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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永老의 프로야구 27년 취재 비화 - 요절복통 프로야구(上)

“영숙이 돌리도~
내 오늘 밤 홈런 쳐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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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과 정삼흠이 술집을 나선 것은 새벽 5시가 다 돼서였다. 저녁 6시 30분의 등판 시간을 13시간여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이 마신 술은 양주 4병에 맥주가 수십 병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잠실야구장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선동열이 평소보다 더 완벽한 투구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정삼흠도 7회까지 2점만 내줄 정도로 좋았지만 워낙 선동열의 球威(구위)가 좋아서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후 MBC 라커룸으로 선동열이 찾아와 맥없이 앉아 있는 정삼흠에게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야, 우리 다음에도 또 음주 투구하자. 광주에서는 내가 살게.”


⊙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수류탄 투척하듯 시구를 한 전두환 대통령
⊙ 이만수의 걸쭉한 입담 : “성님, 내 좋은 직구 하나 드릴 테니 한번 넘겨뿌소”
⊙ 천신만고 끝에 역전승한 허구연 감독 대성통곡
⊙ 해설가 하일성 : “피 말리는 감독을 하느니 차라리 장사나 하겠어요”
⊙ 이건희 삼성 구단주 : “스카우트할 때는 마누라와 자식도 믿지 마라”
⊙ 출전 당일 새벽 5시까지 양주 4병, 맥주 수십 병 마시고 강속구 던진 선동열과 정삼흠
⊙ 200승 대기록 수립한 송진우 투수 : “진우는 이제 100승 애들하고 안 논다는데요”

奇永老 스포츠 평론가
⊙ 1954년 경기 파주 출생.
⊙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수료.
⊙ 일요신문 스포츠부장 역임. KBSㆍ서울 교통방송ㆍ부산 MBC 스포츠 코너 진행.
⊙ 저서: <재미있는 스포츠 이야기>, <스포츠 그 불멸의 기록>
어린이 날을 맞은 지난 5월 5일 오후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08 프로야구 LG트윈스 대 두산베어스 경기에서 많은 가족단위 팬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며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2008 프로야구가 사상 두 번째 500만 관중 돌파를 할 것으로 보인다. 관중 흡인력을 갖고 있는 롯데 자이언츠가 8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 최하위에 머물러 있던 기아 타이거즈가 脫(탈)꼴찌 조짐을 보이면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부터 화재를 모으고 있는 SK 와이번스의 스포테인먼트(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합성어)는 한층 세련된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가고 있고, 가장 두꺼운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두산 베어스도 상위권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프로야구는 국민스포츠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각 팀의 승패는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 패턴을 좌우할 정도로 초미의 관심사항이 됐다. 1982년에 창단해 올해로 27년째를 맞은 프로야구의 이면을 더듬어 보았다. 등장인물들과 내용들은 필자가 27년 프로야구를 취재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들을 기초로 약간의 덧칠을 가한 것임을 밝혀 둔다.
 
 
  全統의 始球
 
1982년 3월 27일 한국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6개팀이 결성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화려한 개막식 행사가 끝난 후 전두환 대통령이 유창순 국무총리, 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의 안내로 운동장에서 첫 시구를 했다.
  1982년 3월 27일,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은 그날따라 일찍 일어났다. 아니 차라리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몰랐다.
 
  “육군사관학교 골키퍼였던 내가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출발을 알리는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시구를 하다니….”
 
  목숨을 건 5·18과 12·12, 그리고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이같이 흥분되지는 않았다. 처음 청와대에 입성했을 때 영부인이 된 이순자 여사가 “이게 꿈이에요”라며 살을 꼬집었지만 이날 아침 전두환은 “이게 꿈이야 생시야. 내가 프로야구 원년 시구를 하다니”라며 벗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청와대에서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열리는 동대문야구장까지는 불과 1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도 많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지나갈 때는 10여 분 전부터 교통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동대문야구장에 들어서자 3만여 관중,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 그리고 3군 군악대의 힘찬 연주 등으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로열박스에서는 徐鐘喆(서종철)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 등 많은 체육계 인사들이 대통령을 영접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로열박스에 앉아 개막식전 행사를 바라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는 스포츠를 무척 좋아했다. 공부는 별로 잘하지 못했지만 체력이 뛰어나 체육시간만 되면 무슨 운동이든지 1등을 도맡아 했고, 특히 씨름과 복싱에는 남다른 소질을 보여 아무리 덩치 큰 녀석이라도 감히 덤비질 못했다.
 
  공고 시절에는 복싱 글러브를 목에 걸치고 다니는 허세를 부리기도 했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서는 복싱부와 축구부를 창설해서 두 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무튼 스포츠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아주 좋은 모티브였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이 선수로 직접 뛰었던 축구를 야구보다 먼저 프로화하려 했지만 축구인들이 주는 떡도 받아먹지 못하는 바람에 야구를 먼저 프로화한 것이다. 전두환은 야구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그가 자랄 때만 해도 야구는 글러브, 배트 등 비싼 장비를 사야 하기에 부잣집 녀석들이나 하는 운동으로 알고 있었다.
 
  전두환은 오늘의 시구를 위해 청와대 境內(경내)에서 몇 차례 연습을 해 봤지만 명색이 ‘스포츠 대통령’이니 멋지게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던지면 타자는 헛스윙을 해 줄 테고, 그러면 심판은 목이 터져라 “스트라이크”를 외칠 테지만, 실제로 타자의 어깨와 무릎 사이를 꽉 차게 통과하는 완벽한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싶었다. 스트라이크를 던질 요량에 조급한 마음이 들자 ‘프로축구를 먼저 창단했으면 정말 멋지게 始蹴(시축)을 했을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자 축구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드디어 장내 아나운서가 “전두환 대통령의 역사적인 시구가 있겠습니다”라고 소개했고, 전두환은 의젓하게 마운드로 걸어 올라갔다. 순간 내외 귀빈과 3만여 관중은 전두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전두환은 주심으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후 입에 슬쩍 대더니 이상한 폼으로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공은 마치 敵陣(적진)에 투하되는 수류탄처럼 포물선을 그리더니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포수의 미트에 박혔다.
 
  “스트라이크.”
 
  전두환은 군 출신답게 야구공을 수류탄 투척하듯 시구를 한 것이다.
 
 
  총 맞은 김우근 선수
 
양상문 당시 청보 핀토스 투수.
  육상 100m 코치들은 자기가 지도하는 선수가 후반 加速走(가속주)에 실패해 스피드가 갑자기 떨어지면 ‘총 맞았다’고 말한다. 육상 100m는 스타트, 중반질주, 가속도, 피니시로 이뤄지는데 가속도를 내야 하는 60~70m 지점에서 스피드가 떨어지면 좋은 기록이 나올 수가 없다.
 
  한국 단거리 육상 선수들 대부분이 스타트와 중반질주까지는 세계 정상급 선수들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데, 가속도를 내야 할 때 오히려 총 맞은 사람처럼 헤맨다. 때문에 1979년 멕시코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徐末九(서말구)가 세운 10초 34의 한국 신기록이 30년이 다 되도록 깨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야구장에서도 총 맞은 선수가 있었다. 해태 타이거즈가 宣銅烈(선동열)이라는 不世出(불세출)의 투수에 힘입어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일이다. 1987년 9월 28일 MBC 청룡은 해태 타이거즈에 0대2로 패해 2위 해태에 1경기 차로 밀려났다.
 
  당시는 전기리그 1·2위와 후기리그 1·2위가 플레이오프를 통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팀을 가리기 때문에 전·후기 리그 가운데 한 리그에서 최소한 2위 이상을 해야 챔피언에 도전할 수 있었다. MBC는 9월 29일부터 최하위 팀 청보 핀토스와의 원정 3연전이 남아 있어 2승 1패만 하면 플레이오프에 오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3연전의 첫 경기인 29일 경기에서 이기면 유리한 고지에 오르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청보 핀토스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꼴찌를 면치 못할망정 홈에서 자신을 밟고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된 경기는 3시간을 훌쩍 넘어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고, 스코어는 3 대 3, 그리고 10회 초, MBC가 먼저 찬스를 잡았다. 아웃 카운트는 투 아웃까지 몰렸지만 주자가 1·2루에 있었기 때문에 단타라도 최소 1점, 큰 거 한 방이면 3점을 얻어 거의 승리를 굳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이로운 1점대 방어율을 세 차례나 기록한 선동열의 해태 시절 투구 모습.
  그때 MBC가 승부수를 띄웠다. 발이 빠른 2루 주자 박흥식은 그대로 놔두고, 발이 느린 1루 주자 김용달을 김우근으로 교체했다. 외야수 김우근은 최근에 출전 기회가 별로 없어서 경기 감각은 떨어지지만 발은 빨랐기 때문이다. 발에는 슬럼프가 없다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김우근은 대타건 대주자건 자신이 경기에 출전하리란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있다가 얼떨결에 1루 베이스로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1회부터 던지고 있던 청보의 양상문 투수와 김동기 포수는 다음 타자 신언호가 4타수 2안타를 때리고 있어서 주의를 했지만 失投(실투)를 하고 말았다. 신언호가 양상문의 높은 직구를 받아쳐 중견수 키를 훌쩍 넘기는 2루타성 타구를 날렸다.
 
  마침 투 아웃 상황이었기 때문에 ‘딱’ 소리가 들리자마자 1루 주자 김우근과 2루 주자 박흥식이 스타트를 해서 홈까지 파고들었다. 청보의 중견수 김윤환이 뒤늦게 공을 잡아 홈까지 던졌지만 타구가 워낙 깊었기 때문에 2점은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2루 주자 박흥식은 여유 있게 홈 인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지구상에 야구가 생긴 이후 가장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1루에서 2루를 지나 3루를 돌아 홈으로 뛰어들던 김우근이 갑자기 총알 맞은 사람처럼 다리를 꼬며 넘어진 것이다. 그래도 신언호의 타구가 워낙 깊숙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서 달렸으면 충분히 세이프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우근은 일어섰다가는 다시 쓰러지고, 또 일어섰다가는 다시 넘어지는 것이었다. 김우근은 일어설 수 없게 되자 아예 땅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윤환의 손을 떠난 공은 포수 김동기의 글러브에 안착해 있었다. 김우근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땅바닥을 기었고, 홈에서 기다리던 김동기 포수는 ‘독 안에 든 쥐를 잡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태그했다. 태그 아웃을 당해 경기를 망친 김우근이 절룩거리면서 벤치로 돌아오자 김용달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약 먹었냐?”
 
  “응, 어젯밤 기침이 나서 감기약을 먹었거든. 그게 잘못됐나 봐.”
 
  “어제 감기약을 먹었는데 하루 지나서 왜 오늘 발이 꼬이냐고.”
 
  “목은 나았지만 다시 다리에 감기가 왔나 봐.”
 
 
  이만수 포수의 걸쭉한 입담
 
삼성 라이온스 선수 시절의 이만수 씨 가족. 왼쪽부터 하종, 이만수 씨, 언종, 부인 이선희 씨.
  SK 와이번스의 李萬洙(이만수) 코치는 역대 포수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선수로 인정을 받았다. 2006년 올스타전에 앞서 프로야구 25년 역사를 통틀어 프로야구 올드 스타를 뽑을 때는 최고 득점을 얻기도 했다. 프로야구 팬들은 1984년 이만수가 타격, 홈런, 타점 등 공격 주요 부문 3관왕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만수는 한양대 시절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 그러던 이만수가 한양대 동창인 부인 이선희(부인 이름도 같은 팀의 선배 투수와 똑같다) 씨와 결혼을 하기 위해 생전 문 앞에도 가 보지 않은 교회를 열심히 나가 ‘이 집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아들 이름을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의 하종으로 짓기도 했다. 현역 시절에는 이선희 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치 머슴이 장작을 패 산더미를 만들듯이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타격훈련을 한 것은 ‘프로야구 전설의 고향’에 수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홈런을 친 후 베이스를 돌고 있는 삼성라이언스 이만수 선수.
  이만수는 홈런을 치고 나서 가장 오두방정을 많이 떠는 타자로 유명했다. 자신이 친 타구가 홈런임을 직감한 직후부터 온몸에 전율이 감도는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기 시작해 베이스를 다 돌고 다시 홈을 밟을 무렵이면 제풀에 지칠 정도였다. 홈런을 얻어맞은 투수는 이만수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다이아몬드를 도는 동안 마운드 위에서 고역스럽게 바라봐야 했다.
 
  이만수가 홈런을 친 다음 타석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홈런을 얻어맞은 투수의 보복이 몸에 맞는 볼로 이어졌다. 이만수는 현역 시절 몸에 맞는 볼이 가장 많은 선수이기도 했다. 이만수의 포수로서의 능력은 투수를 리드하는 ‘인사이드 워크’와 ‘미트 질’ 못지않게 그의 ‘입방정’을 빼놓을 수 없다.
 
  이만수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사생활을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석에 들어선 선수에게 어떤 얘기를 해야 타격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포수였다. 키 171cm의 타격왕 출신 이정훈이 타석에 들어서면 “아따, 방망이가 니 키보다 더 크다. 그 큰 방망이 갖고 우예 안타 치갔노. 빙그레 이글스에는 니 키에 맞는 방망이도 없나. 하긴 우리 팀 유격수가 키가 작으니 그쪽으로 치면 되갔네”라고 야유를 했다.
 
  홈런왕 경쟁을 벌이고 있는 해태 타이거즈 김봉연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성님, 오늘따라 컨디션이 엄청 좋아 보입니더. 내 좋은 직구 하나 드릴 테니 한번 넘겨뿌소” 하고 말했다. 김봉연은 홈런왕 경쟁을 하고 있는 이만수가 직구를 줄 리가 없다고 보고 변화구를 기다리다 날아온 직구에 삼진을 당하곤 했다.
 
이정훈은 171cm의 ‘단신’임에도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기교타자였다. 1997년 5월 97프로야구 OB-롯데전에서 OB의 이정훈이 우익수 깊숙한 안타를 친 후 단숨에 홈으로 질주, 추가점을 얻어내고 있다.
  또한 한창 타격 감각이 좋은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면 “형님! 야구화 끈이 풀어졌어야. 다시 매고 치소”라며 쓸데없는 데 신경을 쓰게 해서 타격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타자는 설사 야구화 끈이 단단히 매어져 있다 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타석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이만수는 갓 결혼한 새신랑이 타석에 들어서자 예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따 니 요즘 살 많이 빠졌어라?”
 
  “….”
 
  “근데, 니 색시 어떻게 관리하고 있길래 어젯밤 나이트에 나타났다냐?”
 
  그러자 새신랑 선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근데 우리 색시가 나이트에서 형수님을 만났다는데요, 성경책을 카운터에 맡기고 노시더라고요….”
 
  그 다음부터 이만수의 투수 리드는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구연 감독과 갈비집 사장 하일성 씨

 
왕년의 해태타이거즈의 대표적 홈런타자 김봉연.
  “스포츠 뉴습니다. MBC 야구해설가 허구연 씨가 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의 새 감독으로 선임됐습니다. KBS의 하일성 해설위원과 함께 깊이 있고 화려한 언어구사로 인기를 모으고 있던 허구연 씨는 청보 핀토스뿐만 아니라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과연 허구연 씨가 어떤 야구로 어떤 성적을 올릴지 프로야구계가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1985년 10월 각 방송국의 스포츠 뉴스와 신문의 스포츠면은 프로야구 명해설가 허구연 씨의 야구감독 변신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허구연 감독은 당시 35살이라는 역대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 외에도, 야구인으로는 드물게 고려대 석사 출신이라는 간판, 해박한 야구 지식으로 명쾌한 해설을 하다가 감독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허구연 감독은 1985년 10월 청보 핀토스 감독에 취임한 후 강태정, 한동화, 故(고) 김명성 등 하늘 같은 선배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인천, 제주도, 마산 등지를 돌며 착실하게 동계훈련을 할 때까지는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니까 그게 아니었다. 프로야구를 마이크를 잡고 말로만 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1986년 3월 29일 청보 핀토스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善戰(선전) 끝에 5대6으로 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프로야구 최강팀과의 첫 경기에서 1점 차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는 것은 마수걸이치고는 성공작이었다. 그러나 2차전에서 10대1로 대패를 당한 후 팀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허구연 씨는 프로야구 해설가에서 야구감독으로 변신, 통산 15승2무40패의 성적을 냈다.
  허구연 감독의 작전이 먹혀 들지 않는 것이었다. 선발 투수는 2회를 견디지 못하고 강판당하기 일쑤였고, 타자들은 결정적일 때 헛방망이를 돌렸다. 한마디로 투타의 밸런스가 무너진 것이다. 아무튼 삼성에 1·2차전을 패한 이후 ‘어어~’ 하다가 7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이제 5년째였지만 개막 이후 최다 연패를 당한 것이다.
 
  4월 6일 청보 핀토스는 춘천구장(당시 청보는 춘천구장을 보조 홈구장으로 썼다)에서 빙그레 이글스와 시즌 8차전을 갖고 있었다. 1회 말 청보 핀토스는 금광옥 포수가 빙그레 이상군 투수로부터 투런 홈런을 빼앗는 등 3점을 선취해서 허 감독의 첫 승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3회 초 야수 실책 등이 겹치면서 4점을 내줘 3 대 4로 역전됐고, 빙그레 전대영에게 솔로 홈런, 투런 홈런을 잇달아 내주면서 스코어가 3 대 8까지 벌어졌다. 이제까지 7연패를 당하는 패턴과 비슷했다. 선발 투수가 일찍 무너지고, 불펜 투수는 죽을 쑤고, 산발 안타는 나오지만 찬스 때는 삼진 아니면 병살타를 때리고…. 그러나 8회 말 청보가 3점을 따라 붙어 6대 8이 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드디어 운명의 9회말, 원 아웃에 6번 타자 양승관이 4번 김진우, 5번 정구선을 1, 2루에 두고 거짓말같이 끝내기 3점 홈런을 터뜨렸다. 청보가 七顚八起(칠전팔기)에 성공하는 순간, 태산 같은 체격의 허 감독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쪼르륵 흘러내리더니 엉엉 울면서 통곡까지 하는 것이었다. 허 감독이 하도 울어 대자, 한대화 코치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하일성 KBO사무총장. 야구해설가로 명성을 날렸다.
  “허 감독, 사나이가 겨우 1승한 것 같고 마치 부모를 잃은 사람처럼 펑펑 울면 어떻게 해?”
 
  마침 TV카메라가 허구연 감독이 우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KBS 정도영 아나운서가 하일성 씨에게 물었다.
 
  “하일성 씨! 허구연 감독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마구 우는 것 같은데요.”
 
  “네, 아마 7연패를 당하다가 모처럼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니까 그동안 연패를 하면서 매스컴과 팬들로부터 당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모양이에요.”
 
  “아무튼 말로만 야구 하다가 실제로 부딪치니까 엄청나게 힘든 모양이지요, 제가 볼 때는 하일성 씨는 허구연 씨와는 다를 것 같은데요.”
 
  “아~ 아니에요, 저는 피 말리는 감독을 하느니 차라리 장사나 하겠어요.”
 
  그로부터 수년 후 하일성 씨는 정말로 강남에 갈비집을 냈고, 2006년 초부터는 한국야구위원회 KBO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허 감독은 5월 9일 8승23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올리다가 강태정 감독대행에게 팀을 맡기고 일시 퇴진했다. 다시 그는 후기리그에 복귀해서 7승2무17패를 기록, 통산 15승2무40패의 성적표를 남기고 마이크 앞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부터 우리나라 프로야구계에는 “명해설가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너구리 장명부와 30승
 
프로야구 시즌 30승 신화의 주인공 ‘너구리’ 장명부 씨. 2005년 4월 13일 사망했다.
  2005년 일본에서 사망한 재일동포 장명부 씨는 선수 시절 너구리라는 별명답게 능수능란한 피칭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에서는 너구리보다는 곰 짓을 해서 거액을 놓치기도 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이 끝나고 다음 시즌에 대비해 동계훈련 중이던 1983년 1월 어느 날 재일동포 1호 장명부 투수가 삼미 슈퍼스타즈 홈 구장인 인천구장에 나타났다.
 
  인천구장에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허영 사장을 비롯해서 김진영 감독 등 모든 관계자가 장명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프로야구 원년 꼴찌를 한 팀의 구세주로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일본 프로야구 중견급 투수가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날 저녁 허영 사장은 장명부를 인천 올림푸스호텔 라운지로 불러 가볍게 한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이호헌 사무차장도 함께했다. 허영 사장이 이호헌 씨에게 물었다.
 
  “이 차장님, 지난해 OB 베어스 박철순 투수가 24승을 올렸는데, 20승 투수가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그렇고 말고요, 메이저리그도 20승 투수라면 최고 투수로 알아줍니다. 더구나 지난해는 팀당 84경기밖에 하지 않았잖아요. 아무리 올해부터 100게임으로 늘어난다 해도 20승 올리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자 허영 사장이 장명부에게 물었다.
 
  “후쿠시(장명부) 상, 20승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장명부는 자신의 일본 이름을 불러 주는 허 사장을 인텔리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한국에서 일본말을 하는 사람은 지식층이라고 들어 왔기 때문이다.
 
  “저는 한국에 올 때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정명부의 말을 들은 허 사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30승도 할 수 있나?”
 
  장명부는 허 사장 말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물었다.
 
  “제가 30승을 올리면 뭘 해 주시겠스무니까?”
 
  야구를 잘 모르는 허 사장은 장명부가 정색을 하고 나오자 옆에 있던 이 차장에게 자문을 했다. 이 차장은 서울대를 다닐 때 야구선수 생활을 했었고, 방송국에서 야구 해설을 할 정도로 야구에 관한 한 당대 최고수였다.
 
  “허 사장님, 올해부터 팀당 100게임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 투수가 25경기 정도, 최대 35경기밖에 마운드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30승을 올립니까? 내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절대 못합니다.”
 
  이 차장의 자문을 들은 허 사장은 자신 있게 말했다.
 
  “좋습니다. 후쿠시 상이 30승을 올리면 내 1억 원을 주겠소.”
 
  장명부는 깜짝 놀랐다. 당시 1억 원이면 강남 아파트 10채는 사고도 남는 거액이었다.
 
  “헷, 1억 원이오?!”
 
  “그래요, 1억 원…. 내 각서라도 써 줄까요?”
 
  “됐습니다. 증인으로 이 차장님도 있으무니까요.”
 
  그런데 장명부가 허 사장에게 각서를 받아 두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시즌이 시작되자 장명부는 승리의 화신으로 변했다. 만약 오늘 패했으면 다음날 자청해서 마운드에 올라 반드시 이겨야만 그 다음날 쉬곤 했다. 그렇게 해서 무려 60경기에 출전해서 시즌 종료를 2경기 남긴 1983년 9월 26일 해태 타이거즈전에서 승리 투수가 됨으로써 30승(16패) 고지를 달성했다.
 
  문제는 허 사장이었다. ‘30승=1억 원’은 사실 농담으로 한 얘기였다. 그런데 장명부가 거짓말처럼 30승을 올린 것이다. 어느 날 장명부가 사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사장님! 1억 원 어떻게 된 겁니까.”
 
  영리한 장명부는 1년 동안에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1억 원’이라는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난처해진 허 사장이 말했다.
 
  “내 줌세…. 하지만 10년에 나눠 주겠네…. 그 대신 자네는 매년 30승을 올려야 하네.”
 
  “그렇다면 저도 30승을 10년에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장명부에게 말싸움에서 밀린 허 사장은 私費(사비)로 약간의 돈을 쥐여 주는 것으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스카우트할 때는 마누라와 자식도 믿지 마라”

 
이건희 당시 삼성 구단주. “스카우트 할 때는 마누라와 자식도 믿지 마라”는 명언을 남겼다.
  1983년 시즌이 끝난 후 삼미 슈퍼스타즈를 제외한 다른 팀들은 재일동포 선수 스카우트로 난리가 났다. 1983년 시즌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히로시마 카프에서 한물 간 것으로 알려졌던 장명부를 데려와서 30승을 올려 재미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국내 프로야구는 이제 어느 팀이 얼마나 좋은 재일동포 선수를 데려오느냐로 판가름 나게 됐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있는 선수 가운데 어머니가 투철한 애국자였던 장훈이나 워낙 처음부터 재일동포로 알려졌던 김정일 등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나는 한국 사람이오’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난 재일동포요’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재일동포로 밝혀진 선수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김일융과 김기태 투수, 그리고 난카이 호크스의 강타자 박광창 정도였다.
 
  그런데 김기태와 박광창은 각각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또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한국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융은 요미우리 신임 감독인 후지다의 선수 기용에 불만이 많았다. 후지다는 괴물투수의 원조인 에가와를 중용했고 김일융은 차별을 받았다. 그래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다.
 
  김일융이 한국 프로야구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프로야구 팀에서 모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삼성 라이온즈와 OB 베어스가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OB 베어스는 박철순과 김일융, 삼성 라이온즈는 김시진과 김일융의 오른손과 왼손의 원투 펀치면 우승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왼손 투수인 김일융의 볼은 140km 안팎으로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제구력이 칼날 같았고, 특히 커브가 좋았다. 느린 커브와 더 느린 커브, 그리고 매우 느린 커브 등 3종류의 커브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았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 게임 운영이 능수능란했다.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 3년 동안 54승 20패를 기록, 1년 평균 18승을 올렸다.
 
  1985년에는 혼자서 25승을 올리기도 했다. 또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장명부와는 달리 심성도 매우 고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야간 경기에 강해 ‘밤의 신사’로 불렸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었다. 김일융으로서는 한국의 프로야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액수만 맞으면 아무 팀이나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 OB 베어스는 김일융을 立稻先賣(입도선매)해 두었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朴容昆(박용곤) 구단주가 일본 프로야구를 시찰하러 갔을 때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쇼리키 구단주에게 만약 재일동포 김일융이 한국에 오면 우선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김일융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박용곤 구단주는, “글쎄, 우리 팀으로 오게 되어 있어”라고 큰소리를 쳤다. 쇼리키 구단주의 구두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는 李健熙(이건희) 구단주가 “돈은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김일융을 잡아라”는 엄명을 내려 놓고 양동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스카우트 실무자는 정공법으로 김일융에게 다가갔고, 이건희 구단주는 김일융이 친아버지 이상으로 따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 前(전) 감독(현재 요미우리 종신 명예감독)과 핫라인을 열어 놓고 있었다. 나가시마는 수년 전부터 이건희 구단주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어 오고 있는 사이였다.
 
  나가시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실권자가 창업자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郞)의 아들 쇼리키 도루(正力亨)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장이 아니라, 같은 계열사인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인 고바야시 요소지(小林與三次)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고바야시는 창업주 쇼리키의 사위였다. 1급 정보를 입수한 이건희 구단주는 비밀리에 고바야시 사장을 만나 김일융의 스카우트를 전격적으로 매듭지었다.
 
  김일융의 스카우트에 성공한 이건희 구단주는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는 마누라와 자식도 믿어서는 안돼”라고 말하곤 했다.
 
 
  재일동포 김성근 감독과 ‘삼팔따라지’ 김응룡 감독
 
14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그라운드를 떠나는 해태 타이거스의 김성한(오른쪽) 선수가 1995년 9월 24일 OB 베어스와의 경기가 끝난 후 가진 은퇴식 후 김응룡 감독과 악수를 하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야구는 오더로 시작해서 오더로 끝난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두 팀의 수석코치가 구심 앞에서 출전할 선수를 적은 오더를 교환한다. 그리고 두 팀 코칭스태프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자기 팀과 상대팀의 오더를 봐 가면서 선수 교체 타이밍을 잡는다.
 
  그런데 1991년 7월 14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삼성 라이온즈 대 해태 타이거즈전에서 오더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당시만 해도 해태 타이거즈의 ‘밥’이었던 삼성 라이온즈가 꼼수를 쓴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재일동포 출신의 김성근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상대 전적 2승 9패로 밀리자 스포츠맨으로서 해서는 안 될 비겁한 수를 쓴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국내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1983년부터 소위 말하는 꼼수를 쓰는 선수가 나왔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히든 볼’이다. 히든 볼은 대개 투수가 1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서 던진 볼을 1루수가 투수에게 다시 던져 주는 척하고 숨기고 있다가 1루 주자가 루를 이탈하면 바로 태그해서 아웃을 시키는 것이다.
 
  물론 반칙은 아니지만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2006년 시즌 초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 이승엽이 1루 주자로 있다가 히든 볼에 당하고는 분해서 씩씩거리며 벤치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날도 여느 경기와 마찬가지로 두 팀의 수석 코치인 삼성의 배대웅과 해태의 김봉연이 오더를 교환하기 위해서 박찬황 주심에게 다가왔다.
 
  “해태 선발 투수가 누구예요?”
 
  배 코치가 박 주심에게 물었다.
 
  “응, 선동열이야.”
 
  박 주심은 아무런 의심 없이 대답했으나 눈치가 빠른 김 코치가 배 코치가 들고 있던 파일을 빼앗았다. 파일에는 왼손 투수용 오더와 오른손 투수용 오더 두 장이 있었다. 당시는 선발 투수 예고제가 없었는데, 그날 해태는 로테이션상 왼손 김정수와 오른손 선동열 두 명의 투수 가운데 한 명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재일교포 출신의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
  삼성의 배 코치가 오른손 투수 선동열이 나올 경우에 대비한 왼손 타자 일색의 오더와, 왼손 김정수가 나올 경우에 나갈 오른손 타자 일색의 오더 두 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 주심에게 금방 알게 될 해태 선발 투수를 물어봤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김 코치가 배 코치의 파일을 빼앗아 삼성의 얕은 수가 탄로 난 것이다.
 
  박 주심은 삼성이 非(비)신사적인 행위를 했다고 보고 해태 김응룡 감독에게 삼성이 갖고 있는 2장의 오더 가운데 마음대로 한 장을 택하도록 했다. 그런데 당연히 오른손 타자 일색의 오더를 택할 줄 알았던 김응룡 감독이 왼손 타자 일색의 오더를 택하는 게 아닌가?
 
  김응룡 감독은 삼성의 오른손 타자건 왼손 타자건 간에 선동열의 강속구로 응징하려고 했었다.
 
  과연 선동열은 2회까지 150km가 넘는 강속구와 135km를 넘나드는 ‘삼색 슬라이더’로 삼성 타자들을 농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겁한 삼성을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선동열의 사명감이 너무 지나쳤는지, 3회부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왼손 지명타자 박승호에게 홈런을 얻어맞는 등 무너지기 시작했다.
 
  6회까지 롯데에서 옮겨온 김용철 등에게 홈런을 추가로 허용해서 8안타 7실점의 수모를 당하면서 패전 투수가 됐다. 1988년부터 이어져 온 ‘삼성전 무패=13연승’ 행진도 끝나고 말았다. 그날 밤 10시경 김성근 삼성 감독이 김응룡 해태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김 감독! 사과드리무니다, 죄송하게 돼스무니다.”
 
  “김 감독, 앞으로는 그러지 마쇼, 후배들이 뭘 배우겠소.”
 
  “그래서 내가 우리 팀 내일 선발을 알려 드릴까 하무니다.”
 
  “거~ 성준이 아니오.”
 
  “어떻게 알아스무니까.”
 
  다음날 김 감독은 선발 투수 성준을 한 타자만 상대하게 하고 다른 투수로 바꿔 버렸다.
 
 
  MBC 청룡의 자살 폭탄주 작전
 
‘음주 투구’ 사건의 주모자 정삼흠 투수.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 선수의 현역 시절 구위는 난공불락이었다. 마무리 투수로 활약할 때는 그가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 팀은 공격 패턴이 달라졌다. 사실, 2005년 선동열 감독이 내세웠던 삼성 라이온즈의 ‘지키는 야구’는 선동열을 보유했던 김응룡 감독이 써먹던 작전이었다.
 
  아무튼 해태 타이거즈를 제외한 다른 팀들은 선동열을 꺾기 위한 갖가지 비책을 마련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선동열의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에 웬만한 선수 직구에 버금가는 130km 후반의 슬라이더는 알고도 당하는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였다.
 
  선동열은 제구력도 정상급이었기 때문에 기다린다 해도 1루로 나갈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선동열과 선발 로테이션에 맞대결하는 투수들은 ‘아~ 1패는 떼 놓은 당상이구나’라며 자책을 해야 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MBC 청룡의 ‘자살 폭탄주 작전’이었다. 어차피 맨정신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기 때문에 술을 먹고 싸워 보려는 것이었다. 당시 MBC에는 선동열과 고려대 동기동창으로 막역한 사이면서 술친구이기도 한 정삼흠 투수가 있었다. 정삼흠은 머리 좋고 운전 잘하고 노래 잘하고 술도 잘 먹는,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동열아~ 나다.”
 
  “응, 삼흠아. 웬 전화냐. 내일 잘 던져라.”
 
  “나야 자신 있지만, 네가 웬만큼 던져야 이겨 보지.”
 
  “그건 그렇고 왜 전화했어?”
 
  “오늘 좀 만나자.”
 
  “엄청 몸을 사리는 놈이 선발을 하루 앞두고 나를 만나자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네가 서울로 왔으니까 내가 한잔 사지.”
 
  선동열은 잠시 뜸을 들였다.
 
  “좋아, 어디로 나갈까?”
 
  두 사람은 내일 선발 투수라는 사실들을 애써 잊은 채 부어라 마셔라 술을 먹어 댔다.
 
  “삼흠아! 근데 너 무슨 일 있는 거니?”
 
  “….”
 
  “혹시 내일 선발 취소된 거 아니냐고?”
 
  “내일 나 선발 맞아, 근데 술이 땡기는 걸 어떡하니.”
 
  “그런데 하필 술 파트너가 나냐고?”
 
  “마, 우리 팀에서 누가 내일 선발인 나와 술을 마시겠냐, 그렇다고 나 혼자 마시자니 불공평하잖아.”
 
  “맞다, 너는 술 먹고 던지고 나는 그냥 맨송맨송한 상태로 던지면 그렇지….”
 
  “이제 알았으면 마시라고.”
 
  “좋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마셔.”
 
  두 사람이 술집을 나선 것은 새벽 5시가 다 돼서였다. 저녁 6시 30분의 등판 시간을 13시간여 남겨 놓고 있었다. 그들이 마신 술은 양주 4병에 맥주가 수십 병이었다. 정삼흠은 선동열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구단에 전화를 걸었다.
 
  “일단 성공했습니다.”
 
  “너는?”
 
  구단 관계자는 그때까지 자지도 않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네, 저도 마실 만큼 마셨지만 저녁도 든든히 먹고, 컨디션도 챙겼기 때문에 말짱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잠실야구장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선동열이 평소보다 더 완벽한 투구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정삼흠도 7회까지 2점만 내줄 정도로 좋았지만 워낙 선동열의 球威(구위)가 좋아서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경기가 끝난 후 MBC 라커룸으로 선동열이 찾아와서 맥없이 앉아 있는 정삼흠에게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야, 우리 다음에도 또 음주 투구하자. 광주에서는 내가 살게.”
 
 
  100승 투수와 200승 투수
 
한국프로야구사상 최초로 200승 고지를 밟은 송진우 투수.
  한화 이글스 송진우 선수가 2007년 8월 29일 광주 구장에서 기아 타이거즈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되면서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200승을 달성했다.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는 각종 기록으로 선수를 평가하게 마련이다. 200승은 이제까지 국내 프로야구에서 나온 어떤 기록보다 뛰어난 기록이다. 원조 괴물 투수 선동열도 146승에 그치고 있고, 송진우는 ‘200승, 100세이브’를 달성한 메이저리그 일본 프로야구를 포함해서 세계 프로야구 두 번째 선수가 됐다.
 
  그러면 100승은 누가 가장 먼저 달성했을까? 프로야구 6년째인 1987년 국내 프로야구는 77승으로 다승부문 1위를 달리고 있던 삼성 라이온즈 김시진과 75승으로 2위인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투수 가운데 과연 최초의 100승은 누가 먼저 달성할 것인가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출발은 김시진이 좋았다. 김시진은 4월에만 4승을 보태 81승으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최동원은 개막전에서 청보 핀토스에 안타를 10개나 얻어맞으며 완투패(1대3)를 당하는 등 4월에만 겨우 2승(4패)에 그쳐 김시진에게 4승이나 떨어졌다.
 
  당시 프로야구는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뉘어 있었는데, 전기리그가 끝났을 때 김시진은 12승 4패, 통산 89승으로 100승까지 11승을 남겨 놓고 있었다. 후기리그에도 전기리그와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면 100승은 무난했다. 최동원은 전기리그를 9승 7패로 마쳐 통산 84승으로 100승까지는 무려 16승이나 남겨 놓아 사실상 1987년 시즌 100승 돌파가 어렵게 됐다.
 
  문제는 김시진이 과연 11승을 더 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김시진은 1987년 10월 3일 벌어질 삼성 라이온즈 대 OB 베어스의 후기리그 마지막 경기를 남겨 놓고 99승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 투수에 오른 김시진 선수.
  그날따라 김시진의 100승 제물이 되지 않으려고 OB 타자들이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6이닝 동안 7개의 안타를 터뜨렸다. 그러나 100승을 향한 김시진의 의지가 더욱 강해 안타를 얻어맞으면서도 실점은 하지 않았다. 반면 삼성 타자들은 착실히 점수를 올려 7점이나 내서 100승 고지에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김시진은 그로부터 24승을 더 올려 통산 124승을 올리고 은퇴했다.
 
  최동원은 1987년을 89승으로 마친 후 11승을 더 보태는 데 무려 2년 반이나 더 걸려 1990년 7월 12일 OB 베이스와의 경기에서 100승을 올렸다. 최동원은 결국 103승을 기록한 후 은퇴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선동열의 100승 제물도 OB 베어스였다는 사실이다. 선동열은 1990년 9월 2일 OB 베어스를 상대로 100승 달성에 성공했다. 아무튼 이제까지 프로야구 통산 100승이 넘는 선수는 16명이 탄생했다. ‘100승 클럽’회장은 사상 처음으로 100승을 달성한 현대 유니콘스 김시진 투수코치가 맡고 있었다.
 
  ‘100승 클럽’김시진 회장이 송진우 회원이 200승을 달성한 기념으로 회원들을 긴급 소집했다. 회의 시간이 되자 김 회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이강철 총무에게 물었다.
 
  “이 총무, 누가 빠졌나?”
 
  “네, 정민태 정삼흠 정민철 3명이 아직 안 왔습니다.”
 
  “정 씨들이 속을 썩이는구먼. 그리고 송진우는?”
 
  “송진우는….”
 
  “송진우는 어떻게 됐냐고?”
 
  “네, 그~ 저~.”
 
  “말해 보라고.”
 
  “제 입으로 말하기가 좀 뭣해서….”
 
  “괜찮아, 해 봐.”
 
  “진우는 이제 100승 애들하고 안 논다는데요.”
 
 
  “오늘 밤 홈런 쳐 줄게”
 
  J 선수의 인기는 대단했다. 연습생 출신의 홈런왕이라는 기막힌 스토리를 갖고 있는 데다, 총각이고 방망이도 좋아서 전국 어딜 가나 팬들이 많았다. 특히 뭇 처녀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어느 날 J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연타석 홈런을 터뜨려 홈런 레이스 1위로 나선 데다 팀도 단독 선두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번째 홈런은 상금 100만원이 걸린 ‘행운의 파랑새 존’을 넘어가는 일석삼조의 홈런이었다. J는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축하해 주었고, 팬들로부터 축하전화가 쇄도했다.
 
  J가 평소 동생처럼 따르는 김영숙과 술자리를 함께 한 것은 필수 코스였다. 영숙이는 J가 속해 있는 보라매 팀이 인천 원정경기 때마다 묵는 송도호텔의 현금출납 직원이었다. 영숙이는 야구 팬인 데다 마침 고향이 보라매 팀의 연고지인 충청도라 숙명적으로 J의 열렬한 팬이 될 수밖에 없었다.
 
  J도 영숙이가 싫지는 않았다. 썩 뛰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서글서글한 눈매에 뽀얀 피부, 그리고 얘기를 할 때마다 쏙 들어가는 양쪽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 카페 ‘만루 홈런’은 송도호텔 주위에서 가장 분위기 좋은 술집으로 유명했다.
 
  “영숙아, 영광이다. 벌써부터 내가 한잔 사려고 했었다.”
 
  영숙이는 대답 대신 보조개를 들여 보이며 싱긋 웃기만 했다.
 
  ‘이거 총각 죽여 주는구먼.’
 
  J는 귀엽게 들어간 보조개를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자, 오늘 신나게 마셔 보자고. 더블헤더로 마셔도 좋다고!”
 
  J만큼은 아니더라도 영숙이도 권하는 대로 받아 마셨다.
 
  “내일 경기에 지장이 없겠어요? 저 때문에 못 치면 어떡해요?”
 
  “야구는 내가 하지 영숙이가 하는 거 아니잖아. 걱정 말고 마시라고.”
 
  J는 오래간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영숙보다 더 취했다.
 
  “아 참, 이제 들어가셔야 되잖아요, 11시에는 코치들이 방마다 체크를 하는 것 같은데….”
 
  “아 그거 괜찮아. 이 코치님이 오늘 내 방은 체크하지 않는다고 하셨어, 스트레스 풀고 오라면서.”
 
  “좋아요, 그럼 2차는 내가 살 테니 우리 나가요.”
 
  아직 9월 초인데도, 송도의 밤바람은 차가웠다. 영숙이 안내한 곳은 회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이분 힘 좀 쓰게 싱싱한 걸로 한 마리 잡아 주세요.”
 
  영숙이가 광어회를 주문했다.
 
  ‘이 밤에 힘을 쓰라니…. 어휴.’
 
  J의 기대는 이제 톡 건드리면 터질 것같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J와 영숙은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씩을 나눠 마셨다. 이제 J는 대취했다.
 
  “보조개 씨, 이제 갑시다. 나의 침실로!”
 
  J가 영숙의 어깨를 자신의 팔로 감싸 안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웬 침실?”
 
  영숙이가 술이 싹 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럼 뭐야? 안 따라오겠다는 거야!”
 
  “제가 어딜 따라가욧!”
 
  “너 날 좋아하잖아. 팬이라며? 힘도 쓰라며?”
 
  “팬 맞아요. J씨는 팬 관리를 이렇게 하세요? 그리고 야구장에서 힘 쓰라는 거지.”
 
  영숙이는 말을 마치고는 포장마차를 뛰어나갔다. 돌발 상황에 멍하니 앉아 있던 J는 숙소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숙소에 도착한 J는 대취해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러고는 여직원 숙소로 돌진했다.
 
  “영숙이 돌리도~, 내 오늘 밤 홈런 쳐 줄게.”
 
  호텔 종업원과 손님들은 뜻하지 않은 프로야구 선수의 나이트 소동에 밤잠을 설쳐야 했고, 다음날 보라매 구단 프런트는 사건(?)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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