문 의원과 함께 후보단일화를 협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중 유진산 고흥문 이철승 김영삼.


# 성공하려면 이들처럼 했어야 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40대 기수론으로 정치판을 뒤흔든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이 기존 정치판의 역학 구도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 지지기반을 토대로 당내 지지세력을 확고히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보로 선출됐던 DJ는 대선에서 졌지만 YS가 당 총재직을 차지하는 등 야권에서 양김시대가 열리게 됐다.

 

# 국민의힘 대표인 이준석이 당원권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음으로써 정치적 치명상 위기에 처하게 된 배경은 뭘까? 성 상납 의혹 등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이란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당을 이끌어 갈 대표임에도 사실상 비주류 신세였던 것이다. 때문에 의혹에 대한 증거가 제대로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도 징계가 강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도하는 당 혁신논의가 차기 총선 공천문제와 맞물릴 것이란 점에서 당내 의원들의 불안감까지 저변에 깔려있을 법하다. 그래서 사상 유례가 없는 대표 징계사태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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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제1차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치판은 세()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정치적 리더가 되려면 당 안팎에서 지지세력이 버팀목으로 포진하고 있을 정도로 정치적 기반도 갖춰야 한다. 양김이 세대교체를 통해 그들의 시대를 열었고 이기택, 박찬종은 실패했던 이유도 다른 데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가 징계결정 직후 SNS를 통해 당원 가입을 독려하고 나선 것은 지지세력인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당내 지지세력 확산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관련된 최근 여론조사에서 20대의 지지율이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는 상황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이대로 침몰해버릴까, 아니면 세 반전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더불어민주당 역시 남일처럼 구경만 할 처지는 아닌 것 같다.

입력 :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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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대의 되짚기

jisang3@daum.net 경북 청송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국민일보에 입사한 이후 2020년 뉴스 1 부국장을 마지막으로 30년 언론인생활을 마무리했다. 정치부장, 정치선임기자 등으로 여의도 정치권과 청와대, 총리실 등을 취재하고 후배 기사를 데스킹하는 데 20여년을 보냈다. 현재 민간연구원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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