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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역사기행

나가노시 마쓰시로

징용의 한(恨), 유신의 뿌리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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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시로대본영, 태평양전쟁 말기 건설한 지하벙커…, 조선인 징용자 6000명 동원
⊙ 마쓰시로 출신의 국학자 사쿠마 쇼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개국’ 주장…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의 스승
⊙ 가와나카지마 옛 전쟁터, 전국시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5차례 맞붙었던 곳
일본 나가노시 마쓰시로에 있는 쇼잔신사. 메이지유신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사쿠마 쇼잔의 생가 자리에 지었다.
  일본 나가노(長野)역 인포메이션 센터. 안내하는 아가씨가 가져온 마쓰시로(松代) 안내 책자를 보던 나는 한순간 ‘앗!’하고 탄성을 질렀다. 책자 속 인물이 낯이 익었다. 작은 사진이지만 형형한 눈빛의 그 사내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 메이지(明治)유신 주역들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스승. 그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사실 나가노에서 마쓰시로에 숙소를 잡은 것은 마쓰시로대본영(松代大本營)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사쿠마 쇼잔의 이름은 숱하게 접했지만, 그가 마쓰시로 태생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내가 관심을 가져온 역사 속 인물을 만났다. 이런 게 여행의 즐거움이리라.
 
 
  마쓰시로대본영
 
마쓰시로대본영 조잔지하호 입구.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비가 서 있다.
  조선인 징용자들이 다수 희생됐다는 마쓰시로대본영 조잔지하호(象山地下壕・‘象山’은 산 이름일 때는 ‘조잔’, ‘사쿠마 쇼잔’ ‘야마데라 쇼잔’ 같은 사람의 경우는 ‘쇼잔’으로 읽는다)로 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지금은 운행되지 않는 마쓰시로역과 흰 담장이 이어지는 옛 조카마치(城下町)를 지나 한적한 시골길을 20분가량 걷다 보니, ‘조잔지하호’라는 푯말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 그런 거대한 지하벙커가 있을까’ 싶었다. 푯말을 따라 돌아서니 조잔지하호와 안내소,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 등이 눈에 들어왔다.
 
  마쓰시로대본영은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군부는 소위 본토결전(本土決戰)에 대비해 황실과 황족, 정부・군부의 요인들, 국가 주요 기관들을 나가노의 산악 지역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다. 마이즈루야마(舞鶴山), 미나카미야마(皆神山), 조잔(象山) 등 세 개의 산에 거대한 지하벙커를 구축(構築)하기로 한 것이다. 마이즈루야마에는 천황과 대본영(일본의 전시 최고지휘부)이, 미나카미야마에는 황족들이, 쇼잔에는 정부기관 및 NHK, 중앙전화국 등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이 길이 5900m에 달하는 조잔지하호였다(마이즈루야마지하호는 2600m, 미나카미야마지하호는 1500m).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전체 공정의 80% 정도가 이루어졌다. 공사 당시 일본 군부는 ‘창고공사’로 위장했으며, 현지 경찰조차 공사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1944년 11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이듬해 8월 15일 일제가 패전(敗戰)할 때까지 밤낮없이 진행되었다. 공사에는 일본 군인 및 징용자들, 초·중등학생들도 동원됐지만, 조선인 징용자도 6000명이 동원됐다. 한국 측에서는 이들 모두가 ‘강제연행’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들 가운데는 공사업체와 근로계약을 맺고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들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갱도 500m 개방
 
마쓰시로대본영 조잔지하호 내부. 5900m에 이르는 지하호 가운데 500m가 공개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공사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갱도 작업에 집중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실조, 발파 및 암반사고, 자살 등으로 숱한 희생자들이 나왔다. 강제노동에 항의하다가 사살된 사람도 있었다. 지하호 입구에 설치된 조선인희생자추도평화기념비 안내판에는 “희생자 수는 300명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나, 1000명이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안내판이 이름을 적시한 희생자는 네 명에 불과했다.
 
  조잔지하호 전체 구간 중 현재 개방되어 있는 구간은 500m 정도다. 헬멧을 쓰고 지하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황색 페인트로 칠한 철제 지지대들이 수없이 이어져 있었다. 1000개 가까운 주황색 도리이(鳥居)들이 이어지는 교토(京都)의 후시미이나리신사가 연상됐다. 고랑포에 있는 남침 땅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이 넓고 높이도 높았다.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파내다 만 방(房)들이 보였다. 북한은 남침 땅굴을 팔 때 스웨덴제 착암기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 지하호는 인력으로 파낸 것이다. 이 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고생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왜 조선인들이 일본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나? 나라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왜 조선은 나라를 잃었나? 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나라가 힘이 없었나?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왜 나라가 가난했나? 위정자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위정자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관심이 없었나? 그런 데 관심을 두는 것을 천하게 여기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의 이데올로기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전신기를 만든 유학자
 
쇼잔기념관에 있는 사쿠마 쇼잔의 상. 마쓰시다전기 회장 마쓰시다 고노스케 등이 기증한 것이다.
  이 글 앞머리에서 언급했던 사쿠마 쇼잔은 그런 조선의 유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학자이자 사무라이였고, 사상가이자 과학기술자였다. 그 사쿠마 쇼잔을 기리는 기념관이 조잔지하호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다. 기념관은 2층짜리 단출한 건물이다. 조잔지하호에서 쇼잔기념관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사쿠마 쇼잔의 친구였던 야마데라 쇼잔(山寺象山)의 저택이 있다. 연못이 있는 정원이 아름답다.
 
  쇼잔기념관에 들어서면 사쿠마 쇼잔의 소상(塑像)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형형한 눈빛과 강렬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그렇게 크지 않은 기념관이지만, 전시물들을 보면 사쿠마 쇼잔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초서체나 예서체로 쓴 글씨들, 산수화, 다양한 아호(雅號)를 새긴 도장 같은 것은 그리 신기할 것이 없다.
 
사쿠마 쇼잔이 서양서적을 보고 만든 전신기.
  그가 서양 책을 보고 만들었다는 전신기(電信機), 전기치료기, 지진탐지기 같은 것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진다. 물론 당대 서양의 기준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통치 엘리트가, 서양에 문호를 열기 이전에 책을 보고 이러한 기기(器機)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르네상스맨’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쿠마는 일본 유학(儒學)을 집대성한 사토 잇사이(佐藤一齊) 밑에서 주자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에도(江戶・도쿄)에서 쇼잔서원을 열어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주자학을 공부하기는 했어도, 사쿠마 쇼잔은 사무라이였다.
 
  1842년 마쓰시로의 번주(藩主) 사나다 유키쓰라(眞田幸貫)가 막부의 해방(海防・해안방위) 담당 로주(老中・장관)로 임명됐다. 사쿠마 쇼잔은 사나다 유키쓰라를 수행해 에도로 올라갔다. 여기서 사쿠마는 사나다 유키쓰라를 보좌하기 위해 당대의 양학자(洋學者)이던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 밑에서 서양식 포술(砲術)과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몇 달 후 그는 서양의 군사・과학서적을 원서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쿠마 쇼잔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에가와 등의 기술을 전수받아서 직접 대포를 주조했다. 1849년에는 서양 책에서 읽은 바를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전신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전신기를 시험한 종루(鐘樓) 옆에는 ‘일본 전신의 발상지’라는 기념비가 서 있다. 사쿠마는 지진탐지기도 만들었고, 천연두 예방을 위한 우두종 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본 내셔널리즘’과 ‘개국’ 주장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쿠마 쇼잔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일본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본 내셔널리즘’과 ‘개국(開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쿠마는 1842년 해안 방위와 관련해서 사나다 유키쓰라에게 ‘해방팔책(海防八策)’이라는 건의서를 올렸다. 이 건의서에서 그는 “지금의 대외적 위기는 단순히 도쿠가와 가문의 영욕뿐 아니라 황통(皇統)의 안위와도 관계가 있는 심각한 위기”라면서 “일본이 살기 위해서는 귀천존비(貴賤尊卑)를 불문하고 어떻게든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는 막부는 교토의 황실을 허수아비 취급하고, 대부분의 사무라이나 백성들은 자기가 속한 번(藩)을 ‘나라’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여러 번 중에서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번들만이 이따금 출몰하는 서양 선박들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사쿠마 쇼잔은 서양 세력이 침략해 오면 그건 일부 번이나 도쿠가와 막부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민족 전체의 문제라면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각을 가질 것을 호소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사쿠마 쇼잔은 일본이 서양 세력의 침략에 맞서 제대로 된 해안방위체제를 구축하려면 군사기술뿐 아니라 서양의 다른 학문도 폭넓게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의 좋은 책을 번역해서 널리 배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쿠마의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나아갈 길을 고민하던 많은 이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메이지유신의 인걸들을 키워낸 조슈(長州)의 요시다 쇼인이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등 길러내
 
쇼잔신사 안에 있는 고의정(高義亭). 사쿠마 쇼잔이 죠슈의 다카스기 신사쿠, 도사의 나카오카 신타로 등을 접견했던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에도에 있는 쇼잔서원에서 사쿠마 쇼잔으로부터 양학을 공부했다. 1854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왔을 때, 요시다 쇼인은 미국 군함에 올라 미국으로의 밀항(密航)을 시도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서양의 문물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요시다는 밀항 시도 전에 자신의 뜻을 담은 편지를 사쿠마 쇼잔에게 보냈다. 사쿠마는 요시다를 격려하는 답장을 보냈다. 나중에 이 편지가 발견됐다. 사쿠마는 국법을 어기고 밀항하려는 요시다를 방조・고무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마쓰시로로 송환됐다. 이후 1862년까지 사쿠마 쇼잔은 마쓰시로에서 칩거했다.
 
  당시 사쓰마, 도사 등 서남의 웅번(雄藩)들에서는 번의 실력 양성을 위해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던 사쿠마 쇼잔을 초빙하려 했다. 조슈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와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가, 도사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동지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 등이 다녀갔다.
 
  요시다 쇼인 외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장관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멘토였던 가쓰 가이슈(勝海舟), 조슈-사쓰마-도사연합을 결성해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등이 그의 제자였다.
 
  이들은 모두 사쿠마 쇼잔을 통해 무조건적인 양이(攘夷)만이 능사는 아니며, 진정한 양이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개국을 통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쿠마 쇼잔은 1864년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초청을 받아 교토로 갔다. 당시 교토는 막부파와 반막부파, 양이파와 개국파가 얽히고설켜 혼돈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제자들은 사쿠마 쇼잔을 말렸다. 사쿠마는 “나 이외에는 난국을 구할 인물도, 나라를 이끌 책무를 감당해 낼 자도 없으며, 지금은 일신의 안전을 돌볼 때가 아니다”라면서 교토행을 강행했다.
 
  사쿠마 쇼잔은 자신의 능력에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적(敵)도 많았다. 그는 교토 시내에서 서양식 말안장을 얹은 말을 타고 다닐 정도로 겁 없이 행동했다. 천황을 히코네로 옮기려는 공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사쿠마 쇼잔은 공무합체(公武合體), 즉 천황세력(公)과 도쿠가와 막부세력(武)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방향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를 자극했다. 1864년 7월 그는 교토에서 존왕양이파인 가와카미 겐사이(河上彦齊·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주인공 히무라 겐신의 실제 모델) 등에게 암살됐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쇼잔신사(神社)는 쇼잔기념관에서 걸어서 2분 거리에 있었다. 일본에서 누군가를 기리는 신사가 있다는 것은 그가 ‘신(神)’으로 추앙받는다는 얘기다. 쇼잔신사 입구 간판에는 ‘지혜의 신, 학문의 신’이라고 적혀 있다. 신사 안에는 사쿠마 쇼잔의 생가터, 사쿠마가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나카오카 신타로 등을 만났던 고의정(高義亭) 등이 남아 있다.
 
 
  번주, 자기 저택 부지에 학교 세워
 
마쓰시로에 있는 분부학교. 번주 사나다 가문이 자신의 저택 부지 일부를 제공해 세운 학교다.
  쇼잔신사에서 5분 정도를 걸어 내려오면 사나다 번주의 저택이 있다. 마쓰시로의 번주였던 사나다 가문은 전국(戰國)시대 이 지역의 패권(覇權)을 장악했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하였다.
 
  사나다 가문은 여섯 개의 엽전을 문장(紋章)으로 삼았다. 엽전 여섯 냥은 망자(亡者)가 저승으로 가는 노잣돈을 의미했다. 전쟁에 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마쓰시로 곳곳에는 지금도 이 문장의 깃발이 걸려 있다.
 
  사나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절을 거쳐 도쿠가와 막부 시절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NHK는 작년에 전국시대 말기~도쿠가와 막부 초기 사나다 가문의 영욕을 다룬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眞田丸)〉를 방송했다.
 
  사나다 번주의 저택 옆에는 번교(藩校)인 분부(文武)학교가 있다. 번교란 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의 각 번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학교를 말한다. 번교 중에서는 주자학, 국학(國學·일본 중심주의적 국수주의 학문), 병학(兵學) 등 전통 학문 외에 양학을 가르치는 곳도 많았다. 마쓰시로의 번주였던 사나다 가문은 1855년 분부학교를 설립하면서 자기 저택의 일부를 내주었다. 분부학교는 아직도 남아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학교로 기능하고 있다. 분부학교 부지 대부분은 마쓰시로소학교가 차지하고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보통교육이 도입되면서 대개 옛 번교 자리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소학교가 들어섰다.
 
  분부학교에서 5분 거리에는 마쓰시로성의 유적이 있다. 다케다 신겐과 사나다 가문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성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일본 성의 상징인 천수각(天守閣)은 없지만, 성벽과 해자 등이 복원되어 있다. 봄에는 벚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마쓰시로대본영(조잔지하호)에서 쇼잔기념관, 쇼잔신사, 분부학교 등은 걸어서 20분 안팎의 거리에 몰려 있다. 많은 한국인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마쓰시로대본영은 알아도, 일본제국을 만든 메이지유신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사쿠마 쇼잔은 모른다. 오로지 ‘일제침략’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일본을 바라보면서, 일본이 부강하게 된 이유는 살피지 않는 한국인들의 대일(對日)인식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가와나카지마의 옛 전장에서
 
가와나카지마 옛 전장. 전국시대에 우에스기 겐신(오른쪽)과 다케다 신겐(왼쪽)이 격돌했던 곳이다.
  마쓰시로성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가와나카지마고전장(川中島古戰場)이 있다. 전국시대 말기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이 격돌했던 곳이다.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 8월~1564년 8월 다섯 차례나 벌어졌다. 1561년에 벌어진 제4차 전투가 가장 격렬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곳에는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다케다의 군진을 기습한 우에스기가 휘두르는 칼을 다케다가 지휘용 부채로 막아내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일본제국 시절 황족들이 심은 나무들이었다. 황태자 시절의 다이쇼(大正) 천황,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제43대 총리), 후시미노미야(伏見宮・해군군령부 총장) 등 일본 현대사 책에서 접했던 적이 있는 황족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았을까? 군국주의 캠페인의 일환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국가의 운명을 책임지는 엘리트라면 군사(軍事)와 역사(歷史)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입력 : 2017.10.24

조회 :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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