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침략의 출발기지, 나고야성(名護屋城)에서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 업데이트 2007-01-1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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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우리의 대중가요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떠오르게 하는 요부코(呼子)의 나고야(名護屋)성터에는 방초(芳草)대신 낙엽만이 뒹굴고 있다.
일본의 유명 성(城)들이 대체로 옛 모습을 유지하며 관광객을 맞고 있으나, 이 성(城)은 이끼 낀 돌담과 나이든 수목들이 덧없는 세월과 권세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

 

〈16세기 후반 오랜 세월의 전란을 제패하고 일본천하를 자신의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는 ‘조선과 중국’을 지배하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1587년 쓰시마(對馬島)의 ‘소우(宗)’ 를 통해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한다.
 또. 1590년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길을 내라’ 즉, 향도정명(嚮導征明)을 내세운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못 판단한 히데요시는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쟁을 준비한다.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이자 총사령부의 본진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요부코(呼子)의 나고야(名護屋) 성(城)이다. 〉

 

이러한 내용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서술한 책이 있다. 일본인 카도와키 마사토(門脇正人, 64세)의 「조선인 가도(街道)를 가다(1995)」이다.
카도 와키(門脇)씨는 “왜? 요부코 이었을까요?”라는 필자의 질문에 “조선과 가장 가까운 지리적인 여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고 답변하였다. 그는 고등학교의 교장까지 마치고 현재는 박물관(滋賀)에서 일하고 있다.

 

히데요시의 야욕은 어디까지 갔나?

 

〈히데요시는 규슈와 시코쿠, 쓰고쿠의 모든 다이묘(大名)를 망라하여 지역적인 군단을 편성하였다. 규슈의 다이묘, 시고쿠・쓰고쿠의 다이묘, 도후쿠의 다이묘까지 이 나고야성에 참진하였고, 일반 민중은 농민과 어민이 징발 되었으며 각 포구의 배들도 요부코 항에 모아졌다. 따라서 농민과 어민들의 생활은 파탄지경이었다.〉(일본사 101장면, 강창길, 하문종)

 

이렇게 해서 이 나고야 성에 집결한 전국의 다이묘(大名)는 130명이 훨씬 넘었다. 그들은 나고야 성을 중심으로 반경 약 3km이내에 있는 수많은 구릉에 진영을 구축했다. 결국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조선 침략을 위한 야욕의 불을 지핀 것이다.

 

 제1군에서 제9군까지 15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가 맡은 제1군이 1592년 4월12일 백 여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를 출발하여 그 다음날 부산에 상륙하였다.
조선과 일본 양국에 엄청난 인적, 물적, 정신적 피해를 끼친 무모한 침략 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조총의 위력을 내세워 서울・평양을 점령하였고,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1593년 4월 서울을 버리고 남쪽지방에 집결 하였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후 양국의 강화교섭이 추진되다가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결렬되었다.

 

1597년 2월 히데요시는 14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재침을 명(命)하였다. 이것이 곧 ‘정유재란’이다. 정유재란의 형세는 당초부터 일본군이 불리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凊正)의 부대가 12월 말에서 1월 초까지 울산에 성을 쌓고 지구전을 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몰락을 앞당긴 침략 전쟁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모든 일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넘기고 숨을 거둔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퇴각을 한다. 순천성에서 퇴각하는 고니시(小西) 군대와 일전을 벌린 전투가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이다.
결국, 11월 26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가 철퇴함으로써 7년간의 침략 전쟁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일본군의 무수한 약탈과 살육, 방화 등으로 인한 깊은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일본에서 발간된 도해 일본사 (野島博之 감수. 成美堂, 2006)에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수명을 단축한 전쟁이었다고 했다.

 

〈만년의 히데요시(秀吉)가 무모한 조선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이 16세기 최대 규모의 전쟁은 정권의 붕괴를 앞당기게 되었다.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과 강제연행 등으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나고야 성은 왜 빈터로 남아 있을까?

 

 성(城)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시설이다. 그러나, 이 나고야 성(城)은 조선침략을 위한 거점으로 삼기위해 쌓은 성(城)이었다. 1591년 후반에 각 다이묘에 의한 분담공사가 시행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면적은 약 17ha. 당시의 규모로는 오사카 성 다음가는 규모였으며, 금박을 사용한 천수각은 실로 화려한 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성벽만 남아 있을 뿐 화려했던 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인접 가라쓰(唐津)성(城)의 축성시 ‘나고야성의 해체 자재를 사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가라쓰 성(城)은 1602년부터 1615년까지 13년에 걸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인 ‘데라사와 사마노카미 히로타카’가 세웠다고 함)
 
아무튼, 돌담으로 둘러싸인 광대한 영역이 있고 웅장한 천수각이 우뚝 솟아있어야 할 자리에는 성터를 알리는 돌기둥만이 오롯이 서 있다.

 

“돌기둥 너머가 바로 ‘역사의 굴곡을 상징’하는 현해탄이다.”

 

 필자는 돌기둥에 기대어 현해탄을 바라보았다. 현해탄은 ‘전쟁의 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수면 아래로 감추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듯 너울거렸다.


        < 나는 이 바다 위
        꽃잎처럼 흩어진
        몇 사람의 이름을 안다.


        어떤 사람은 건너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사람은 돌아오자 죽어 갔다.
        어떤 사람은 영영 생사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픈 패배에 울었다.
        - 그 중엔 희망과 결의와 자랑을 욕되게도 내어 판 이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코 싶지는 않다.> (현해탄/ 임화, 1908~1953)

 

“바다에서 꽃잎처럼 스러져 간 사람들의 넋을 뒤늦게라도 위로 하자.”면서 현해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것일까?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것일까? 주름진 수목들의  빛바랜 이파리들만 소리 없이 지고 있을 뿐 성터는 고요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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