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 지가 올해로 400년을 맞았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10년 만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화친정책에 의해서 12차례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400년이 지난 오늘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와 관련한 각종 행사가 벌어지고 있고, 언론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있다.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조선통신사 문화 사업회를 이끌면서 한국과 일본에 조선통신사 알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강남주 위원장(전 부경대 총장, 65세)은 서울경제(2000, 6, 8)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조선의 일류 예술가나 문장가들이 파견돼 일본 내 조선통신사 유적이나 유물에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 이 조선통신사들이 한류(韓流)의 원조(元祖)로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한류(韓流)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온갖 풍상(風霜)을 견디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러나 한국도, 일본도, 그러한 사실을 모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관심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까?
조선은 문화의 고향
일본의 ‘가도와키 마사토(門脇正人, 64세)’ 씨가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찾아내 엮은 책이 있다. 바로 ‘조선인 가도(街道)를 가다’이다. 그 책머리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다.
“금년 5월(1990년),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가이후(海部) 수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최초로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9월에는 북조선을 방문한 일본 대표단도 과거의 보상・사죄를 강하게 결의해서 실행하는 자세를 나타냈고, 북조선 측도 후지산마루(丸) 선장 등을 석방하는 방침을 피력하였다. 일한(日韓)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이나 흐른 오늘도, 한일 관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듯 예측하기 어려운 돌풍(突風)만 일뿐이다.
우리는 진실 된 역사를 통해서 돌풍을 잠재우고 미래를 열어가는 새바람을 일으켜야 한다.
아무튼, ‘가도와키’ 씨는 “예로부터 한국(조선)은 문화의 고향이다..........「조선인의 가도(街道)」를 통해서 과거를 탐구하고, 동시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의식도 탐구해 보고자 한다” 면서 1990년 7월, ‘조선인 가도’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이 길은 뭐라고 하는 길입니까?”
“조선인 가도는 어떤 길입니까?”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생각 하십니까?“
”이 길에 얽혀 있는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가도와키’ 씨가 가도(街道)를 취재할 때 들었던 주민들과 통행인들의 질문이다.
그는 ‘연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통행인들이 이 길에 대해서 똑바로 알고 있을까?’부터 탐문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그 길을 통학하는 히코네 동(彦根 東)고등학교 학생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도와키’ 씨가 교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학교의 학생들이다.

사라진 길과 길의 보존, 그리고 여인들
「조선인가도」를 걸으면서 ‘가도와키’ 씨는 도로 표시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기록의 달인(達人)이라는 일본 사람들이 표시를 하지 않는 데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친정 형태의 통일국가를 세운 메이지(明治) 유신 때 조선통신사와 조선 문화의 흔적들을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까지 점령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다’(중앙일보 2007, 4, 23).
그러나 ,‘가도와키’ 씨는 하치만(八幡)시립도서관 옆에서 「조선인가도」의 도로 표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인가도」의 저자인 ‘고우난(江南良三)’ 氏가 세운 것이었다.
“시립도서관 근처에 있는 지도의 간판과 도로표지는 제가 세운 것입니다. 다른 연도(沿道)의 표시도, 역사적으로 유서가 있는 도로도, 이를 보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호소에(細江敏)’ 氏에 의해「조선인가도」라는 비(碑)도 세워지게 되었다. 이는, 정부 차원이 아닌 용기 있는 소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도 역사가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표다.
조선인 가도-
교토(京都)를 떠난 통신사 일행은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북상 하다 야스(野洲)라는 곳에서 갈라져 히코네(彦根)까지 ‘조선인 가도‘라는 특별한 길을 이용했다. 길이는 41km에 달한다(중앙일보). ’가도와키‘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히코네(彦根)에서 일어난 통신사에 얽힌 슬픈 사연을 소개했다.
〈姜弘重의 海槎錄(1624년)에는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때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여성 두 명이 소우안지(宗安寺)에 찾아와서 말했다는 눈물겨운 사연이 들어있다.
“저는 양반의 딸입니다. 고향의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겠습니다만, 부모님의 안부만은 듣고 싶습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습니까?”
“어린 아이가 있어서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가르키면서 “저 아이들 때문에.....” 초겨울 눈 발 속에서 떨리는 여인의 손끝과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 누가 감당할 수 있었으랴.
어떤 여인은 8살 때 잡혀 와서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14살이 되었다고 했단다. 그녀가 통신사를 만났을 때는 어느덧 사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
분노도, 추억도, 가슴 깊이 묻어야만 했던 여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모진 세월- 얼마나 많이 흐느꼈을까?
‘길은 인간이 걸어야 할 숙명의 노정(路程)’
‘가도와키’ 씨도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그는 2세 때 소아마비에 걸렸으나 불굴의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그는 교토대학 물리학부 수학과를 졸업하고, 참고서를 만드는 신학사(新學社)에서 근무하다가 시가현립(滋賀縣立) 히코네동(彦根東)고등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1978년부터 이 학교의 신문부 고문을 맡아 학생들이 신문 만드는 일을 지도 해 왔다.
이 「조선인 가도를 가다」라는 단행본도 학생들과 함께 취재하여 학교 신문에 연재하였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지금은 은퇴하여 시가현 안토(安土) 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퇴근할 무렵에 자택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부인이 받았으나, 두 번째 는 그가 직접 받았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무슨 이유로 이러한 일을 하시고 , 또 책까지 내셨습니까?”
“아- 반갑습니다. 꽤나 오래 전의 책인데 한국의 독자께서 ‘국제전화’로 문의를 하시다니요?”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는 단지 길을 좋아합니다. 길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야 할 숙명의 노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도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다’는 ‘가도와키’ 씨는 길은 바로 인류의 역사라고 하면서,「조선인 가도」를 연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그렇다. 하늘의 길, 바다의 길, 육지의 길, 골목길, 오솔길.......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길 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길은 「삶의 길」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길이자 문화의 길」이기도 하다.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포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