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3대 명성(城)을 나고야 성(城), 구마모토 성(城), 히메지 성(城)을 들기도 하지만, 오사카 성(城), 나고야 성(城), 히메지 성(城)을 꼽기도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세가 붙은 이 나고야 성에는 연간 100만~120만 명의 관광객이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 지역을 여행할 때 필히 거치는 관광코스 중의 하나다.

이 나고야 성은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12년(慶長 17년)에 완성한 평지에 축성된 대표작품으로 유명(3대 평성: 나고야 성, 오카야마 성, 히로시마 성)하지만, 모모야마(桃山) 후기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래는 이마가와(今川)가 1521년~1528년에 축성하였던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재 축조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필자는 오랜만에 나고야 성을 찾았다.
규수(九州)의 요부코(呼子)에 있는 나고야(名護屋) 성(城)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름만 비슷할 뿐 두 성(城)의 탄생에 대한 관련성은 없었다. 단지, 이에야스가 큐슈 나고야(名護屋)의 진지에 다이묘(大名)의 자격으로 주둔을 했을 뿐이다.
아무튼, 아이치(愛知)TV의 미디어본부 이토슌이치(伊藤俊一, 53세)씨를 비롯하여, 시미즈(淸水)씨, 후나하시(船橋)씨, 세키기(赤木)씨, 후쿠오카에서 일부러 온 오츠보(大坪)씨 등 필자를 안내하기 위한 일본의 지인들이 대거 출동 하였다. 토요일이기는 했지만 참으로 미안 했다.
싱그러운 봄기운은 성(城)입구에서부터 묻어났다. 이름 모를 새들은 창공을 날았고, 성급한 매화는 이미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성(城)안에 들어서자 또 한사람이 합류했다. 자원 봉사자인 다카하시 겐이치로(高橋憲一, 57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토요다자동차에서 퇴직한 후 ‘2003년부터 관광 안내를 하고 있다’면서 대단히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사람에게 할 일이 있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 천수각과 킨샤치(金鯱)가 유명하다
"이 성(城)은 두 가지가 유명합니다. 첫 번째가 대천수각(大天守閣)과 소천수각(小天守閣)입니다.”면서 1945년 2차 대전 막바지에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어 버린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1959년에 복원되어 오늘의 모습으로 우뚝 서서 관광객을 부르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 이라는 것이다. 대천수각은 원래 5층이었으나 복원하면서 지하 1층, 지상 7층으로 몸집이 커졌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킨샤치(金鯱)입니다. 여러분께서 보시다시피 머리는 호랑이고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입니다.
원래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만, 후에는 성주(城主)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면서 지붕위의 2마리의 ‘킨샤치’중 수컷은 남쪽 방향, 암컷은 북쪽 방향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유인즉, 이 성의 북쪽은 산이 있어 시야가 좁아도 되기 때문이며 남쪽은 시야가 넓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얘기라면 여성들로부터 뭇매를 맞을 말이다.
영물로 내세운 이 ‘킨샤치’도 폭탄세례에는 효험이 못 미쳤을까?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꽃에는 속수무책. 천수각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단다. 그래도 운이 좋아 1959년에 다시 태어나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000여 점이 넘는 다양한 문화재급 역사의 잔영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래도 으뜸은 중요 문화재인 ‘세이난수미야구라(西南隅櫓)’와 ‘오모테니노문(表二之門)’이다.
관광 안내를 하는 다카하시氏의 설명을 들으며 일행은 성문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놀라운 ‘코라이몬(高麗門)’
"이 문이 바로 ‘오모테니의 몬' 즉 ‘코라이 몬’입니다.” 필자는 물론이고 일본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코라이 몬(高麗 門)?”
“이 문은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서 ‘코라이 몬’이라고 합니다.”
안내자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코라이 몬(高麗門)’을 지나면 큰 돌이 박혀있는 돌담이 나온다. 기요마사의 돌(淸正石)이라는 커다란 돌이 석담의 작은 돌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축성의 전문가인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구마모토의 城主)가 거석(巨石) 운반 시 자신은 물론 민중의 노소에 관계없이 가락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운반하였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있다. 이 돌 앞에 서있는 안내문을 보면 실제로 ‘코라이몬(高麗門)’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다.
“나고야성은 櫓門(망루문-二階建)과 高麗門(평지문-平屋建)을 네모의 형태로 배치하고.......”
“코마(高麗)의 산기슭에 펼쳐지는
고대 귀화인의 마을은
연보라 빛 하늘에 구름이 하나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그들의 눈에도 지는 해가 있었다.
출렁이는 바다와 바람에 흩날리는 돛
그들은 뱃머리를 돌려
서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월도 흐르고 슬픔도 흐른다....”
아키야 유타카(秋谷豊)씨의 ‘무사시노’라는 시(詩)의 일부다.
코마(高麗)는 사이타마(埼玉)현에 있는 일본의 지명이다.
그런데, 이 나고야 성에도 고려(高麗)의 문이 있다니......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필자의 머리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거기에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코라이몬’ 기와장의 무늬가 태극마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도 “어? 대한항공 마크와 똑같네요.” 했다. 한 일본인은 옛 성주의 가문(家紋)이라고 했다.
그리고 천수각을 떠받치고 있는 돌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또 하나의 태극 마크를 발견했다. 문양이 아니라 서러운 마음을 새긴 상흔(傷痕)이었다. 낙서처럼 보이는 외로운 문양에는 애절함이 서리어 있는 듯 했다.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그들의 눈에도 지는 해가 있었다.”는 싯귀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태극은 우리 고유의 유산
<박영효 일행은 1882년 8월 23일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하여 23일까지 체류하면서 니시무라야(西村屋) 숙소의 지붕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대한민국의 태극기는 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하늘 아래, 남의 나라 땅에서 처음으로 게양되어 휘날리게 되었다. 중국의 태극ㆍ팔괘ㆍ도식의 ‘고대극도’가 현해탄 위에서 영국인에 의해 태극ㆍ4괘로 둔갑하고 그것이 조선국기로 결정되어 일본 땅에서 처음으로 게양된 것이다.>
김상섭 교수의 ‘태극기의 정체(동아시아, 2001)’에 있는 글이다.
하지만, 태극은 중국보다 우리가 수백 년을 앞선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태극문양은 ‘고인돌에서도, 고구려의 벽화에서도 액을 막는 부적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태극은 하늘이고 우주이며 해와 달이고, 음양의 화합을 통해 풍년과 다산을 염원하는 표상이기도 하다. 또한, 태극은 먼저와 나중이 없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무한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박영효 보다 200년을 앞서서 일본 땅에 태극을 심었을까?
필자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일까?
봄 햇살에 더욱 빛을 발하는 천수각 용마루의 ‘금빛 샤치(鯱)’를 바라보며 수수께끼 같은 여운(餘韻)을 남긴 채 나고야성문을 나섰다.
“언젠가는 이 코라이문(高麗門)의 연유(緣由)를 밝혀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