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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韓勝源 - 《페스트》 알베르 카뮈 著

반항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부조리의 영웅 이야기

글 : 韓勝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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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勝源
⊙ 72세.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1968년 《대한일보》에 단편소설 <목선>으로 등단. 장편 《앞산도 첩첩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해변의 길손》 《다산》 《추사》 《초의》 《피플 붓다》 등이 있다.
⊙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많이 읽혔다. 《페스트》는 제목이자 특단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정공법을 쓰고 있는 그 소설은 전후 한국 사회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리라. 독일과의 전쟁과 독일군의 점령 속에서 산 적이 있는 카뮈의 그 소설은 《이방인》이 그렇듯이 일종의 전쟁과 비슷한 상황 소설이다. 가령 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의해 시의 외곽으로 나가는 모든 문을 차단해 버렸을 때, 그 안에 갇혀 사는 이런저런 인간군상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나는 늘 ‘소설 쓰는 일’에 박혀 살고 있는 나를 《페스트》의 주인공인 의사 리외와 부조리의 영웅인 타루와 비교하여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나에게는 강박이 있다. 소설을 써야만 살고 쓰지 못하면 죽는다는 강박. 그 강박 앞에서는 신은 없다. 신이 소설을 써 주지 않고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인 내가 내 힘으로 반항하듯이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의 유행병인 페스트가 만연된 오랑에 갇혀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쓰려고 하는 소설 속에 갇혀 산다. 그것은 하나의 반항적인 실천의지이다.
 
  페스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어 간다. ‘빠르누’ 신부는 유능한 설교가이다. 죽음의 흑사병이 만연된 도시 안에서 천국에 대한 희망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다.
 
  두 차례의 설교를 하는데, 첫 번째의 설교에서 그는 페스트를 천벌로 규정하고 신앙심을 가지게 하는 기틀로 삼는다. 그는 고난과 불행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킨다. 그 병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고 인종하고 순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의 설교에서 그의 논리는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는 오통 판사의 어린 순수한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바 있었으므로. 그 순수한 어린 생명체에게 무슨 죄가 있어 천벌이 내린다는 것인가. 이것으로 보아 신은 없다고 의사 리외는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있는 신부에게 대들 듯이 말한다. ‘저 애는 아무 죄도 없었어요. 신부님도 잘 알 듯이.’ 그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신부는 추상적인 확신이 무너지고 만다. 불행은 질서 속에 포섭되지 않는다. ‘페스트로 인해 죽어 가는 일이 인간에게는 잔인한 것으로 보이지만, 신의 눈에는 최후적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신앙은 여기에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이 신부는 마침내 페스트에 걸리게 된다. 그는 끝내 의사의 치료를 거부한 채, 병적인 신앙심에 이끌려 절망 속에서 죽고 마는 것이다. 그는 반항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무신론자인 카뮈의 눈에 비친 그 신부의 모습은 참담하다. 반항할 줄 모르는 그는 카뮈의 눈에 부정적으로 보인다.
 
 
  병의 치유 혹은 병과 투쟁하는 진정한 의사
 
  의사 리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실한 의사이다. 페스트 감염이라는 잔인한 사실들과 접함으로써 치유해 보려고 애쓰는 구원(신부가 주창하는 구원과는 다른 의미의 치유)의 의사이다. 자기의 행동을 위대한 진실에 봉사 실천하게 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시시포스 같은 인물이다. 병 앞에서 일체의 반항까지도 넘어서 투쟁을 하듯이 진료를 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육체적인 병만 치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치유 행위는 인간의 폭을 넓혀 준다.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병들어 있는 인간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직무를 통해 그것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신부의 구원 행위와는 다른 사랑 행위인 것이다.
 
  작가 카뮈의 의도는 ‘타루’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타루는 한 검사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방청석에 앉아 아버지의 논고를 들었다. 자기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죄인)의 목숨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요구하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에 집을 나와 사형반대 운동에 앞장선다. 자기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사회가 누군가에게 사형을 내리는 이상, 그는 그 사회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타루는 사형반대 운동을 위해 어느 정당에 가입한다. 한데 정당이 하는 일을 보고 절망한다. 그 정당은 살인을 근절하기 위해서 사형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는 탈당했다.
 
  페스트가 만연된 세상에서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하고, 간호원 노릇을 하면서 의사 노릇을 하기까지 한다. 페스트에 대한 반항이고 투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야말로 부조리의 영웅인 것이다. 바윗덩이를 산정으로 밀고 올라가고, 산정에 올려놓은 그것이 다시 굴러 떨어지면 되돌아가서 다시 밀고 올라가는 시시포스처럼.
 
  그의 치유 행위는 외면적인 페스트 치료와 내면적인 영혼에 달라붙어 있는 증오·거짓·오만 따위의 페스트를 치료하는 것이다.
 
  순수, 이것이야말로 마침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 이상의 인간 구원인 것이다. 때 묻지 않은 사람의 이성이야말로 남에게 때를 안 입힌다는 숭고한 진실을 타루는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숭고한 진실, 혹은 순수는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인(仁·어짊)과 같다. 어지럽고 추악하고 잔인한 세상을 구제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수한 이성, 혹은 어짊이다.
 
  세상에는 진정한 의사가 필요하다. 진정한 의사는 그 외면적인 행동이 외면적인 치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악과 싸워 이긴 하나의 영혼의 완전성에서 빚어지는 그러한 사람이다.
 
  이 소설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인물이 한 사람 있는데, 그는 오랑시에 파견 나왔다가 시가 외곽을 차단하는 바람에 오랑시에 갇힌 신문기자 랑베르이다. 그는 파리에 남겨 놓은 사랑하는 아내와 만날 길이 없어져버렸다.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탈출을 기도하지만 성사되지 않고 헛수고만 했다. 그런데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어느 날, 드디어 탈출에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약속되어 있는 부두로 나가 배를 타려는 순간, 마음을 돌려 뒤돌아서고 만다. 그의 마음은 분열되고 있었다.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느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적과 싸우느냐 하는 것이었다.
 
  괴로운 사람들을 돕고, 구해 주기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편에 서게 하는 것, … 행복이란 것은, 고난의 전 인류를 보듬고 있는 더 큰 테두리 속에 있는 것 아닌가. 카뮈의 이러한 생각이 이런 인물들(리외, 타루, 랑베르)을 창조한 것 아닌가.
 
  내가 이 책을 현대고전으로 삼는 것은 카뮈의 실존주의적인 사상,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사상이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의 밑바닥에 깊이 깔려 우리 민중들을 깨어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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