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출판사에서 시집을 가득 보내왔다.

시집이 뜨거운 고고학 보고서, 혹은 박물학지 같다. 읽어 보면 그 안에 한 생(生)이 누워 있거나 서 있거나 엎드려 있다. 소인(消印)이 없는 사랑과 슬픔, 젊음과 늙음, 인연과 장소, 황홀함과 절뚝거림, 탄식, 눈물, 희망, 맑음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웅웅거릴망정 그 빛깔이 시인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신기하고 놀랍다. 가급적 열심히 읽으려 하고 좋은 문장으로 외로운 시인(시인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감정의 채권추심원이다.)들에게 예(禮)로서 대하고 싶다. 버릴 시가 하나도 없다. 그 한 편을 쓰기 위해 빈 종이 위에 던졌을 항해와 풍파, 지혜와 번뜩임을 생각해 보았다.

허인숙 시인의 첫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인문학사)

허인숙 시인의 첫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를》(인문학사)을 마주한다. 시가 단아하고 정갈하다. 시를 대하는 헤르만 헷세적인 순수함, 미묘한 감정을 조각하거나 그려내려는 통찰력이 돋보인다. ‘나의 삶도 바람이 부는 대로 펄럭거렸다’(시 <가을소묘> 中)거나 ‘머리끝이 주뼛거린다’(시 <건망증> 中)거나, ‘나는 늘 감정의 반을 드러내지 못하고’(시 <내 얘기 들으러 오실래요> 中)라거나 ‘하루살이의 번뇌를 읽어본다’(시 <밤의 테라스> 中)는 등등의 시 속 문장을 질겅질겅 오독오독 씹으며 삶의 쌉쌀함을 함께 체험해 보았다.

눈 감아 볼래요?

그대를 위한 세레나데를 불러 줄 순 없지만

하루의 끝에 앉아 그대와 함께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달콤하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손 내밀어 볼래요?

그대와 함께 두 손 깍지 끼고

초록이 푸른 들판을 마구 달리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서로 끌어안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나를 봐 줄래요?

웃는 모습만 보아도

단풍처럼 깊어지는 내 마음을

발그레한 얼굴로 수줍게 보여 주고 싶어요.

귀 기울여 볼래요?

그대 가진 마음 중 한 개만 주어도 감사히 받으며

이따금씩 들려오는

휴대폰 건너 목소리에도

두근거리는 이 마음을 들려주고 싶어요.

전해 줄래요?

그대의 눈을 통해

나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곁에 없는 그대에게 작은 바람 하나

잔잔한 바람결에 그대의 마음

한 조각 살포시 띄워 보내줄래요?

- 허인숙 시인의 <그대에게 보내는 서시(序詩)> 전문

경남 진주가 고향인 허인숙 시인은 계간 《문예운동》 봄호로 2010년 등단했다. 서울시인협회, 시와비평문학 회원이며 두레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조명제 문학평론가(시인)는 그의 시를 읽고 “형상력이 두드러지면서도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호흡의 문장은 허인숙 시인의 시적 단련과 독자적 세계관의 내력을 넉넉히 짐작하게 한다”고 썼다.

정선영 시인의 7번째 시집 《빨랫줄에 걸터앉아 명상 중입니다》(작가마을)

정선영 시인의 7번째 시집 《빨랫줄에 걸터앉아 명상 중입니다》(작가마을)를 펼쳤다. 중견 시인답게 확실히 언어 사용이 절제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말이 비워지고 그 비운 자리에 여운을 채워 넣었다. 시인이 언어로 그어놓은 연과 행, 행간을 따라 걸으며 시인이 보려고 했던 세상의 이면(裏面), 감각의 진솔함, 감정의 풍부함을 느껴 보았다. ‘밖엔 눈이 내리고/ 연탄은 하얗게 질려 있고/ 시간은 천년같이 늘어지고/ 바람은 여전히 문고리를 잡아 당기고’(시 <불안> 中)를 읽으며 시인이 던진 그물코에 걸려 넘어지는 독자들을 상상해 보았다. 시인으로서 그의 생을 시 <미리 보다>로 짐작할 수 있었다.

찰랑거리는 바람을 당겨

그늘을 헤엄쳐

가는 저 여자

살이 녹아내려

가시로 남아 투명하네

더 빠질 물기도

숨 쉴

아가미도 없는

날개 단 물고기 한 마리

햇빛을 건너가고

내일을 모르듯

안간힘으로 살았고

고기 한 덩이만큼의

죄의 무게를 달았다

시에, 시가 있어

살아냈다

타다만 뼈 하나

남았다.

-정선영 시인의 <미리 보다> 전문

정선영 시인은 1962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2001년 《한맥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영주문협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우울한 날에는 꽃을 산다》, 《홀로그램》, 《디오니소스를 만나다》, 《달의 다이어트》, 《슬픔이 고단하다》, 《책상 위의 환상》 등이 있다. 이 시집을 해설한 박진희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는 내면에 차오르는 감정과 사유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비워냄으로써 마침내 고요에 이르는 여정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고 썼다. 배재경 시인(사이펀 발행인)은 “정선영의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광활한 ‘독서’와 ‘사유’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간파할 수 있다”고 했다.

김정순 시인의 3번째 시집 《변명》(작가마을)

김정순 시인의 3번째 시집 《변명》(작가마을)을 읽었다. 서시(序詩)이자 표제작인 시 <변명>을 읽으며 글 쓰는 기자로 살아온 언어와 문장을 떠올려 보았다. 변명할 것이 너무 많았다. 시인은 ‘부끄러워하지는 않으리라’고 했지만 기자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한 알의 콩>에서처럼 ‘잠깐/ 가슴이 뜨거워’지는 생의 따스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시 <얼굴·셋>에 나오는 긴 문장, 예컨대 ‘조금씩 소비해 가는 生을 점철하는 갖가지 애환들이 함께 섞여 있으면서도 제각기 분류된, 그것들의 균형과 불균형 같기도 한, 가계부의 항목처럼 정해진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한 것이 그녀의 얼굴’을 마음속으로 조각해 보았다. 시 <다시 봉천동>를 읽으며 ‘세 평짜리 공동변소’ ‘죽자 살자 발버둥치던 판잣집’ ‘욕으로 거품을 물던 경상도 아줌마네’를 떠나보냈던 잊힌 세월을 말풍선처럼 그려 보았다.

콩을 삶으려고 까부르다가 한 알을 놓쳤다

콩은 그 잰걸음으로 앞뒤 가릴 것 없이 막무가내 굴러 갔다

나의 큰 발걸음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콩의 달음박질을 따라잡지 못했다

콩은 마침내

내 발과 손이 닿지 못하는 좁은 구멍 속으로 몸을 숨겼다

꼬챙이 하나면 잡아낼 수 있는데

날카로운 꼬챙이로 겨누고 좁은 구멍 속을 노려본다

순간.

구멍이 시커멓게 질린다

어둠 속에서 콩의 심장이 요동친다

나는 슬그머니

꼬챙이를 버린다

며칠 지나

그 좁은 구멍에서 파란 실핏줄 하나가 길을 열고 나왔다

비가 물을 갖다 날랐을 것이다

햇빛이 체온을 나눠 주었을 것이다

밟히지 말라고 이웃이 그 좁은 공간을 내어 주었을 것이다

나는 잠깐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정순 시인의 <한 알의 콩> 전문

시인 김정순은 1990년 《시와 비평》으로 등단했다. 부산문인협회, 부산시인협회, 사천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부산시협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겨울 강변에서》, 《불면은 적막보다 깊다》가 있다.

시집 맨 뒷장에 ‘뒷말’이란 에필로그가 있다. 전문을 소개한다.

오래된 시들이다. 늙고 낡고 탄력 잃은 시들이다. 그렇지만 내 발자국을 지울 수 없는 시들이다. 힘이 달려서 책벌레 똥 가득 묻은 옷을 갈아입히지 못했다. 시는 내 30대를 포장하지 않고 40대를 위장하지 않는다. 시에 미숙하고 철없던 시절, 한때나마 내 삶의 일부였던 시절을 기록해 두고 싶다. 시대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시와 나의 모습도 변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 보다. 어쩌랴 이것이 내 시의 약력이다. 그리운 건 아니지만 미안하다 여전히

 장이지 시인의 6번째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

장이지 시인의 6번째 시집 《편지의 시대》(창비)를 읽었다. 연서(戀書)의 편지글 산문시가, 이성복 시인의 과거 연작을 읽을 때처럼, 방법적으로 처절하고 낭만적이며 날카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속눈썹’ ‘귀밑머리’까지 볼 수 있는 깊은 시선과 잘 손질된 문장, 도회적 감각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당신이 더는 편지를 쓰지 않기로 해서 제 안의 편지가 불타고 그 불이 별의 우체국을 태우고 편지가 검불이 되어 흩날리면…’(시 <표변> 中)이라거나 ‘이곳에서는 엽서를 구하기 어려워 엽서를 구하다 죽고 엽서를 쓰다 죽어 왜 우리는 이 작은 테두리 안에 쓸 말을 찾아 헤맬까’(시 <한산(寒山> 中)라거나 ‘당신은 사막 가운데에서 헤어지자고 말하고 내 발밑에서는 이빨 돋은 모래 고기가 선회하기 시작한다’(시 <슬픈 습관> 中)거나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시 <불타버린 편지> 中)라거나 ‘당신의 잠에 몰래 찾아가 잠든 당신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옵니다’(시 <물 아래 편지> 中)에서와 같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물치 언어들이 독자들을 즐겁게 하고 슬프게도 만들었다. 시집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싶다.

당신에게 엽서를 띄우기 위해 나는 멀리 떠나네 여행지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기묘한 엽서를 사 오곤 했는데 돌이켜 보니 서로에게 엽서를 쓴 적은 없었네 엽서에 나는 뒤늦은 사랑을 쓰면서 동시에 엽서에 대해 쓰네 오, 정말, 엽서에 상처를 내는 펜촉, 상처를 내지 않고는 이 엽서를 다시 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아네 우리 안의 어딘가가 이미 죽어 있었다면 우리는 더 적절히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서로에게 덜 기대하고 서로를 덜 파괴하면서 말이야 그러나 상처를 내지 않고는 사랑을 쓸 수 없네 부서져 새로 태어나지 않고는 말이야 슬프지 않은 엽서를 찾아 나는 멀리 떠나네 이 세상에 없는 엽서를 찾아서 떠나네 다시 사랑의 취기가 도취의 파도가 소인으로 찍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장이지 시인의 <먼 곳> 전문

장이지 시인은 2000년 《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 《라플란드 우체국》 《레몬옐로》 《해저의 교실에서 소년은 흰 달을 본다》, 시선집 《안국동울음상점1.5》, 문학평론집 《환대의 공간》 《콘텐츠의 사회학》 《세계의 끝, 문학》, 영화평론집 《극장전: 시뮬라크르의 즐거움》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장은영은 시집 해설에서 “장이지에게 ‘편지’와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환기하는 쌍생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