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강나루의 시집을 읽는다. 작년 8월에 낸 첫 시집이다. 2020년 각종 문예지에서 동시와 수필, 시가 동시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광주에서 발행하는 문학잡지 《시와사람》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1989년생이니 비교적 젊은 에디터다.

‘시인의 말’에서 ‘누구나 풀 수 있는 기호가 되기를 소망한다’면서 ‘나의 시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했다.

시들이 전체적으로 결이 곱고 부드럽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따스하다. 그래서 그의 어떤 시를 읽어도 공감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다. 그의 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미워할 코드가 별로 없다. 압축과 비유, 여운을 주는 방식은 아직 젊으니 차차 터득하리라 생각한다.

많은 시들 중에서도 표제시인 <감자가 눈을 뜰 때>와 <겨울 시금치 밭에서>, 그리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를 주목해서 읽었다.

베란다에 둔 감자 종자에서 눈이 트였다

마대 속은 어두운데

하늘을 보려고 옆구리에서 항문에서, 온몸에서

빛이 틔어 마대 속 하늘이 환해졌다

본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일

마대 속에서 답답해 하면서 하늘을 열고 빛을 쏟아낸다

눈은 한결같이 하늘을 향하고

한철동안 빛을 보지 못한 씨감자는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온몸이 파랗다

하늘을 본다는 것은

독기를 품는 일,

푸른 독기를 품는 일은 빛을 보는 일

어둠 속에서 겨우 숨 쉬는 것들은

멍이 들도록 빛의 출구를 찾을 것

나는 마대 속 같은 방 안에서

온몸에 멍이 들도록 몸부림쳤다

마침내 푸른 하늘을 닮아

멍이 든 영혼이 눈을 뜬다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보면 반갑다

하늘에 부딪혀 하늘을 닮아서

멍을 뚫고 하늘이 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하늘은 푸르고 멍든 사람은 빛이 되어

줄래줄래 줄기를 뻗으며 빛을 향해 포복한다

세상의 모든 멍든 눈들이 아프게 길을 간다.

 -시 <감자가 눈을 뜰 때> 전문

시인은 베란다의 마대 속에 둔 감자에서 눈이 틔인 것을 보고 생명의 몸부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철동안 빛을 보지 못한 씨감자는/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온몸이 파랗다’고 썼다. ‘파란 감자’는 ‘온몸에 멍이 들도록 몸부림’을 치고 ‘마침내 푸른 하늘을 닮아/ 멍이 든 영혼이 눈을 뜬다’고 썼다. 그런데 시인은 그 다음 행에서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보면 반갑다’고 썼다.

이 문장에서 한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 문장에 밑줄을 친다.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마지막 행, ‘줄래줄래 줄기를 뻗으며 빛을 향해 포복한다/ 세상의 모든 멍든 눈들이 아프게 길을 간다.’ 이상하게도 마지막 행에만 마침표가 찍혀 있다. 의도한 것일까 아닐까. 어쨌든 눈에 멍이 든 사람이 바라보는 하늘, 그 햇살이 그립다.

우리 삼대남의 집 문간에 살 때

할머니는 옥상에 시금치 씨앗을 뿌리셨다

가족들 모두 난로가에 모여 불을 쬘 때면

하늘길 숨차게 내려온 겨울 바람에게

연신 싸대기를 맞으면서도

피학증 환자처럼 그것을 즐기는,

거적대기 하나 없는 옥상의 시금치는

그 때마다 엔드로핀이 솟아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잎사귀 구석구석에

뜨거운 단맛을 머금었다

할머니는 마당귀에

겨울 시금치 씨앗을 뿌리신다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쓰거운 겨울 바람에 길 꺾어졌지만

우리들은 승냥이처럼 들판을 쏘다니며

시금치처럼 가슴에 푸른 멍을 키운다

여름날 무더위에 얻어맞은 상처들이

단맛이 되는 사탕수수처럼

쓴 겨울을 견딘 시금치가 단맛을 만드는 역설,

겨울 노지에서 자란 시금치가

왜 단맛이 나는지를 아는가

 -시 <겨울 시금치 밭에서> 전문

3대(代)의 대하소설을 한 편의 짧은 시 속에 비벼 넣는 솜씨가 놀랍다. 할머니는 남의 집 문간에 살 때 옥상에 시금치 씨앗을 뿌렸고, 시금치는 거적대기 하나 없이도 푸른 잎을 틔웠다. 사람은 겨울 바람에 꺾일지 몰라도 시금치는 쓴 겨울을 견디며 단맛을 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 행이 울림을 준다. ‘겨울 노지에서 자란 시금치가/ 왜 단맛이 나는지를 아는가’.

독자는 이 시를 읽고 위로를 받으며 ‘단맛’이 얼마나 긴 겨울을 품고 있는지 깨닫게 되리라.

설을 앞두고 우리 일가 모여

생전의 할아버지가 쓰던 작은 탁자 위에

낡고 글씨가 굵은 성경 한 권

그 위에 모두 손을 얹고

설날 상주였던 아버지가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왜 착하게 사셨어요, 나는 착하게 살지 않을 거예요

왜 이까짓 성경책만 읽었어요, 나는 성경을 읽지 않겠어요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가 착하게 살며 성경을 읽는 동안

세상은 착해지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학동 아파트 철거 붕괴사고가 터지고,

화정동 아파트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내가 거짓으로 살아가도, 성경을 읽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

내일모레는 민족의 대명절이라며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은 남광주시장에 북적거리는데

오늘 밤, 할아버지의 낡은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하는 동안

아버지는,

열다섯 살 때 만주벽돌공장을 돌아

6·25 한국전쟁의 한복판을 지나

겨우 성경 한 권을 남긴

남루한 할아버지의 일생을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한다.

 -시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 전문

시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기도할 때>도 3대 이야기가 나온다. 화자인 ‘나’는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할아버지의 생을 더듬어 본다. ‘착하게 사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이 등가(等價)로 보는 시선이 따스하다. 그러나 ‘세상은 착해지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 그 지독한 현실을 이해해야만 하는 모순적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럼에도 착하게 살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가난한 시인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독자에게 왜 시를 읽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시 <감자가 눈을 뜰 때>처럼 ‘눈에 멍이 든 사람을 보면’ 왜 반가울까. 마지막 행 ‘남루한 할아버지의 일생을/ 눈 지그시 감고 기도’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우리 나름의 ‘답’을 알고 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ps...할아버지가 남기신 ‘성경 한 권’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