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일병합조약.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국권을 일제에 넘겨주면서 발표한 내용이다. <병합조약>이 맺어진 것은 이보다 1주일 전인 8월 22일이었다.
순종은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보다 1주일 전에 맺어진 <병합조약> 전문은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양국간 병합조약을 체결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조약의 내용을 보면 ‘한국 민중의 구원’이나 ‘상호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조약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황실과 구한국 고관대작의 예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병합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병합 조약(倂合條約)〉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이 조약에 따라 구한국 왕실은 일제 35년 내내 안녕을 누렸다. <덕혜옹주> 같은 영화나 소설에서 그려내는 것과는 달리, 조선 왕실의 구성원들은 의친왕 이강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제 체제 아래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왕가’는 천황 다음가는 부자였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1945년이지만, 이씨 왕실의 사직(社稷)이 폐해진 것은 일제가 패망한 1945년이었다.
이씨 왕실뿐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에 정권을 오로지했던 노론 계열의 고관대작들은 일제로부터 백작이나 후작이니 남작이니 하는 작위와 천황의 은사금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다. 유림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일제가 만든 경학원(經學院) 대제학을 하는 게 소원이었던 유림들이 적지 않았다.
나라가 망할 때에도 깨끗하게 망하는 경우가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경우가 있다. 위정자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지’를 다하지 못하고, 일제에 순응했던 대한제국(조선)은 망해도 더럽게 망한 경우였다.
그나마 망해가는 나라의 체면을 살려준 이들은 재야의 이름 없는 선비, 백성들이었다. <매천야록>을 지은 황현은 순종의 병합조서를 접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벼슬을 살지 않았으므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몸을 바친 자가 한 명도 없다면 어찌 통석할 일이 아닌가! 나는 위로 하늘의 병이의 아름다움과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쾌할 것이다."
아편을 먹고 자결하기 전 황현이 남긴 절명시(絶命詩)를 보면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진정한 지식인’ 노릇하기가 쉽지 않다는 탄식이다. 황현은 죽음으로 지식인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보여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