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가 일본 도요타의 열풍에 빠져 있다. 도요타의 성공 스토리가 모든 기업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도요타 출신들은 그동안 회사에서 터득한 '노 하우'를 바탕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경영 ․ 기술 컨설팅은 물론 초청 강연을 하면서 또 다른 도요타의 특수를 누리고 있다.
지난 3월 20, 21일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도요타 전문가인 하야시다 히로미츠(林田博光)씨가 ‘도요타의 경영전략 및 도요타 생산방식(TPS)’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가 도요타의 성공 스토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수 십 년간 무파업 신화를 이어오고 있는 성숙된 노동조합이 오늘날 도요타를 만든 일등공신이다.”는 말이 더욱 교훈적이었다. 그러나 하야시다 씨는 도요타도 애초부터 노사관계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오늘과 같은 우호적인 노사관계의 정립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차례의 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도요타, 자금난으로 시달리다
실제로 도요타에게도 화려한 영광만이 아닌 경영 악화에 따른 노사 대립의 시기가 있었다. 사람도, 조직도, 슬픔과 절망 속에서 성숙되어 가고 완성되어 간다고 했다. 성공한 도요타에도 아픈 상처와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1937년 도요타(豊田) 자동차를 설립하여 승용차 생산의 길이 열리게 되자 사장인 도요타 키이치로(豊田喜一郞) 씨는 여러 종류의 신차(新車) 개발을 착착 진행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찌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단 말인가. 경영환경이 급격하게 악화(惡化) 되었으니 말이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됨에 따라 도요타는 자금난에 빠지게 되는 등 어려운 경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에 승용차 생산 제한이 해제되어 숨통이 트이는 듯 했으나, 동년 3월에 발표된 닷지 라인(민간금융기간 중심의 새로운 제도)의 영향으로 자동차 산업은 수요의 격감과 자금난 가중이라는 이중의 타격을 받았다. 이 발표로부터 다음 해인 1950년 3월에 이르는 동안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적인 소용돌이가 일었다. 1,100여 개의 회사가 넘어 졌고, 51만 여명의 해고자가 거리로 내몰렸다. 도요타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채권단의 지원으로 도산 위기모면
계속되는 일본 정부의 긴축재정정책은 도요타에게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요타는 급기야 숨통이 막혔다. “연말 자금 2억 엔의 융자가 없다면 도요타는 도산한다.”는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은행단(채권단)의 협조로 융자를 받게 된 도요타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은행 측으로부터 제시된 기업회생프로그램에 따라 강력한 조직 개편을 하였으며, 자동차 판매 회사를 분리, 독립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12월, 회사와 노동조합은 “임금을 10%삭감한다. 그 대신 회사는 인원 정리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노사(勞使)가 혼연일체가 되어 위기돌파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 밖으로 악화되었다. ‘인원 정리를 절대로 하지 않겠다.’ 던 키이치로(喜一郞) 사장도 손을 들고 말았다. 1950년 4월, 회사 측과 노조와의 교섭은 결렬되었고, 노조는 장기적인 스트라이크에 돌입하였다. ‘자동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열정을 불태우던 키이치로(喜一郞)씨도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에 걸쳐서 계속되었던 노동쟁의는 6월 10일, 노사(勞使)가 회사 회생 안(案)에 기초한 각서에 조인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새롭게 출발 한다는 의미에서 키이치로(喜一郞) 사장이 사임했다. 또한, 일부 공장의 폐쇄와 희망퇴직 형식의 ‘인원 정리’라고 하는 커다란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 특수라는 행운이 오다
장기화 되었던 노동쟁의가 일어났던 시기에 자동차 배급 통제의 전면 철폐를 비롯해서 전쟁 중 계속적으로 시행되었던 여러 가지의 규제가 하나하나 풀렸다. 완전한 자유 경쟁시대로의 이행이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6 ․ 25 동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 6 ․ 25 - 유엔군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대량으로 군수품을 조달하였다. 소위 한국전쟁 특수가 일어 난 것이다. 도요타는 군용 트럭을 대량으로 주문 받았다. 다른 산업도 전쟁 특수로 휘파람을 불었다. 더불어 국내 각사로 부터의 자동차 주문이 줄을 이었다.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던 도요타는 일순간에 되살아나게 되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었다.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 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6,25 동란이라는 호재(好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 한국은 3년 동안 진행된 이 전쟁이 혼란과 파괴의 연속이었다. 이 시기에 유엔군을 포함하여 213만 명에 이르는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비용 150억 달러라는 엄청난 물적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국토가 파괴되었고 경제적 궁핍은 극(極)에 달하게 되어 이른바 구호물자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한 정치적인 혼란이 야기된 것은 물론 윤리의 파탄과 모럴의 부재 등 폐허화된 시대상을 보이게 되었다. 살육과 파괴로 대변되는 시대, 모든 출발을 불모의 땅에서 ......〉(우한용 교수)
도요타의 회생과 키이치로(喜一郞)의 죽음
도요타 키이치로(豊田喜一郞)씨가 사장직 사퇴를 표명한 날이 6월 5일이었고,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勃發)한 날이 6월 25일이었다. 20여 년 동안 자동차산업을 위해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던 그가 20일만 잘 견디었다면 승승장구 했을 일이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키이치로(喜一郞) 씨는 간발의 차이로 번영과 영광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러나 그는 굴러온 호박(?) 같은 행운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고 , 사장의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는 사장직을 떠난 후에 고혈압 치료에 힘을 기울이면서도 그토록 좋아하던 연구에 몰두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장남이 연구해 오던 PC 건축과 식료품 제조에도 참여 하였으며, 도요타 자동차와 별도로 소형 대중 자동차와 자동 변속기의 연구에 몰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임직원들의 간청에 의해서 경영진으로의 복귀가 눈앞에 다가올 즈음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잃은 그의 의식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조병화, 밤의 이야기․20)
1952년 3월 27일. 도요타 키이치로(豊田喜一郞,1894-1952)씨는 58년간의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를 버리고 홀연히 떠났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키이치로 씨의 빠른 죽음은 회한(悔恨)과 노동쟁의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열정으로 세운 회사를 스스로 물러나야 했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다음 세대에 희망을 주는 기업을 만들자.”는 현대중공업 노사 공동 선포식의 보도(중앙일보 / 3,27)가 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봄소식만큼이나 신선했다. 이 노사는 1995년부터 12년 연속 무분규 기록을 보유할 정도로 모범적이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안정 성장을 이어 가려면 ‘노사 화합이 더욱 굳건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회사가 세운 12년 연속의 무분규 기록이 120년 아니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절망과 아픔’을 겪었던 도요타가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하여 만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더욱 간절해진 소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